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은 조니와 함께

사이버펑크 2077을 처음 접하고 나서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나이트씨티에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은 조니와 함께

3년 전 사이버펑크 2077이 발매되자마자 구입해 플레이 했고 저 역시 아직 덜 다듬어진 게임이 출시 당한 것처럼 보여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MMO 게임이 출시 전에 게임 전체에 걸친 수없이 많은 퀘스트를 전부 테스트 해 보고 또 인간이 직접 퀘스트 진행 도중 의도하지 않을 법 한 이상한 행동을 시도해 퀘스트가 망가지지 않는지 확인하기를 반복하는 것과 비슷한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할 상황인데 그들도 분명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임이 출시되어 다운로드 되고 실행도 되는 상태인 것으로 미루어 그들 역시 게임에는 아직 수 천 시간의 작업이 더 필요하지만 우리들은 알 수 없는 어떤 어른들의 이유 때문에 그 상태로 게임을 출시하지 않았을까 싶어 저 유명한 쓰레기장에서 기어 나올 때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상태로 기어 나올 때는 기분이 나빴지만 또 특정 퀘스트를 진행하다가 별 생각 없이 자동차 트렁크를 열면 스크립트가 꼬여 퀘스트가 진행되지 않는 상태에 빠질 때는 개발팀에 측은한 감정도 들었습니다. 퀘스트가 꼬이자 ‘아… 얘들 어떻게 해 ㅠ_ㅠ’ 싶어 화를 내는 대신 게임을 끄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최소한 처음부터 끝까지 퀘스트를 따라 플레이 하는 경로 정도는 온전히 동작하는 상태에서 게임을 출시했기를 바랬지만 이 정도 기대에도 게임은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진행하자 진행을 망가뜨리는 어느 정도 일관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이트씨티에서는 여러 가지 행동에 주의하지 않으면 큰 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또 실천하기 시작하면서 이 도시에서 삶에 익숙해집니다. 일단 이런 상태에 도달하자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나이트씨티의 여러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언덕으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길 끝에 있는 비싼 집들, 기업 플라자와 저팬타운의 엄청나게 화려하지만 좀 낡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사이버펑크 이미지,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다른 존을 로딩하는 대신 같은 존 안에서 진행되어 화면 구석에 보이는 퀘스트 목적지를 가리키는 마커에 표시된 거리가 선형으로 줄어들거나 늘어날 때 느껴지는 공간감은 오동작에 집중할 때는 잘 느낄 수 없던 만족스러운 요소들입니다.

물론 거의 10여년 전에 출시한 GTA와 비교하면 그런 도시의 껍데기와 함께 동작해 도시에 생동감을 불어 넣어 주는 지나 다니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은 이 세계에 대한 몰입을 시도 때도 없이 깨곤 합니다. 이미 파크라이 시리즈로부터 멍청한 사람들이 몰입을 깨는 상황에는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이트씨티 주민들의 멍청함은 또 다른 차원의 무언가입니다. 자동차는 멀쩡하게 도로를 달리다가도 갈림길이 나타나면 멈춰 서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암만 생각해도 이건 게임 상에서 도로가 나눠지거나 합쳐지는 상황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생기는 문제 처럼 보였습니다. 또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어찌나 겁이 많은지 지나가다가 실수로 무기를 꺼냈을 뿐인데 시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 앉아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기도 하고 저 유명한 경찰들은 마치 닌자라도 되는 것 마냥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는데 역시 아라사카가 지배하는 나이트씨티 다운 설정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트레일러에 등장한 긴장감 넘치는 지하철은 입구만 있을 뿐 동작하지 않았고 갱단들은 전투 중 수시로 제 위치를 놓쳐 멍청하게 행동하기를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세계를 잠시 떠나는 의식에 소개한 것처럼 이런 오픈월드 게임을 플레이 할 때는 최대한 이 세계의 특징을 인정하고 세계에 몰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파크라이나 고스트 리컨에서 사람들이 멍청하게 행동하더라도 그냥 이 세계 전체에 인간들의 지능이 높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이트씨티에서 사람들은 종종 모르는 길이 튀어나오면 급정거 한 다음 어느 길로 갈 지 고민한다고 생각하면 그리 이상하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유로트럭 시뮬레이터에서도 고속도로에서 램프를 통해 빠져나온 다음 앞에 가던 승용차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갈림길 앞에 급정거해 그 차를 들이받으며 얼마나 욕을 해 댔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원래 게임 속 자동차들은 다 그런가보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실수로 총을 꺼내면 모든 사람들이 쭈그려 앉아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원래 이 도시에서 살인사건이 자주 일어나니 겁이 좀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는데 게임을 시작할 때 가만 놔 두면 매일 전날의 사망자 수 로또 번호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을 정도이니 겁이 많아도 이상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 또 마치 닌자처럼 빠르게 공간을 건너뛰며 움직이는 사이버 사이코가 득실거리는 세계에서 등 뒤에 갑자기 생성되는 경찰은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사이버 사이코와 경찰은 스킨만 다를 뿐 같은 로직으로 동작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런 경찰도 나름 정감이 느껴집니다.

이런 아쉬운 점들을 특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나이트씨티에 몰입해 플레이 할 수 있는데 초반을 좀 지나면 퀘스트 진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문제도 줄어들어 어느 정도 게임 답게 플레이 할 수 있어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걱정 없이 게임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현대의 V가 원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머릿속에서 과거에 죽은 전설 속 인물인 조니 실버핸드와 만나고 겉보기에는 V 한 명 뿐이지만 V 관점에서는 두 명이 함께 나이트씨티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모니터 밖에서 바라보는 것은 여러 모로 재미있습니다. 더러운 모텔 방에 들어갈 때 조니가 먼저 들어가 모텔 방의 더러움을 자신의 경험에 빗대 욕설과 함께 내뱉는 모습은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재미있었고 V의 방 침대에 누워 잠들기 직전에 저 앞 소파에 앉아 있는 조니를 바라보는 경험도 잠들 때마다 반복되었지만 항상 흥미롭습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조니를 통해 조니의 과거를 경험하고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살아남아 현재에도 만날 수 있는 실제 인물들과 여러 사건을 겪으며 조니와 그들 사이의 관계를 따라가는 것 역시 어떻게 보면 식상한 스토리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런 스토리를 그들 관점에서는 제 삼의 인물인 V를 통해 겪으며 난처해 하는 인물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도 다채롭고 또 재미있습니다.

처음 플레이 할 때는 바보같이 공격 받는 타케무라를 무너지는 모텔 방에 버려둔 다음 그냥 나왔고 조니가 한심한 소리를 할 때마다 그만 좀 닥치라며 조니의 말을 무시하곤 했는데 이는 어쩌면 나이트씨티의 V는 V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대 한국에 사는 어떤 사람의 생각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움직이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V는 머릿속에 조니 뿐 아니라 다른 한 명을 더 넣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접근은 이야기가 후반으로 흘러도 진행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아 죽은 타케무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었고 또 조니와의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끝에 가서 하나코를 만난 다음 미래를 선택할 때 그 시점의 V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빅터의 가게 건물 옥상에서 렐릭 광고가 걸려 있는 나이트씨티를 바라보며 권총으로 머리를 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버리거나 아라사카와 손을 잡아 이만 조니를 머릿속에서 밀어내 버릴 수도 있었고 또 그동안 알게 된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이들의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래서 이 선택이 더 무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게임은 재미있게도 엔딩으로 가는 퀘스트를 계속해서 반복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플레이 한 결과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결말을 처음부터 게임을 플레이 하지 않고서도 모두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케무라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 V 혼자 모텔을 빠져나온 다음 아라사카에 도움을 청할 때 받는 모멸감, 누구라도 도움을 청해 아라사카 타워를 뚫더라도 그들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 또 전설적인 용병이 되어 사상 최고의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들을 모두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는데 이 마지막 선택을 통해 누군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이후에는 또 다른 엔딩을 경험할 수도 있고 계속해서 나이트씨티에서 삶을 계속할 수도 있지만 엔딩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이후 게임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가령 조니의 친구 로그가 그렇습니다. V의 몸을 조니에게 넘겨주고 조니가 로그에게 부탁하게 만들면 로그가 대단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해 주지만 마지막 순간 로그를 잃게 됩니다. 스토리상 그렇게 되는 거라 제 플레이에 따라 이 죽음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결말을 맞이한 다음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더러운 계단을 내려가 애프터라이프에 들어설 때 아는 사람들이 V를 반겨주지만 더 이상 머릿속에 조니도 없고 저 안쪽에 앉아 있던 로그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V가 이제 애프터라이프의 새로운 주인이며 지금까지 게임 상에서는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거의 맥스텍이나 타고 다닐 것 같은 비행체를 타고 이동하며 모두가 V를 우러러 봐 주지만 나이트씨티에서 삶을 시작한 이후 애프터라이프에 갈 때마다 쌀쌀맞게 맞아 주던 로그가 마치 처음부터 거기 없었던 것처럼 표현되는 그 상황은 사실 그 장소를 벗어나기만 하면 아무런 차이도 없지만 계속해서 마음이 쓰입니다. 결국 인터넷을 검색해 다른 엔딩은 없는지 찾아봤고 조니의 무덤에 찾아갈 때까지 조니와 친밀도에 따라 또 다른 엔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 시점까지의 플레이는 이미 그 엔딩을 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결국 또 다른 V를 만들어 제키와 만나 나이트씨티에 다시 갈 결정을 합니다. 이제 새로운 결말을 볼 준비는 됐지만 한동안 하나코와 만나지 않고 나이트씨티의 온갖 사사로운 이야기를 살펴보며 문득 그 플레이를 시작한 이유를 잠시 잊었고 사이버펑크 2077 자체도 더 이상 플레이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다음 확장판 팬텀 리버티가 출시되었고 동시에 원작도 2.0 업데이트가 이루어지며 그 동안 조금씩 업데이트 되어 가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이트씨티에 여러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창 즐겁게 플레이 한 스토리에 이어 새로운 스토리와 새로운 지역이 있다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구입했고 팬텀 리버티 스토리를 진행했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사이버펑크 2077의 일인칭 플레이는 뭔가 표현하기는 쉽지 않지만 여느 일인칭 게임의 경험과 상당히 달라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사이버펑크 2077은 일인칭도 삼인칭도 아닌 그 무언가, 말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굳이 이야기하면 이인칭 슈팅 같은 뭔가 이상한 게임입니다. 팬텀 리버티 확장팩은 아마도 강력한 적을 피해 숨어 다니는 플레이 위주로 진행할 것을 가정하고 만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새 캐릭터를 만들어 시작할 것을 권합니다. 이 때 새 캐릭터를 만들어 팬텀 리버티를 시작하면 레벨 15짜리 캐릭터로 시작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귀찮게 뭐하러 그러나 싶어 이전에 플레이 하다가 남겨둔 레벨 50짜리 캐릭터로 팬텀 리버티를 시작했는데 여전히 슈팅 메커닉은 어딘가 맛이 가 있어 튜토리얼 구간에서 떨어져 죽곤 했고 또 분명 피하라고 만든 것 같은 적들을 썰어버렸는데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주로 어쎄신크리드 시리즈나 고스트리컨 시리즈가 잠입 플레이를 깊이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져 레벨디자인도 이상하고 적들의 시야도 이상하고 플레이어가 제대로 숨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도 이상한 경우가 많습니다. 눈높이를 올리면 자연스러운 지형에 기반하면서도 잠입 요소가 인게임 메커닉, 적들의 움직임, 레벨디자인 등에 훌륭하게 녹아든 팬텀 페인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에 비하면 이 게임의 잠입은 그냥 동작하지 않는다고 보는 편이 나을 정도입니다. 플레이어의 기본 스킬 중 하나인 해킹 메커닉은 잠입 요소와 서로 충돌해 이상한 상황을 만들어냈고 여느 잠입 게임들이 한 번 실수하더라도 잠입 상태를 회복해 플레이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여지를 주는데 비해 이 게임은 한 번 실수하면 잠입에서 무쌍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꿔야만 하는 등 잠입을 만들고 싶은 것은 알겠는데 이를 실행하기에는 여러 모로 경험도 부족했고 또 고민의 깊이도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거의 강제로 잠입해야 하는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냥 다 칼로 썰어 버리며 플레이 했고 다행히도 게임은 이런 플레이에 게임 속 인물들을 통해 ‘야이 x팔 너 때문에 다 망쳤어 책임져!’라고 말하면서도 어쨌든 V가 사람들을 다 썰고 다니도록 놔뒀습니다.

팬텀 리버티에서 인상적인 점은 새로운 인물들을 보여준 다음 이들 각자와 따로 만나며 이들의 과거 경험과 현재 상태를 각각 V에게 알려준 다음 차츰 사건이 절정으로 다다를 무렵 플레이어에게 둘 중 어느 한 가지 선택을 강요하게 만드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어느 한 쪽을 지지했더라도 플레이를 해 나감에 따라 양쪽 모두 지금의 상태에 도달한 과거의 행동을 해야만 하는 원인이 있었으며 그 원인과 자신들의 행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파악해 감에 따라 분명히 양쪽으로 갈려 있는 인물들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는 것이 올바를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퀘스트가 절정으로 치닿는 순간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만 하는데 이 선택에 따라 이후 플레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어느 한 쪽을 선택했고 그 댓가로 달로 떠나는 공항에 나타난 수많은 병사들을 정말 정신 없이 썰어대야만 했습니다. 이 전까지 게임이 생각보다 잠입 없이도 할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엔딩처럼 엔딩 이후에도 계속해서 나이트씨티에서 온갖 사사로운 일을 해결하며 지낼 수 있는데 나중에 걸려온 연락을 통해 이전에 V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이런 스토리텔링은 흔히 생각할 수 있긴 하지만 이를 이 정도로 만들어냈다는 점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팬텀 리버티 엔딩을 본 다음 곰곰이 생각해보니 왜 지금은 기업 여성형 V를 플레이 하고 있는지 이유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 플레이 할 때는 별 생각 없이 노마드 남성형 V를 플레이 했는데 처음 엔딩을 보며 자신의 선택에 실망한 다음 게임을 다시 시작했고 엔딩 직전까지 갔지만 게임을 그만 뒀다가 팬텀 리버티가 출시되며 이를 다시 플레이 해 팬텀 리버티 엔딩을 보고 난 다음에야 문득 집에서 거울에 나타난 자신이 여성형 V인 것을 보고 왜 제가 여성형 V인지 그때서야 기억해냅니다. 이번에야말로 하나코를 만날 때가 온 겁니다.

하나코를 만나러 가기 전 빡센 전투에 대비해 그래픽 옵션을 조정해 프레임을 크게 올린 다음 하나코를 만나고 엘리베이터에서 쓰러져 빅터의 클리닉에서 눈을 뜬 다음 미스티의 안내를 받아 옥상으로 올라가 마지막으로 조니와 대면합니다. 이번에는 아라사카 타워에 진입할 때 도움을 받을 누군가를 선택하는 대신 대안을 제시해 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게임 상의 어느 곳에서도 이를 확실히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만약 이번에도 조니가 아무 말 하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고 게임을 접을 생각이었습니다.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대강 유튜브에 검색하면 다른 사람이 플레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 아주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몇 분을 기다린 끝에 조니가 다시 말을 걸어 왔고 드디어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그냥 아라사카 타워 정문으로 들어가 보이는 모든 사람의 목을 썰고 직접 지하로 내려가 미코시에 접속하는 겁니다.

팬텀 리버티 공항 만큼 힘들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이버 사이코처럼 움직이는 적들을 베는 것은 쉬웠지만 동시에 뒤에서 나타나 체력을 깎아먹는 경비병들에게 달려드는 건 좀 귀찮았고 아담 스매셔는 ‘얘가 이렇게 어려웠나?’ 싶도록 귀찮게 굴었는데 어쨌든 V의 머릿속 기준으로는 조니와 함께 아라사카 타워를 정문부터 뚫어내는데 성공했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빌어 미코시에 접근할 때와 똑같은 경험을 이어서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어쨌든 조니를 알트와 함께 블랙월 너머로 떠나 보내고 남은 삶이 얼마가 남았든지 간에 V는 나이트씨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에도 들었던 알트의 설명을 듣다가 문득 어차피 V로써의 생은 얼마 남지 않았고 이제 V의 신체는 조니에게 맞춰져 있으며 조니일 때 V의 신체는 더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V는 이미 제키와 임무에 실패하며 렐릭을 머리에 꽂는 순간부터 이미 충분히 잘못 되어 있었고 이 시점에 더 이상 삶에 매달린다 한들 그 남은 시간이 얼마나 의미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물을 통해 필멸의 삶으로 돌아가는 대신 알트와 함께 다리를 건너 뛰어내려 블랙월 너머로 떠나는 선택을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까지 조니가 질질 짜며 말렸지만 이전과는 달리 이렇게 되는 것이 사이버펑크의 세계에서 모두에게 올바르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니는 이제 V의 모습으로 나이트씨티에서 깨어나 마지막으로 V를 배웅하고 나이트씨티를 떠나는데 이 모습을 다시 보며 이전에 누군가를 희생 시킨 다음 나이트씨티를 떠나는 모습을 볼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습니다. 조니는 기타를 잊지도 않았고 다른 그 무엇도 잊지 않았습니다. 특히 나이트씨티와 그 주변에 사는 그 누구도 잃지 않았습니다. 엔딩과 스탭롤이 끝난 다음 나이트씨티에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V의 아파트에서 비행체를 타고 애프터라이프 까지 이동하는 화려한 컷씬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퀘스트를 다 해서 더 이상 퀘스트를 주지 않는 애프터라이프 저 구석에는 로그가 앉아 있었고 이걸로 이제 사이버펑크 2077을 마무리해도 되겠다는 편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만족스럽게 게임을 종료하고 삭제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