윷놀이는 왜 재미 없었을까
윷놀이를 어떻게 바꾸면 재미있어질까요?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현재 이미 2023년 추석 연휴는 지났지만 문득 본가에 내려갈 때 종종 하던 윷놀이 생각이 났습니다. 본가에 모인 가족들은 서로 여러 지방에 떨어져 살며 다양한 일을 하며 서로 상당히 다른 삶을 살아 가고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곳에 살기만 해도 보고 듣는 세계가 달라지는데 여기서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상황을 포함하면 한 집에 모인 사람들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할 뿐 서로 완전히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같은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의견을 내고 같은 뉴스를 보면서도 서로 느끼는 바가 달랐습니다. 그렇게 서로 비슷한 언어를 사용할 뿐 거의 다른 나라 사람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있다 보면 결국 서로 함께 할만한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종 방송에 나오는 개인적으로 ‘가족 포르노’라고 부르는 프로그램들은 주로 서로 완전히 다른 지역에서 완전히 다른 일을 하며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살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한 장소에 모이면 같은 대화 주제를 공유하고 비슷한 의견을 말하며 서로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하곤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서로 더 가까이에 살며 더 자주 만나고 더 자주 이야기하며 서로가 경험하는 세계의 차이를 자주 접해 이를 인정하는 요령을 익히지 않은 이상 어느 날 갑자기 만난 사람들이 가족 포르노에 나오는 것처럼 행복하게 서로를 대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는 관심사가 다르고 여러 사건에 대한 의견이 다릅니다. 사건에 대한 이해관계가 다르기도 하고 종종 서로 다른 정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지만 이를 입 밖에 내 봐야 피곤해질 뿐임을 잘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기도 합니다. 결국 어색하게 서로 작년에도 한 것 같은 뻔한 대본에 기반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차라리 이 정도 상황이면 서로 직접 부딪치는 것 보다는 나은 상황처럼 보입니다.
한편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그나마 함께 할 수 있는 일에는 음주와 화투가 있는데 서로 어지간히 다른 지방에 살며 다른 세계를 경험하더라도 다행히 비슷한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음주와 화투 중 적어도 하나 이상은 함께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실은 개인적으로 화투 규칙을 잘 모르고 한때 음주를 즐기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과도한 음주가 몸에 충분히 문제를 일으킬 만한 나이에 접어들며 음주 역시 썩 즐기지 않게 되어 서로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 모여 할 만한 두 가지 일 중 어느 쪽도 할 수 없게 되긴 했지만요. 사실 그런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이면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좀 지남에 따라 각자가 자신의 폰을 쳐다보며 각자의 관심사에 집중해 서로 충돌하는 일을 최소화하는 바람직한 상태에 진입하지만 여전히 가족 포르노라고 생각하는 어떤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황에 불만을 가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음주와 화투 두 가지 모두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을 파악하자 그 외에도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을 만한 액티비티가 나타났는데 바로 윷놀이입니다.
모든 것은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마트 사은품으로 받았을 것 같은 조잡한 나무 윷이 갑자기 소환되고 윷 네 개 중 하나의 배면에 표시해 ‘뒷도 aka 백도' 규칙을 사용할지 말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지역 농협 달력 뒷면에 유성펜으로 급조된 윷판이 생기고 그 사이에 또 어디서 눌러나왔는지 모를 바둑알과 공깃돌이 놓여 윷놀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집니다. 음주는 건강 때문에, 화투는 최소한 겉으로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데 집중하다 보니 배울 기회가 없어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윷놀이에마저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엉겁결에 가족 대항 윷놀이에 참여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윷놀이는 규칙이 참 재미 없다고 생각했고 차라리 화투를 칠 줄 모른다는 거짓말을 하는 대신 실은 회사에서 화투 게임 만들어 서비스하는데 참여한 적이 있다고 말할까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입니다. 그렇게 썩 재미있지는 않은 윷놀이 사이사이에 가벼운 음주가 곁들여져 게임은 끝까지 진행되는둥 마는둥 하며 끝나고 이 곤란하고 어색한 상황이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윷판을 치우며 문득 이 게임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지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윷은 통계적으로 앞과 뒤가 나올 확률이 일정하지 않아 결과에 대한 납득이 쉽게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윷이 동전처럼 앞과 뒤가 나올 확률이 일정하다면 결과를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윷은 한쪽 면은 평평하고 다른 쪽 면은 둥근 모양이어서 윷의 만듦새에 따라 앞과 뒤가 나올 확률이 달라집니다. 보통 앞과 뒤가 나올 확률을 6:4 정도로 계산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둥근 쪽 면이 더 넓다고 해서 둥근 면이 아래로 갈 확률이 더 높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면적 뿐 아니라 무게중심이 영향을 끼쳐 결과를 예상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결과 예상이 어려운 특징은 상황을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지만 윷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낮추기 위해 바닥에 깔아 둔 담요가 확률 이외에 해석의 여지를 남겨 게임의 원활한 진행을 방해해 게임이 진행되는 시간에 비해 결과를 해석하데 시간을 사용해 자기 턴이 아닌 사람들의 기다리는 시간을 더 길게 만듭니다.
다음으로 윷판의 구조가 단순하고 윷을 던진 결과 이동할 수 있는 칸 수와 윷판 상에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칸에 도달할 확률이 너무 높아 방향을 바꾸는 전략적 판단을 쉽게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가령 처음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다섯 번째 칸은 두 번째 턴에 높은 확률로 도달할 수 있어 거의 의미가 없는 아주 짧은 시간 - 가령 한 턴 - 동안만 안전한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뿐이기 때문에 게임에 참여하는 팀이 세 팀 이상일 경우 어느 방향을 선택하든 전략적인 우위가 없어집니다. 먼저 가운데 방향을 향해 질러 가는 선택을 하거나 판 전체를 빙 돌아 가는 선택을 하더라도 바로 이어 진행하는 두 팀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하면 바로 전략적 우위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꿀지 말지 결정하는 행동이 별다른 전략적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업기와 잡기 규칙은 위험을 감수하는데 따라 높은 보상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확률 상 두 칸 또는 세 칸이 나올 확률이 높은 특성 때문에 업기와 잡기가 훨씬 자주 일어나 위험을 감수하는데 따르는 보상을 약하게 만듭니다. 업기와 잡기가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보상을 주는 동작이 되려면 윷판이 지금보다 더 넓어 업은 상태를 더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거나 업은 상태의 상대를 쉽게 따라잡을 수 있게 만드는 윷의 두 칸 또는 세 칸이 나올 확률이 높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윷의 기반을 그대로 둔 채로 규칙을 개선하려 한다면 윷판에서 한 변의 길이를 다섯 칸이나 여섯 칸처럼 두 칸과 세 칸의 배수가 아닌 일곱 칸 같은 애매한 길이로 설정해볼 수 있을 겁니다.
뒷도나 뒷걸은 각 패가 나올 확률이 생각보다 높고 특히 두 칸과 세 칸을 쉽게 이동할 수 있어 생기는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좋은 접근입니다. 다만 앞에서 설명한 담요 위에 엎어진 윷에 대한 모호한 판정이나 사전에 충분히 합의되지 않은 뒷도, 뒷걸 규칙 적용은 음주와 함께 게임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윷놀이는 규칙을 배우기 아주 쉽고 팀마다 턴이 빨리 돌아오며 업기와 잡기 상황이 자주 일어나고 근본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전략에 의미가 별로 없어 그저 윷을 던지고 승패에 통계적으로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의사결정을 반복하게 만드는 단순한 규칙 때문에 모두가 폰을 쳐다보며 섣불리 아무 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시도해볼 수 있는 게임입니다. 특정 패가 나올 확률, 패를 통해 이동할 수 있는 칸 수와 윷판의 구조를 조금 손 본다면 게임에 필요한 핵심 의사결정인 방향 전환과 업을지 말지의 결정에 좀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극도로 단순한 규칙을 희생해야 할 겁니다.
물론 이런 물리적인 해석의 문제나 규칙의 단순함 때문에 일어나는 의사 결정이 승패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규칙임에도 불구하고 게임에 대한 몰입을 끌어올릴 수 있는 직관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규칙을 짧게 줄여 ‘패자는 카운터로’ 규칙이라고 하는데 승패에 금전이 걸리는 순간 규칙이 어떻게 되든 말든 게임 자체에 사람들을 몰입 시킬 수 있습니다. 명절에 모인 사람들이 게임에 집중할 수 있는 합법적인 수준 안에서 승패에 적당한 금전을 걸면 앞에서 말한 온갖 문제와 문제를 해결할 때 생기는 복잡도 증가 문제를 모두 피하면서도 게임에 더 몰입하고 같은 의사결정을 그 의미에 비해 좀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