양산형
낭만 시대
2천년대 초중반의 개발을 돌이켜보면 이 시대야말로 낭만적인 개발을 하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MMO 게임을 만들려던 개발팀이 어디에나 널려있었고 다들 경험은 별로 없었지만 꾸역꾸역 긴 시간에 걸쳐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동작하는 MMO 게임을 만들어냈습니다. 다들 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게임을 만들고 있던 덕분에 출시된 게임 상당수로부터 비슷한 시행착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고 고객들은 이런 게임들을 통틀어 양산형 게임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들 각각은 딱히 이런 게임들을 양산할 의도는 없었지만 '업계'로 불리는 더 거대한 조직 관점에서는 비슷비슷한 게임이 반복해서 출시됐으니 그렇게 불려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대를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큰 이유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시행착오가 허용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가령 규모가 큰 게임을 개발하는데 3년 정도는 주어졌고 덕분에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가장 비싼 귀금속처럼 반짝이는 3개월짜리 마일스톤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신입 스탭을 더 뽑을 수 있었고 이들을 교육할 수 있었으며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팀 내에서 연구할 자원도 있었습니다. 마일스톤을 마치면 큰 규모로 테스트해볼 여유도 있었고 이 경과에 따라 개발을 회고하고 다음 마일스톤을 계획할 시간도 있었습니다. 이 낭만의 시대를 거쳐 스텝들이 발전하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높은 확률로 프로젝트가 드랍되더라도 이 경험을 '업계' 곳곳으로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
시간이 흘러 모바일게임을 만들고 서로 더 짧은 기간에 더 많은 매출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전과 비슷한 볼륨으로 MMO 게임을 만드는데 이제는 이전의 절반 이하의 기간이 주어집니다. 사실 요즘 같은 세상에 1.5년보다 더 긴 기간동안 프로젝트가 진행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부담할 위험이 급격히 증가합니다. 마일스톤을 한달 단위로 구성하고 마일스톤 사이에 회고할 시간과 다음 마일스톤을 계획할 여유를 두지 않습니다. 1.5년 안에 서비스 가능한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중간에 우리를 돌아볼 여유를 프로젝트 수준에서 만들어내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오늘 피처를 마감하고 내일 아침부터는 다음 마일스톤의 새로운 피처 작업을 시작합니다. 계획, 회고, 개발, 조립, 교육 온갖 작업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병렬로 진행됩니다. 누군가는 잠깐 회고할 여유를 가지겠지만 누군가는 바로 이어서 다음 피처 코드를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이 난리 속에 더이상 신입 스탭을 구인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이들을 교육할 수 없고 우리들 스스로도 신입 스탭을 어떻게 교육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업계' 어디선가 신입 스탭을 교육해 3년차 정도로 성장시켰기를 바라며 피지의 원주민들처럼 활주로와 관제탑을 세워놓습니다. 구인은 위축되고 사람은 돌고돕니다.
디자인 외주
우리가 이런 식으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시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코어 게임디자인은 우리가 알고있는 장르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게임디자인을 고려할 이유도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게임의 코어디자인을 복제해냅니다. 컴팩이 IBM 호환 시스템을 지적재산권 문제로부터 합법적으로 개발해낸 방법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코어디자인을 복제합니다. 유튜브를 통해 상대 게임의 영상을 반복해서 재생하며 구현 방법을 추측하고 기획에서 핵심 시스템을 설계하고 엔지니어들이 이를 개발해내며 에셋 아티스트들이 여기에 필요한 아트 에셋을 발주서대로 제작해냅니다.
이 과정에 게임디자인이 개입할 여지는 아주 작습니다. 코어디자인은 성공한 게임의 유튜브 영상으로부터 옵니다. 서브시스템디자인은 서비스 중인 다른 게임의 스크린샷을 포함한 컴팩의 방식으로 작성한 기획서를 통해 개발됩니다. 이제 회사들마다 강력한 사업부서를 운용하고 있고 이들이 이미 서비스 중인 다른 회사의 게임들을 강력하게 분석해 유효할 것으로 예상하는 비즈니스모델과 운영방침을 미리 준비해놓습니다. 조금 더 여유가 있는 회사라면 데이터분석 부서를 통해 비즈니스모델을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험해냅니다. 이미 같은 회사의 다른 게임에서 사용하는 운영 시스템을 인터페이스 수준에서 붙여 서비스에 대비합니다. 낭만 시대에 신경쓰던 게임디자인은 현대에 그때만큼 중요하지도 않고 그때만큼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양산형
2천년대 초중반의 양산형 게임은 동시에 다 같이 비슷한 게임을 만든 결과로 그렇게 불렸다면 현대의 양산형 게임은 실제로 서로가 서로를 대한민국 법률을 지키는 선에서 복제해 코어 게임디자인을 구축하고 서비스에 당연히 필요한 프레임워크를 개발하며 서로의 정책을 강력하게 연구한 비즈니스모델과 운영정책을 통해 실제로 양산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고객 입장에서 실제로 비슷해보이는 게임이 시장에 나타나며 이들은 과거와 달리 실제로 서로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개발된 결과입니다.
우리의 과제
게임회사에서 시스템디자인을 업으로 하는 사람 관점에서 이 상황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과제는 좀 더 유연한 시스템디자인입니다. 가령 이전의 어떤 프로젝트의 라이브 상황에서 목요일 새벽 업데이트를 앞두고 사업의 요구사항을 받아 캐릭터에 새로운 액세서리슬롯을 추가하고 리소스를 만들고 데이터를 만들고 밸런스를 조정한 다음 상점 데이터를 만들고 이벤트를 만들어 자정 즈음에 완성한 다음 목요일 새벽에 예정대로 업데이트한 적이 있습니다. 어처구니없었지만 현대의 게임비즈니스 의사결정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과제는 이런 상황조차도 놀라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라이브 상황에서 이전 시대에는 추가할 수 없었던 요소를 이제 추가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결과로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대단히 유연한 시스템디자인 컨셉을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분간은 회사와의 계약을 깨지 않기 위해 양산형 게임의 시스템디자이너에게 이런 과제가 주어져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정도로 마무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