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만 볼 때 일어나는 착시

숫자만 볼 때는 완벽할 수 있지만 실제 세계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그렇지 않습니다.

숫자만 볼 때 일어나는 착시

개인적으로 큰 감명을 받기도 했지만 또 동시에 싫어하기도 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스튜어트 다이어몬드의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인데 글쓴이가 겪은 여러 경험과 사례를 통해 협상론을 설명합니다. 이 책의 도입부에서 소개하는 첫 사례는 공항에서 게이트에 너무 늦게 도착해 비행기 문이 이미 닫힌 상황에서 비행기에 타기 위해 탑승을 거절하는 직원을 설득하는 대신 기장에게 보이는 위치에서 한 어떤 행동 덕분에 비행기에 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책의 나머지 사례들도 흥미로웠지만 이 첫 번째 사례를 읽고 개인적으로 삶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누군가와 협상할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얻어야 하는 어떤 결과이며 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적어도 나 자신의 감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의 감정은 중요하며 논리적인 근거 외에도 이 감정을 다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은 이후 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가령 어른들의 사정 상 원래 이번 마일스톤에 없던 요구사항을 갑작스레 추가해야 하는 상황일 때 이를 설득하는 과정은 그리 아름답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협업 조직에서 이런 작업이 갑작스레 추가된 이유를 납득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들 역시 실무자들에게 업무를 전달하며 이들을 설득하고 또 이를 갑자기 수행해야 하는 명분이 분명하지 않은 이상 갑작스런 계획을 실행하는데 모두가 부담할 보이지 않는 비용이 높습니다. 그래서 협업 부서들은 종종 이런 어쩔 수 없는 요구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도 하며 중간에서 계획을 전달할 뿐인 입장인 저에게 제가 의사결정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실상 의미 없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대안은 이미 저에게 새로운 계획이 도달하기도 전에, 그리고 저 자신에게 도달할 때 충분히 검토한 범위 안에 있을 때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상대가 감정적으로 나오거나 이미 검토가 끝난 대안을 반복해서 주장하면 자칫 저 역시 감정적으로 굴어 상황을 악화 시킬 수 있지만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요구사항의 철회가 아니라 이 업무 수행을 지시하는데 따르는 명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면 서로 감정을 다치지 않고, 또 제 감정이 좀 다치더라도 결국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이 점이 업무에 가장 중요합니다.

이런 바람직한 영향을 준 책이기는 하지만 뒤로 갈수록 글쓴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권력 관계를 활용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가령 호텔에서 원하는 서비스를 받기 위해 의사결정 권한이 없는 사람에게 권력 관계를 활용할 압력을 가하는 부분은 책에 직접 그렇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 자주 놓이는 동양인 입장에서 그리 편안하게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글쓴이는 계속해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불가능한 요구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말고 일단 요구해 보라고 주장하지만 이 요구를 받는 사람들은 이 요구를 자기 선에서 판단해 거절할 권한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요구를 일단 상사에 전달해야만 하고 이런 의사 전달 과정에서 다른 업무를 수행할 시간을 빼앗기게 됩니다. 또 조직을 설계할 때 이런 약점을 이용해 상사가 존재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를 상사에게 전달하기 아주 어렵도록 구성하기도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상사에게 요구를 전달하는 행동 자체가 큰 부담일 뿐 아니라 자칫 나쁜 평가로 돌아올 위험도 있습니다. 사실 글쓴이의 관점에 따르면 이런 상황 역시 협상에 동원할 무기이지만 중요한 상황이 아닐 때, 그러니까 고작 호텔 방을 무료로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상대를 그런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이 과연 올바른가 싶은 생각을 하며 인생에 큰 도움을 준 책이지만 그리 호의적으로만 평가하지는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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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입니다. 글쓴이인 한스 로슬링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저 유명한 TED 영상 한스 로슬링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최고의 통계를 보여준다를 통해서였습니다. 영상에서는 각 국가 별 자녀 수, 기대 수명을 각기 두 축으로 나타낸 그래프를 연도 별로 연속해서 보여주며 서로 다른 국가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가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2차원 그래프에 제 3의 시간 축을 추가해 이를 연속적으로 보여주며 각 국가들이 각 시점의 여러 정책, 국가 간의 관계, 전 지구적인 이벤트에 따라 어떤 영향을 받는지 알 수 있고 이런 방식의 스토리텔링은 굉장히 강력해 이어지는 발표자의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합니다. 이 주장의 핵심은 제 1세계 사람 관점에서 한 번 굳어진 나머지 세계에 대한 인식은 그들의 평생에 걸쳐 거의 변하지 않지만 실제로 그 나머지 세계는 계속해서, 그것도 아주 활발하게 변해 한 사람의 평생에 해당하는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의 인식과 실제 세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통계에 따르면 세계는 제 1세계 기준으로 그 나머지 세계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렇지 않은 세계들도 점점 더 이와 비슷한 세계로 편입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이후 이 분의 책을 보게 됐으며 팩트풀니스는 이 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책으로 여전히 우리들이 일상을 살아가며 제한적으로 접하는 정보와 통계를 통해 나타나는 세계의 실제 모습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의 차이를 인지해야만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마치 스튜어트 다이어몬드의 책을 처음 읽고 크게 감명 받아 생활을 많이 바꿨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책에서 말하는 여러 사례로부터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항상 이 책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하지 않게 된 것처럼 한스 로슬링의 책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슷한 방향으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여러 나라의 생활 수준은 향상되고 있으며 낙수 효과는 종종 비난 받곤 하지만 실제로 동작하고 또 국가들 사이의 분쟁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미디어에서 기후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며 제 1세계의 쓰레기가 마지막으로 향한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에 쌓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한 통계 상으로 우리는 점점 더 잘 해 나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잘 해가고 있으니 미디어로부터 볼 수 있는 선정적인 이미지들로부터 관심을 끊고 현재 생활에 머물며 정신적인 평화를 찾아도 괜찮을까요?

책에서는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또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전쟁 이후 지난 70여 년에 걸쳐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위에서 한스 로슬링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된 TED 발표에 나온 연도 별로 움직이는 그래프에서 가장 먼 거리를 움직인 나라 중 하나 일 겁니다. 그런데 단지 기대 수명과 인당 평균 소득으로 표현된 원과 원의 위치 만으로 그 나라의 현재 상태를 올바르게 조명할 수 있을까요? 일단 발표 내용으로 한정한다면 분명 의도에 맞게 각 나라의 현재 상태를 조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에 속한 개인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이런 납작한 숫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고 또 각 정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가령 한국은 세계에서 출생률이 가장 낮고 자살률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하지만 현대에는 세계적으로 잘 사는 나라에 속합니다. 저 자신이 신체적 핸디캡을 딛고 직업을 구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항상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거나 실제 상황을 함축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미디어를 통한 정보에 따르면 서기 2024년 초봄 현재 세계에서는 지난 일정 기간 안에 가장 많은 전쟁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고 이는 세계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는 기존의 기후 변화에서 한 단계 격상되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구 기후의 규칙성을 깨며 사람들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구 전체적으로 계속해서 평균 기온이 상승하고 있지만 이는 거시적인 변화일 뿐 지구 곳곳에 사는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물들은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합니다. 북반구 중위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원래 북극권에 갇혀 있었던 차가운 기류가 중위도 지역까지 내려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또 일년 내내 온화한 기후를 보이던 지역에는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극단적인 폭우가 쏟아져 장기간에 걸쳐 이를 대비해본 적 없는 사람들의 일상을 크게 바꿨습니다. 또 지역에 따라 강수량이 크게 달라진 덕분에 파나마 운하는 이를 작동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물이 부족해 매일 운하를 통과하는 배의 총 톤 수를 제한하고 있으며 이는 전쟁 만큼이나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통계적으로 여러 국가들이 더 잘 살게 되고 또 오염물질을 이전보다 잘 통제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전 세계가 더 효율적으로 무역에 임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과연 이런 통계적 시각이 세계 각지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기후 위기는 당장 기존의 기후에 대한 경험에 따른 재해 대비를 완전히 파괴하고 있습니다. 좀 더 공격적인 활동가들의 주장이 이전에 비해 훨씬적으로 들릴 만큼 우리들은 이전에 비해 더 많이 충돌하고 있고 이전에 비해 기후는 훨씬 지구 상의 생물들에 적대적이며 이로 인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저 좋아지고 있는 숫자들을 살펴보고 미디어로부터 나오는 선정적인 현실을 뒤로 한 채 우리들이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우리들의 실제 모습, 실제 위치를 파악하는데 올바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장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으로 지하수를 너무 많이 사용한 나머지 도시 전체가 가라앉아 수도를 이전해야 하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우리는 잘 하고 있으니 이대로 조금씩 더 노력해 가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상황을 파악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당장 살아가는데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숫자를 통해 바라본 상황이 실제 현상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게임 만들다가 종종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니어 밸런스 디자이너에게 별다른 정보 없이 게임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는 성장 과정을 설계해 적용하게 하면 쉽게 숫자 상으로는 아주 멋진 몬스터들의 체력과 플레이어의 공격력, 아이템 별 성장 수준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 숫자들이 반영된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 해 보면 약간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게임의 아무 시점을 플레이 해도 몬스터와 전투는 항상 서로 다른 스킬과 이펙트, 플레이어 몸에 걸친 서로 다른 아이템과 서로 다른 몬스터 그래픽이 등장할 뿐 전투 시간이 거의 같아 전투 경험은 항상 거의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쭉 플레이 해 보면 분명 레벨이 올랐고 여러 스테이터스가 증가해 공격력이 증가했을 뿐 아니라 여러 장비를 구해 장착하고 장비 각각에는 경험치를 갈아 넣고 보석을 박아 여러 특징을 추가했음에도 여전히 전투 시간은 비슷하고 전투 과정은 밋밋해 과연 이 상태가 성장을 하긴 한 것인지 느끼기 어렵곤 합니다. 문제를 제기하면 분명 수치 상으로는 플레이어의 체력과 공격력이 높아졌고 그 결과로 더 강한 몬스터를 잡을 수 있게 됐으니 올바른 숫자들이 들어가 있다는 답을 들을 수 있는데 이는 숫자만 보고 게임을 직접 확인하지 않아 범할 수 있는 오류입니다.

어릴 때 경험치 곡선을 만들어낼 때 했던 실수를 하면서 동시에 똑같은 실수를 했는데 분명 숫자 상으로는 이상이 없었고 실제로 게임의 각 부분을 테스트 할 때도 예상대로 동작했지만 롤플레잉 장르임에도 성장은 오직 숫자로만 이루어질 뿐 결코 이를 게임 상에서 체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더 높은 레벨을 요구하는 사냥터에서 만난 몬스터가 더 강하고 이는 플레이어에게 더 강한 성장 수준을 요구해 이를 만족할 때 기초적인 플레이가 가능해져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 하며 성장에 따라 이를 체감할 수 있어야 하는 측면에서는 완전히 이상한 동작이며 이런 측면에서는 숫자만 봐도 이미 이상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플레이어의 성장에 따라 몬스터나 각 컨텐츠는 이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강해져야 하며 이에 따라 플레이어의 강함과 몬스터의 강함 사이에는 숫자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방식의 차이가 생겨 근본적으로 플레이어가 좀 더 강한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숫자만이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밸런스를 만드는 사람은 종종 게임을 숫자만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목적을 숫자만으로 달성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문득 팩트풀니스를 다시 생각하며 이 책을 읽을 때 느낀 불편함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정의하려고 노력하다가 문득 이전 게임을 만들 때 게임의 어느 부분을 플레이 해도 똑같이 느껴지는 적어도 숫자 상으로는 완벽한 밸런스와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숫자 상으로 세계는 이전에 비해 나아지고 있고 기후 위기에 대응해 나가고 있고 전 지구적으로 분쟁은 감소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있다는 자료에 기반해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곳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후 위기에 의해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제 1세계로부터 나온 쓰레기가 마지막으로 동남아 지역에 도착해 주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적어도 두 곳에서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일어나 사람들을 죽이고 관련 국가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고 있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마치 엑셀 시트에 표시된 숫자만을 보고 게임의 난이도가 올바르게 상승하며 지속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성장을 요구하고 있어 의도대로 동작하는 밸런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 해 보면 어느 부분에서나 밋밋한 느낌을 주는 성장을 전혀 체감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통계는 우리들에게 의미 있는 여러 관점을 제공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지만 실제 세계를 배제한 채 숫자에 의존해 상황을 파악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또 올바르지도 않습니다. 올바른 숫자가 적용된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 해 보지도 않고 그냥 출시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숫자와 함께 실제 세계를 체험해 봐야 하고 이는 게임 만드는 과정과 실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양쪽 모두에 필요한 관점이며 숫자만 볼 때 일어나는 착시를 경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