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서 하루 묵히기

문서를 작성한 다음 하루 묵혀 다음 근무일의 다른 제가 문서를 검토합니다.

기획서 하루 묵히기

한동안 여러 글을 통해 한 가지 과업에 집중 상태를 선택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특징 때문에 겪는 일, 이런 상태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최대한 적은 문제 만을 일으키도록 어느 정도 통제하기 위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글도 그런 이야기의 연장인데 지금 타이핑 하며 생각해보니 앞서 휴가 후 업무 파악은 고통스럽습니다에서 소개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마치 휴가를 가기 전의 저 자신은 오늘 휴가를 마치고 출근한 저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데 시간과 공간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정의한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이 생각은 과학적으로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또한 다중우주 이론에 따르면 확실히 지난 금요일 저녁에 일을 마무리하던 저와 월요일 아침에 일을 시작하려는 저는 다른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런 서로 다른 제 자신을 연결하는 것은 제 바깥에 남겨 둔 지독하게 작성한 기록과 그 동안의 사용 경험에 의해 썩 믿을 만 하지 않은 제 기억 뿐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휴가 후 업무 파악은 고통스럽습니다에서 설명한 분명 이틀 전의 제가 하던 일이 이틀이 지난 오늘의 저에게 생소하게 느껴지고 이 일을 파악 없이 바로 이어서 하는 행동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마치 거의 없다시피한 기억 때문에 자기 몸에 직접 남긴 기록에 기반해 행동하지만 결국 시간축에서 연속된 자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과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제 기억을 썩 신뢰하지 않고 또 기억력 역시 좋은 편이 아니며 심지어 집중할 대상을 선택적으로 유지하기도 어려운 입장에서 시간축에서 현재의 저를 과거의 저와 그나마 안정적으로 연결해 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기록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이렇게 연속된 기억 만으로는 과거의 저와 현재의 저를 연결하고 이들이 실은 물질 세계에서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겁을 내는 입장에서는 제가 작성한 문서 역시 이 문서가 과연 제대로 된 말을 하고 있을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서를 작성할 때도 이전에 남긴 여러 기록에 기반해 작성하는데 문서 하나를 작성하기 위해 항상 문서 페이지 두 개를 작성합니다. 하나는 실제로 작성해 공개할 회사에서 사용하는 노션 문서, 다른 하나는 이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이전에 다른 일을 하며 남긴 제 생각의 기록인 컨플루언스 문서입니다.

특히 개인 컨플루언스 쪽에는 문서를 작성하며 한 생각, 진행상황, 참조한 자료의 리퍼런스를 쌓아 두고 있는데 익숙해지자 거의 동시에 서로 다른 두 가지 문서 페이지를 열어 두고 한 쪽에서 자료를 참조하고 생각을 하고 이전의 다른 생각들과 현재의 문제를 연결한 다음 바로 이어서 그 결과를 다른 한 쪽 페이지에 실제 문서로 만드는 약간 이상한 작업 방식을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렇게 작성된 문서가 제대로 된 말을 하고 있는지는 그 문서를 작성한 그 직후의 저 자신이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서를 평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문서를 통해 실제 업무가 진행되어 빌드에 반영되어 목표를 달성했는지 여부를 통하는 것이지만 이는 결과론적으로 문서 작성 업무의 성공 여부를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만약 문서가 잘못 되었다면 업무 전체에 실패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문서를 작성한 제가 아닌 저와 다른 완전히 독립된 다른 사람이 문서를 평가하는 방법인데 주니어 시절에는 항상 상급자에게 문서를 제출하고 확인을 받아 일할 수 있었지만 주니어와 멀어질 수록 문서를 작성한 다음 여기에 기반해 본격적으로 업무를 진행하기 전에 확인을 요청할 수 있는 상황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이건 좀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고안한 방법은 문서를 작성한 다음 적어도 하루를 묵히는 것입니다. 곽재식 작가님의 단편집 지상 최대의 내기를 보면 ‘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작성자가 갖은 노력을 들여 마감일에 딱 맞춰 제출한 보고서는 제출한 곳 서버에 업로드 된 다음 주말 내내 아무도 확인하지 않는 상태에 놓입니다. 소설에서 이 상황은 마감 시간에 맞추기 위해 작성자가 혼신의 노력을 다해 최대한의 시간을 사용한 끝에 문서를 제출했지만 실은 바로 이어지는 주말 동안에는 어차피 문서를 아무도 확인하지 않아 작성자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문서를 마무리할 여유가 있었음을 표현하고 또 이런 상황을 조용히 비꼬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는 오늘 작성한 문서를 굳이 오늘 완료 선언하고 오늘 제출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앞에서 시간축에서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다중우주 이론에 기반해 생각할 때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잖아도 휴일 전의 자신이 하던 일을 휴일이 지난 다음의 자신이 바로 이어서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에 기억력이 나빠서도 있겠지만 실은 이들이 서로 시간 상에 독립된 다른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작성을 마친 문서를 제출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도 않은 채 그냥 방치해 두고 퇴근합니다. 실은 문서는 노션에 그냥 공개되어 있어 누군가 원한다면 아직 작성 완료를 선언하기 이전 문서를 읽을 수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일하지만 다른 사람이 직접 공유하기 전에는 문서를 찾아 읽을 만한 여유는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게 문서를 작성한 채로 방치했다가 다음 근무일에 출근해 이전 근무일의 자신이 작성한 문서를 다음 근무일의 새로운, 그리고 독립된 자신이 다시 읽으며 검토한 다음 작성 완료를 선언하고 문서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시간을 낭비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작성을 완료했다면 몰라도 그보다 훨씬 앞서 작성을 완료했다면 바로 제출해 그 날 안에 다음 협업자에게 전달되어 일을 시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게 작성을 마친 문서를 방치한 다음 다른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다음 근무일의 저는 이전 근무일의 저에 비해 같은 주제에 대해 덜 싱싱한 머릿속 상태일 수밖에 없고 상대적으로 생소한 주제의 문서를 검토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 생소함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 쓴 글의 오타를 도통 찾을 수 없어 수많은 오타를 남긴 채로 글을 공개하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이미 익숙해진 글은 중간에 빠진 내용이 있거나 설명이 좀 이상해도 이미 머릿속으로 이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문서가 얼마나 이상한지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날의 저는 이전의 저와는 같지 않은 사람이어서 이 주제를 이전의 저에 비해 좀 더 생소하게 느껴 빠뜨린 내용, 이상한 설명을 상대적으로 과거의 자신에 비해 유리하게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결론. 주니어 때는 문서를 작성한 다음 상급자에게 검토를 요청해 완전히 분리된 다른 사람이 문서를 평가해 고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주니어로부터 멀어질 수록 문서 검토를 요청하기 쉽지 않아져 곤란했는데 문서를 작성한 다음 하루 묵히는 방법으로 시간 상에서 독립된 다른 사람인 저 자신이 다음 근무일에 좀 더 생소한 입장에서 문서를 검토해 문제를 줄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런 생소함을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기억력의 문제 혹은 유전적인 특징 때문일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