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딩 크루. 새로운 시대의 자전거 공포소설
지금까지 이화령이야말로 최고의 자전거 공포소설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장류진 작가님의 신작 연수에 실린 라이딩 크루야말로 최고의 자전거 공포소설입니다.
소설가 장류진 작가님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이 분의 글을 처음 만난 건 단편집 새벽의 방문자들에서였는데 이 책의 제목이자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인 ‘새벽의 방문자들’이 바로 장류진 작가님의 글이고 이 이야기를 통해 처음으로 이런 글을 쓰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래에 이 이야기를 읽으실 분들을 위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우연한 상황 때문에 겪게 된 남자들의 이중성을 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 무척 아프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마치 방화문 너머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이 바로 저 자신인 것 같은 한숨, 안타까움, 그리고 방화문 이쪽의 당혹스러움, 이해, 연민 같은 감정들을 한꺼번에 느끼며 복잡한 감정이 되어 책을 이어 읽지 못하고 멈췄던 기억입니다.
한편 갑자기 이 이야기와는 별개로 공포물을 즐겨 읽지는 않지만 우연히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을 읽게 됐는데 개인적으로 공포물을 잘 찾지 않는 이유는 종종 한국 공포물에서 마주치곤 하는 신파, 약자 혐오, 한 같은 소재들이 종종 제게 깊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왜 항상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은 왜 항상, 단 한번도 어김 없이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는지, 또 어둠 속 저 편에 선 사람인지 뭔지 잘 알 수 없는 묘한 형체는 왜 항상 여성의 형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쯤 되면 차라리 알 수 없는 존재 대신 텍사스 전동톱 살인마 이야기가 훨씬 그럴듯한 공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뚜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공포 소설 이야기가 나오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소설이 하나 있었으니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인 ‘이화령’.
‘이화령’은 문경 근처에 있는 백두대간을 넘는 고갯길인데 이런 옛 길들은 한때 이 길이 아니면 길이 없었기 때문에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길로 활용되었지만 고개를 오르는 대신 산을 직접 관통하는 커다란 터널이 생기면서 자동차들이 모두 그쪽으로 가는 바람에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고갯길이 되곤 합니다. 이렇게 자동차들이 더 이상 찾지 않게 된 옛 길은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 안전하고 재미있는 장소로 변하는데 수도권, 특히 서울 시내에서 자전거를 타면 남북(남산, 북악) 이외에는 올라갈 만한 변변한 오르막이 없기 때문에 오르막에 목마른 사람들이 시외로 나오는 장거리를 탈 때 머리와 다리를 모두 즐겁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화령은 서울 근교의 어지간한 오르막들이 지겨워질 때 쯤 되고 또 자전거를 어지간이 탔다 하면 다들 해본다는 국토종주 첫 구간에 떡하니 버티고 있어 자전거를 타고 슬슬 시외로 나가기 시작하면 ‘이화령 한번 가볼까?’ 하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그런 곳입니다.
오르막은 크게 령, 재, 치로 구분하는데 이 순서에 따라 험하거나 높거나 한 것은 아니고 백두대간의 주 산맥을 넘는 고개를 령, 거기서 분리되어 나온 상대적으로 더 낮은 산맥을 넘는 고개를 재, 그리고 그로부터 뻗어 나온 더 자잘한 산을 넘는 고개를 치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험하기로 말하면 령보다는 재, 치가 더 가파르고 험할 때가 많고 종종 이들 중 어떤 이름도 받지 못한 이름 모를 동네 고개가 예상 외로 험해 막상 목표로 삼은 령에 도착하기도 전에 체력을 탈탈 털어 정작 목표로 삼은 령을 오를 때 울며 오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분류 방법에 따르면 이화령은 백두대간 소백산맥을 넘는 고개로 험하지는 않지만 긴 오르막이 수 킬로미터에 따라 계속되는 고개로 서울 근교에서는 이렇게 긴 오르막을 올라 볼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처음 와 보면 아무리 올라도 끝나지 않는 오르막에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화령은 인천부도 출발해 국토종주를 하려고 마음 먹으면 첫째 날 이화령을 넘어 쉴 지 아니면 이화령을 넘기 전에 쉴 지 고민하게 만드는 핵심 체크포인트이기도 합니다.
이화령에 여러 번 갔는데 어쩌다 보니 이화령에 갈 때는 항상 작은 자전거로만 가서 큰 자전거를 타고 가면 어떤 기분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화령의 곳곳이 조금씩 익숙해져 이제 고개를 숙이고 가민에 표시된 오르막 정보를 보는 대신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며 고개 자체를 즐기며 오를 수 있게 됩니다.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에 수록된 소설 제목이 ‘이화령’이다 보니 책을 사자 마자 뒀다 읽을 것도 없이 바로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평소에 나름 익숙하게 생각하던 이화령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보니 관심이 더 많이 간 것도 사실입니다. 또 국도를 달리다가 지나가던 자동차에게 이유 없이 욕설을 듣고 또 위협운전을 당하는 첫 장면이 너무 현실적이고 또 너무 익숙해서 시작하자 마자 주인공에 이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전거를 타며 개인적으로 자동차 운전자들 사이에는 우리가 모르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살해할 때마다 돈을 주는 어떤 단체가 있다는 이론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소설 속 주인공의 전화 배터리가 방전된다는 설정은 실제로 이화령을 거쳐 부산으로 가거나 서울로 갈 마음을 먹은 사람 관점에서는 여간해선 겪지 않을 상황이지만 어쨌든 설정이 이런 이상 이 설정에 이입해서 이야기를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공포 문학 책에 실린 이상 점점 더 무서운 이야기로 변해 갔는데 나중에 심박이 200을 돌파하며 이화령 정상을 오르는 순간에는 마치 제 심박이 거기까지 오른 것 마냥 무시무시했습니다. 소설 ‘이화령’을 읽은 다음부터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 중 소설을 읽는 분들께 이 이야기를 추천했는데 어떤 분들은 꽤 이입해 읽으시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전화에 블루투스로 연동된 가민이 현재 위치를 중계하는 기능이나 스트라바 유료 기능에 포함된 비컨 기능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웹사이트 주소를 그렇게 아무나 볼 수 있는 장소에 공개해 버리는 장면이나 장거리 라이딩을 하는데 폰 배터리가 방전되는 설정이 현실적이지 않다며 이입하지 않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주인공을 이화령에 외부로부터 고립 시켜 무서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은 실제 이화령을 자전거로 넘는 사람들에게 거의 일어나지 않을 만한 상황이지만 배경이 워낙 익숙한 덕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자. 그러면 다시 맨 처음 이야기했던 장류진 작가님의 이야기로 돌아가 큰 인기를 얻은 일의 기쁨과 슬픔은 하필 그 즈음에도 판교에서 일하고 있어 종종 책 표지에 그려진 그 육교인지 뭔지 모르겠는 구조물 옆을 지나다녔고 또 한바탕 술을 마셔 만취상태가 되면 판교역으로 걸어가며 괜히 그쪽으로 돌아가 그 구조물 위에 올라가 길 건너 엔씨소프트에 아직도 켜진 불빛들을 보며 ‘봐봐. 아직도 야근하네. 있는 놈들이 더한다니깐??’ 이라며 주정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구조물이 책 표지에 떡 하니 박혀 있고 이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은 마치 소설 이화령이 평소에 꽤 익숙하게 생각하던 이화령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이야기에 이입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의 배경이 그때 제가 일하던 바로 그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이야기에 이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야기 하나하나가 가볍고 무겁고 유쾌하고 기분 나쁜데 또 읽고 나면 한동안 생각할 거리를 남겨서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라고 소개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장편 달까지 가자는 나쁘지 않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는데 그 시대에 한참 뜨거운 주제를 배경으로 이런 주제에 항상 뒤따르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소위 대박 나는 이야기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석 달 전에 장류진 작가님의 신작 연수를 읽기 시작했는데 이 즈음의 저는 한창 마일스톤 마감에 시달리며 꽤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피곤해진 상태를 알 수 있는 지표 중 하나는 더 이상 출퇴근 길에, 그리고 점심 시간에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책을 막 읽기 싫어 억지로 읽는 뭐 그런 감정 상태가 아니라 책을 읽을 에너지가 없어 책이라는 존재, 책을 읽는 행동을 아예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이야기 하나를 읽을 작정이었고 딱 그 정도 분량이었는데 이야기를 반 정도 읽다가 첫 홀더 테스트를 마쳤습니다 (1), 첫 홀더 테스트를 마쳤습니다 (2)를 수행하는 기간으로 이어지며 이 책을 포함해 아무 책도 읽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 상태는 보통 아주 바쁜 기간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와 한 두 주 정도 지나면 괜찮아지곤 했는데 이번에는 두 달이 넘도록 이전 같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오지 않아 당혹스럽긴 했습니다. 이러다가 책을 안 읽는 상태가 습관으로 굳어질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읽다 만 책인 ‘연수’를 집어 들어 마저 읽기 시작했고 … 역시 웃기고 슬프고 재미있고 울적하고 안타깝고 힘을 얻고 또 감정을 소모하고 생각할 거리를 얻고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사람들의 스트레오타입을 박차고 나온 등장인물들의 숨겨진 공공연한 모습에 웃기도 합니다.
이 책의 모든 단편이 재미있지만 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바로 ‘라이딩 크루’입니다. 이 제목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만든 작은 자전거 타는 모임 이름인데 유명한 동호회의 큰 모임에 나가 여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자전거를 타는둥 마는둥 하고 여러 사람들이 여러 테이블에 걸쳐 앉아 밥 먹고 커피 마시며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른 체 출발하는 것 같으면 따라가기를 반복하는 경험을 하다 보면 큰 동호회의 큰 모임에는 그리 나가고 싶지 않아 집니다. 그런데 그런 모임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동호회 게시판에는 알리지 않고 사람들 끼리 연락해 멀리 나가서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자전거 관련 이벤트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경험이 아주 좋아지곤 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작은 라이딩 그룹을 만들려는 목적을 이해했고 즐겁게 자전거를 타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가님의 다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성별을 정의하고 읽다가 전역한 이야기가 튀어나와 잠깐 당황했는데 이야기 속 주인공 역시 멋대로 정의한 상대의 성별에 당황하는 장면이 있어 피식거렸습니다.
한편 이 이야기는 한강 자전거도로를 주 무대로 자전거를 타고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저 유명한 아이유 고개 aka 암사고개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암사고개는 한강 남쪽에서 서울 동쪽으로 자전거도로를 따라 서울을 빠져나가려고 하면 항상 넘게 되는 짧은 오르막 구간인데 서울 시내에 그런 오르막이 남북을 빼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전거를 서울 시내에서만 타다가 처음 서울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벽이 나타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웬만큼 자전거를 타다 보면 암사고개는 고갯길이라기 보다는 잠깐 올라가면 바로 서울을 빠져나가는 이정표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나중에 누군가는 이걸 ‘과속방지턱’이라고 낮춰 부르기도 합니다. 서울 밖으로 나가려면 항상 이 곳을 지나가야 하다 보니 이화령이 익숙한 것 만큼 암사고개 역시 익숙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배경에서 작가님 스타일 대로 맛이 간 남자들이 정말 바보같은 배틀을 벌이는 장면은 원래 웃겨야 하는데 좀 무서웠습니다. 암사고개를 오르는데 무슨 장비 이야기가 나오고 자전거 경력 이야기가 나오며 방정을 떨고 있으니 이거야 말로 공포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직 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공포가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라이딩 크루’는 시작할 때 이 이야기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어느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의 밤 시간을 설명하며 시작하는데 이 사람들이 창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무시무시한 사건을 보고 놀라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고 끔찍해 하고 놀라워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결코 그게 무슨 상황인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바로 퇴장한 다음 과거 시점의 주인공이 등장하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난데 없이 자전거 타는 이야기로 시작해 서서히 전개되어 암사고개의 너무 바보같아서 오히려 무서운 배틀을 거쳐 날이 어두워지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떠난 가운데 벌어지는 마지막 평지 배틀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맨정신으로 썼을까 싶은 무시무시한 장면들이 이어지며 ‘아냐! 아 안돼! 안돼! 아냐! 아니라고! 안돼! 으아앜ㅋㅋㅋㅋ’ 하는 반응을 일으키는 장면들이 정신없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맨 처음 이 이야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창 밖으로 지켜보던 그 끔찍하고 무섭고 이상한 사건과 지금까지 읽어 온 사건이 서로 연결되며 이야기가 뚝 끝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공포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제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공포물이었고 마지막 배틀이 시작되기 직전에 일어난 한 단계씩 수위가 올라가며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 장면들 하나하나를 상상하다가 그만 그런 장면을 상상한 제 머리통을 당장 몸에서 뽑아 상하지 않게 냉장고에 넣어 두고 몇 시간 안정을 취한 다음 다시 몸통에 끼워야 할 것 같은 감정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단편소설집 ‘연수’에 수록된 이야기 중 하나인 ‘라이딩 크루’야 말로 지난 몇 년 동안 마음 속에서 최고의 자전거 공포 소설이라고 생각해 온 ‘이화령’을 제치고 새로운 시대의 자전거 공포 소설로 정의하기로 했습니다.
‘라이딩 크루’는 현존 최고의 자전거 공포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