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자아를 가질 때

먼 옛날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협연하는 유행을 시작한 공연은 현대에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제 나름의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자아를 가질 때

전자 악기를 연주하는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공연은 현대에 딱히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밴드가 어느 정도 명성을 얻으면 그와 비슷한 수준의 명성을 얻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이전에는 밴드가 직접 모든 소리를 내던 연주를 오케스트라와 함께 나눠 다시 해석한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새로운 곡을 연주하는 공연을 만들어 냅니다. 밴드와 오케스트라 양쪽 모두 각각의 명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 각각에 관심을 가지는 팬들의 주목을 받고 또 편곡 한 사람에 따라 밴드 팬들 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팬들 역시 관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런 협연은 이전에 듣던 연주와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해 주기 때문에 좋아했지만 그런 경험이 항상 훌륭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공연에 직접 가지 않으면 부주의하게 믹싱 된 음원을 통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잘 구분되지 않아 오케스트라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그냥 모든 대역의 주파수가 가득 찬 소음 덩어리를 경험하게 될 뿐이었습니다.

이런 실황 음원에 실망하곤 했지만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기 각각을 별도로 연주하며 녹음한 다음 각각을 의도에 맞게 믹싱해서 만들어지는 음반과 달리 실황은 전자 악기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녹음하기는 하지만 실황 자체의 소리 역시 녹음해 이들을 잘 섞어야 하는데 악기 각각의 소리를 녹음할 때와는 달리 온갖 잡음이 섞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케스트라는 전자 악기를 사용하지 않아 악기 각각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분리할 수도 없고 또 악기 각각마다 마이크를 붙여 녹음하기는 더더욱 어려우며 만약 그렇게 녹음한다 하더라도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음원을 엔지니어의 의도에 맞춰 적당한 소리를 내도록 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실황 음원을 들어 보면 밴드가 내는 소리는 그럭저럭 잘 들리고 또 관중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의한 현장감도 훌륭하지만 막상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도 오케스트라가 내는 소리는 쉽게 뭉개져 오케스트라의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이들의 의도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어떤 연주자들은 다른 방법을 선택합니다.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대신 기타리스트가 오케스트라의 제 1 바이올린 자리에 들어가 연주하는 형식으로 오케스트라와 기타 연주자의 연주가 모두 잘 들리는 공연과 실황 음반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연주는 훌륭했지만 이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음반을 기타 연주자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이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아니면 오케스트라에 전자 악기 하나가 추가된 오케스트라 연주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이들은 기타리스트가 작곡한 여러 곡을 연주했고 분명히 제 1 바이올린 자리에서 전자 악기 소리가 나고 있었지만 이 모든 소리의 정체성을 정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또 다른 밴드는 평소에도 키보드가 연주의 빈 틈을 공격적으로 파고들어 여러 소리를 내곤 했는데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는 원래 키보드 파트가 전담하던 오케스트레이션 전체를 오케스트라가 가져가 편곡해 연주하고 키보드 파트는 평소에 내던 나머지 소리를 담당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 공연의 재미있는 점은 무대에 밴드가 더 앞에 있고 오케스트라가 이들의 뒤체 있었는데 이런 배치로는 드러머가 밴드와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관객으로부터 등을 보이고 있는 지휘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드러머는 가까이에 볼록 거울을 달아 서로 등을 마주하고 있는 지휘자를 볼 수 있게 한 다음 지휘자의 통제에 따라 연주합니다. 이 배치는 재미있었지만 영상을 보면서도 ‘이러면 관객들에게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잘 닿을까?’ 하는 걱정을 했는데 역시나 나중에 발매된 음원을 통해 들어보니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진행하는 부분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느낌이 들어 안타까웠습니다. 그나마 오케스트라가 기존 키보드 파트가 담당하던 오케스트레이션을 통째로 담당한 덕분에 이런 부분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존재감이 드러났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협연한 공연 중 좋아하는 공연은 메탈리카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가 1999년에 협연한 심포니 앤 메탈리카인데 현대에 이를 다시 들어보면 이들도 앞서 이야기한 오케스트라의 존재가 종종 희미해집니다. 하지만 제 삶을 기준으로 이 공연은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협연하는 유행이 널리 퍼지기 직전에 처음 접한 협연이어서 앞에 설명한 여러 아쉬움을 정립하기 전에 멋지다는 생각이 먼저 자리 잡은 덕분에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마치 키보드 파트가 담당하던 오케스트레이션을 실제 오케스트라가 전담하는 것처럼 첫 두 곡인 ‘Ecstasy of gold’ 전체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이어지는 ‘Call of Ktulu'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해 중간에 밴드의 각기 각각이 하나 씩 연주에 참여하는 구성은 이런 협연이 크게 유행하며 흔해진 현대에도 여러 어려움을 돌파해 밴드와 오케스트라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두 번째 곡을 마치고 세 번째 ‘Master Of Puppets’부터는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완전히 합주를 시작해 서로의 존재감을 최대한으로 드러내며 본격적인 공연을 시작합니다.

이로부터 몇 년 후에 접해 기억에 남은 또 다른 밴드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은 'Six Degrees of Inner Turbulence'인데 이번에는 과거에 기타리스트가 오케스트라의 제 1 바이올린 자리에 들어가 연주하던 것과 비슷하게 키보드가 담당하던 오케스트레이션을 오케스트라가 완전히 가져가고 키보드는 나머지 소리를 내고 또 종종 기타가 두 개 필요할 때 기타를 따라가기도 하며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서로의 역할을 훌륭히 나눕니다. 그래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상대의 존재를 희석하지 않고 한 곡을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균형을 이뤄 연주해 냈습니다. 물론 이 공연 실황을 음반을 통해 들어보면 이번에도 오케스트라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희미한 느낌이어서 아쉽기는 했습니다. 만약 키보드 파트 전체를 오케스트라에 할당하지 않았다면 한참 이런 협연이 유행할 때 수없이 나타난 형편 없는 협연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1999년 공연이 끝날 때 분명 ‘Same time next year’라고 말했지만 이 말은 그 후 20년이 넘도록 이뤄지지 못합니다. 그렇게 이러한 경험을 잊고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일을 하고 또 다른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몇 년 전 두 번째 심포니 앤 메탈리카 공연을 했다는 소식을 늦게 접했고 이미 투어를 마쳤으며 음원이 공개된 다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느 휴일 오후 시간을 내 자리를 잡고 연주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20여년 전과 비교해 여러 멤버들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메탈리카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가 연주했고 세월이 흐르며 서로 더 완숙해지며 만들어진 새로운 곡들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안트로를 들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그룹이 연주하고 있었지만 인트로는 여전히 이 공연이 메탈리카의 공연이라는 좀을 잘 드러냈고 인트로 셋리스트는 이전과 같아 오래 전 이 공연을 듣던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만듭니다. 하지만 20여년이 흐른 다음에도 밴드와 오케스트라가 서로를 지우지 않는 적당한 수준의 취음을 하기는 어려운 모양입니다. 이번에도 오케스트라의 몇몇 악기는 쉽게 지워진 것 같았고 ‘역시 어쩔 수 없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공연 시간이 한 시간을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고개를 갸웃 거리게 만드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지난 공연과 달리 이번에는 오케스트라의 솔로,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앞서 나가며 밴드가 이를 뒤따르는 부분이 있었는데 좀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연주가 훌륭하지 않았거나 곡이 훌륭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주는 훌륭했고 이들이 내는 소리는 아름다웠으며 나중에 접한 실황 영상은 이 공연으로부터 직접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경험이 얼마나 충만했을지 충분히 상상하며 부러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가 앞서 나가는 한참 동안 이번에는 밴드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며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평소 이런 협연에서 오케스트라의 존재가 쉽게 희미해졌고 처음에는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특히 나중에 음원을 통해 들을 때 이런 불만을 가질 수 있겠지만 직접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훌륭한 경험을 했을 테니 이런 불만은 공연을 직접 관람하지 않은 사람들의 아주 작은 불만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가 앞서 나가는 연주가 계속될수록 이게 도대체 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본적으로 이 공연은 메탈리카라는 밴드의 공연이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한다 하더라도 이 공연, 이 음악의 주도권은 밴드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권한 뿐 아니라 서로가 만들어내는 연주의 결과 역시 그래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저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밴드의 연주를 기반으로 한 공연을 보고 들으러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 속에서 밴드 대신 오케스트라가 자아를 가지고 앞서 나가기 시작하자 공연의 성격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며 이번에는 밴드의 존재가 희미해졌고 이 때문에 불편한 감정을 느낀 것 같습니다. 밴드의 공연에 나타난 오케스트라가 앞서 나가며 밴드를 이끄는 시도는 좋았지만 그 결과가 밴드를 희미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근본적으로 이 공연은 밴드의 공연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기타리스트가 제 1 바이올린 자리에 들어가 연주하는 그런 공연 같은 형식 말입니다.

그래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이전 시대의 그 밴드와 이전 시대의 그 오케스트라가 다시 만나 협연한 공연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려 노력했지만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까다로워진 저 자신은 밴드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에서 자아를 가진 오케스트라가 밴드의 존재를 지우려는 시도가 포함된 공연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공연은 밴드의 공연이고 오케스트라는 밴드의 리드에 따라야 밴드의 공연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이들의 두 번째 협연은 실망스러운 기억으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