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교육자에게 최악의 시대일 수 있다
어쩌면 현대는 대면으로 교육을 제공하는 교육자들에게 썩 좋지 않은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이분들의 책임은 줄어들고 경쟁은 심해집니다.
나는 일을 즐기며 일할 수 있을까? 끝부분에 언급한 모임을 마무리하고 방향이 같은 사람들과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도중에 문득 이 날 나눈 이야기 중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서로의 지적 허영심을 드러내는 얕은 지식을 연결하던 생각을 해봤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에 첨부한 온갖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 여러 가지 실험 결과, 이름 모를 법칙과 이론들은 이야기를 훨씬 재미있게 만들었고 또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 넣고 있었습니다. 그냥 이야기만 전달했다면 모두가 그런가보다 하고 각자의 연관된 경험으로 바로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야기에 첨부된 여러 얕은 지식들은 이야기가 여러 방향으로 확장될 다양한 여지를 제공했고 모두의 성격적 특성 상 그렇게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확장하다가도 적당한 때가 되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한 가지 주제를 마무리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훨씬 즐거웠습니다. 왜 아직도 글을 만들고 있어?에서 설명한 현대적인 정보 전달 방법인 영상을 통해 정보를 얕게 접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슷한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거나 이런 형식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각자가 훨씬 더 깊이 공부했어야만 할 겁니다.
현대에는 주요 정보 전달 수단이 이전의 글이나 그림에서 영상으로 변했는데 이는 소위 멀티미디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고 또 본격적으로 마케팅에 동원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으로부터 거의 20여년이 지난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 자신도 모르는 주제를 검색할 때 이미 누군가 이에 대해 공부한 다음 잘 설명해 놓은 영상이 있지 않을까 하며 구글보다 유튜브에 먼저 검색하곤 하는데 운이 좋으면 정말 이 주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다양한 자료를 끌고 와 설명하는 훌륭한 영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상을 일단 재생한 다음 영상을 보고 들으며 동시에 영상으로부터 나온 다른 소주제들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검색하며 영상을 따라가며 영상이 끝날 즈음이면 주제에 대해 꽤 이것 저것 설명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곤 했는데 이 경험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전통적인 검색을 통해 여러 텍스트 정보를 읽고 스스로 다음 검색어를 생각해 내야 하는 방식과 비교해 영상은 이미 다음 검색어를 영상 스스로가 여럿 던져 주기 때문에 이 과정을 건너 뛰고 바로 의미 있는 검색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전에 비해 더 다양한 주제를 더 얕게 알고 있는 상태가 됐는데 각각에 대한 지식은 얕디 얕지만 이를 일상 대화에 적극적으로 가져와 참조하면서 대화를 다채롭게 만들 수 있었고 또 이야깃거리를 늘릴 수도 있었습니다.
공각기동대 TV시리즈 시즌1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사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뇌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해 네트워크를 통해 뇌 바깥에서 정보를 실시간으로 가져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세계에서 더 이상 쓸모는 없지만 관례적으로 서적을 보관하는 도서관에서 등장인물들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시리즈 전체에 걸친 사건을 일으킨 정본인과 또 한 시리즈 전체에 걸친 사건을 따라가며 이를 해결하려고 한 사람이 나누는 대화 역시 대화를 계속함에 따라 각자가 알고 있는 책이나 사람, 사건을 첨부해 진행되는데 이 대화는 선문답에 가까워 대화 자체가 이야기에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지만 중간에 등장한 공안 9과 과장이 이 대화를 따라가기 위해 외부 기억장치가 필요했다는 말을 하며 이 대화의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뇌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해 실시간으로 외부 기억에 의존해 생활하는 세계에서 이 시술로 인한 심각한 문제를 겪는 소수의 경험은 쉽게 무시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결국 뇌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한 삶을 거부하지 못하고 이에 익숙해졌으며 이 가상의 시술로 인해 직접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개인 역시 이 시술로 인한 기능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치 침습적 시술을 통해 몸에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실상 외부 기억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사용되는 현대의 스마트폰으로 인한 명과 암의 관계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문득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정보를 습득한 결과 이전에 비해 짧은 시간 동안 더 얕은 지식을 얻게 됐지만 이런 얕은 지식의 범위가 넓어져 일상 대화에 이를 적극적으로 참조할 수 있게 된 상황은 어떻게 보면 이전에 이를 가능하게 해 왔고 지금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가르치는 분들의 관점에서는 최악의 시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전에는 사람마다 가르치는 스킬이 다르더라도 이 사실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현대에는 영상 매체를 통해 서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치는 스킬이 극명하게 드러나며 소위 멀티미디어를 통해 같은 주제를 더 잘 가르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차이를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령 한동안 상대론 관련 영상들을 수 십 개 봤는데 영상 대부분이 거의 같은 소재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시공간 개념에서 시작해 왜 이 모든 이야기에 빛이 끼어드는지, 또 서로 다른 관찰자 사이에 시공간을 어떻게 달리 해석하는지, 그리고 3차원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진 직관에 반하는 실제로 인한 여러 모순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지며 여러 영상은 이들을 설명하는 순서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이 내용 거의 대부분을 빠뜨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 영상을 보며 영상에 따라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고 이 차이에 따라 이해에 큰 도움을 준 영상이 있는가 하면 그저 소재를 나열할 뿐 이들을 묶는 맥락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좋지 않은 영상도 있었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배우려는 사람은 그저 여러 영상 중 더 잘 설명하는 영상을 골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그만이지만 이를 제작하거나 직접 대면해 가르치는 분들 입장에서는 같은 주제를 훌륭하게 설명하는 영상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인터넷은 이를 사용할 여러 비용 - 회선, 단말기, 시간 등 - 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 일단 비용을 지불하고 나면 전 세계와 경쟁하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같은 주제를 가르치는 영상을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이런 영상과 경쟁해야 한다는 점은 대면해서 가르치고 직접 질의응답을 실시간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 물론 이는 엄청난 장점입니다. - 장점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같은 영상을 보고 가르치기 위한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할지라도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여러 자료를 참조해 가며 실시간으로 설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계속해서 재생되는 영상에 기반해 미리 완벽하게 준비된 자료를 정확한 순간에 참고해 가며 설명하는 형식보다 효율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현대는 정말 쉽지 않은 시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제 생각은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반박 되었는데 우리들이 인터넷에서 영상을 통해 이전에 비해 아주 빠르게 얕은 지식을 얻어 일상 생활에 첨부해 가며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위해 우리 모두는 교육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영상을 보고 이를 개인의 얕은 지식으로 받아들일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은 영상의 내용을 직접 검증하는 것입니다. 영상을 통해 가르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 정보는 대체로 이들이 올바를 거라는 가정을 해야만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올바른 정보를 전달해 신뢰를 유지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는 하지만 누구라도 이런 입장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틀린 정보를 전달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육 과정에서 책임을 가진 가르치는 분들은 이런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이 분들이 인터넷 상의 영상에 비해 덜 효율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하더라도 이 분들은 교육 과정 및 내용의 검증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퍼지는 잘못된 상식, 잘못된 과학 정보가 이미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세계에서 여러 지식을 설명하는 영상을 통해 얕은 지식을 빠르게 습득해 일상 생활에서 대화와 생각을 다채롭게 만드는 것은 분명 이 시대의 장점이지만 이에 따라 가르치는 분들은 이전보다 훨씬 가혹한 환경에서 경쟁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상 속 그들에게는 없는 책임 마저 지고 있어 이 분들 입장에서 최악의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지만 책임의 관점에서 영상은 이로부터 얻는 정보의 사실 여부에 대한 판단을 생략하는 댓가를 치러야만 비로소 정보로써 동작하는데 비해 가르치는 분을 통한 학습은 그 댓가를 가르치는 분께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