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된 행정처리 방법
이사한지 한참이 지났습니다. 내 주소지 변경과 정당에 가입해 있다는 사실 사이에 별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느날 이전 주소지 관할 지역구 의원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고서야 내 변경된 주소지를 정당에 알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소한 지금 사는 지역의 지역구 의원이 보낸 명절인사 문자라도 받으려면 정당에 알려야겠군요. 헌데 가입은 온라인으로 아름답게 받던 정당 웹사이트는 주소지 변경은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소 아래에는 주소를 바꾸고 싶으면 전화로 문의해달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슬슬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지만 뭐 별게 있겠나 하는 생각으로 일단 전화를 걸었습니다.
주소를 바꾸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전적원'이라는 문서를 작성해서 본내달라는 안내를 받았습니다. 그 문서는 도당 웹사이트의 서식자료실에 있는데 찾는 방법은 '네이버에 검색어를 쳐서 나오는 링크를 클릭'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도당 웹사이트에 도착했는데 둘러보니 서식자료실이라는게 어디있을지 짐작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최상위 레벨 메뉴는 '소식', '참여', '사람', '정보', '소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중 어느 하나에 서식자료실이란 메뉴가 있다는 건데 결국 메뉴마다 마우스커서를 갖다 대면 나오는 하위메뉴를 하나하나 읽어서 한 30초만에 '정보' 메뉴 하위에 '서식자료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그나마 잘못 클릭해서 그 밑에 있던 '사진 찾아 가세요' 메뉴를 클릭하고 말았지만요.
서식자료실에 보니 맨 위에 있는 게시물에 전화로 안내 받은 '전적원'이라는 문구가 있길래 일단 눌렀습니다. 그리고 '전작원.hwp' 파일과 마주쳤습니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고 나서 학교, 관공서, 한글과컴퓨터 웹사이트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 'hwp' 파일과 마주칠거라곤 상상해본 적도 없습니다. 이미 워드프로세서를 뭘 사용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던 시대는 십수년 전에 끝나고 지금은 로컬에 파일 형태로 저장할지 웹에 바로 작성할지를 고민하는 시대가 됐는데 왜 아직까지도 언제 hwp 파일을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터져오르는 혈압을 잠깐 진정시킨 다음 이 사태를 해쳐나갈 방법을 생각해봅니다. 혹시나 해서 워드로 열어봤는데 바이너리를 그냥 열어버렸습니다. - 내가 한글 815만 안샀어도 이 꼴은 안 당하는건데.. - 소문에 듣자하니 네이버 오피스에서 지원한다는 소문이 생각나서 네이버에 네이버 오피스를 검색해서 찾아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20년된 제로보드가 관짝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버튼 인터페이스로 뒤덮힌 웹사이트가 네이버 오피스라며 나타났는데 일단 제 입장이 말이 아니었으므로 불평에 앞서 서둘러 전적원 파일을 업로드하고 열어봅니다. 업로드에 플래시를 요구한건 적당히 넘어갑니다. 다행히도 열리긴 열렸는데 열린 꼴을 보니 원래 한 페이지짜리 문서였을 것 같은 문서를 두 페이지에 걸쳐 열어놔 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 입장이 말이 아니었으므로 서둘러 내용을 작성한 다음 저장하고 창을 닫았습니다. 제가 예상한 상황은 저장하고 네이버 오피스 초기화면으로 돌아가면 어딘가에 내가 작성한 파일 링크가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네이버 오피스는 마치 저를 처음 본다는 듯한 20년전 인터페이스로 가득한 싸이월드같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 전에 네이버 클라우드 계정이 휴면상태가 된다는 메일을 받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깊은 한숨을 쉰 다음 창을 닫았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을지 생각해보니 온라인에서 파일을 변환해주는 도구를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폼이 비어있었으므로 웹에 노출돼도 아무 상관 없어 보였습니다. 구글에 'hwp to pdf' 라고 입력하니 최소한 네이버 오피스보다는 뭐든 잘해낼 것 같은 사이트 목록이 나왔고 별 고민 없이 첫번째 사이트에서 한 페이지짜리 예쁜 pdf 파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말입니다. 위 서식자료실에는 같은 서식이 다른 게시물에 pdf 파일로 이미 올라와있었습니다. 이걸 모르고 이 짓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 이제 pdf 파일을 얻기는 얻었는데 이건 편집용 파일이 아닙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pdf 파일은 서식이 엉망이 되는 것을 감수하면 워드에서 편집할 수 있습니다. 서기 2019년에도 hwp 파일을 행정서식이라고 올려놓고 업무를 처리하는 자들에게 서식이 박살난 pdf 파일을 던진다고 해서 뭐가 대수일까 싶은 무책임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지 고민해보다가 원노트로 pdf 파일을 연 다음 그 위에 서피스펜으로 내용을 기입하기로 했습니다. 행정서식을 그대로 웹사이트에 올려놓은 감성이라면 아무래도 손으로 써서 제출하는 편이 받는 사람의 의도를 고려한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노트에서 이미지로 열린 pdf 파일 위에 내용을 기입한 다음 전체선택을 해서 그림판에 붙여넣고 png 파일로 저장했습니다. 그리고 이걸 메일에 첨부해서 도당 대표메일 주소라고 되어 있는 한메일(맙소사)을 통해 보냈습니다. 과연 이게 처리될지 어떨지 궁금해하는 중입니다.
이 과정을 겪으며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돈이 있으면서도 올바른데 투자하지 못하는 은행 같은 곳이라면 지금쯤 마음껏 온갖 인류의 터부를 공략하는 욕설을 늘어놓으며 관련자들을 쓰레기 취급하고 있었겠지만 그냥 옛날부터 하던 대로 일할 뿐인 별로 잘 대우받지도 못하고 있을 당직자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런 행정절차를 마음놓고 인류의 온갖 터부를 빗댄 언어로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냥 예전처럼 당사에 찾아가 인쇄된 서류에 손으로 내용을 기입해 담당자에게 제출하던 그 방식 그대로 온라인에 서류를 올려놨을 뿐인데 이게 뭐가 문제였을까요. 그래서 오늘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주소를 바꾸고 소속 도당을 옮겨주는 예쁜 온라인 포멧을 개발하면 되지 않느냐는 모르는 소리 대신 개발비도 없고 각 도당 간에 당원 목록을 데이터베이스로 주고받지도 않는 것 같아 보이는 환경에서 어떻게 당원들의 시간과 돈을 절약하고 혈압을 덜 올릴 수 있을지 생각해봤습니다.
일단 행정서식을 서식자료실에 올려놓는건 아무런 도움도 안됩니다. hwp 파일은 서기 2019년에 많은 사람이 가지고있는 소프트웨어가 아닙니다. 차라리 꼭 필요한 항목을 그냥 텍스트로 작성해 메일로 보내라고 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pdf 파일은 편집 불가능합니다. 워드 같은 몇몇 워드프로세서 앱에서 편집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워드 역시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가 아닙니다. pdf 파일을 올려놓는건 마치 FTA 문서를 열람하게는 해줄텐데 필기도구 없이 모니터로만 보여주겠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신 구글 설문지 도구로 서식을 통해 요구하던 항목을 입력받는걸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예쁜 폼에 주요 항목을 기입해 서브밋하면 당직자의 한메일 계정으로 예쁘게 정리되어 날아오고 이걸 처리하면 됩니다. 그러면 당적원을 손으로 써서 png 파일로 보내는 싸이코의 습격을 막는 효과도 있습니다. 물론 내부에서 당적원을 하나하나 인쇄해서 어디 파일철같은데 모아놓는다면 (안돼 제발 ㅠ_ㅠ)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요.
네. 압니다. 정보기술 없이 행정업무를 처리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요. 또 그걸 바꾸는 방법도 알지만 실행할 돈이 없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하는거라곤 지갑 역할밖에 없는 권리당원이 주요 행정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서식자료실'에서 'hwp' 파일을 마주치게 하는건 너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