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엔 바퀴 달린 악마도 나와요
종종 설정에 의해 게임 전체에 걸친 기능 도입을 경직 시키는 경우를 봅니다. 설정의 중요성을 이해하지만 오직 설정만에 의해 게임을 만들 수는 없어 꽤 시니컬한 사례를 들곤 합니다.

제 직업은 주로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에서 고위 의사결정자들의 요구사항을 구현 가능한 모양으로 설계하고 또 주로 게임디자인 조직과 엔지니어 조직 사이에 인터프리터 역할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뭐라도 있어 보이지만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그저 사장님의 뜬구름 잡는 요구사항을 어떻게든 우리들이 처한 현실과 시장의 게임들에 억지로 짜맞춘 구현 가능한 요구사항 모양으로 바꾼 다음 이를 문서로 만들어 협업 부서에 전달하고 또 그들이 이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냐고 항의하면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며 무슨 소리인지 설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직업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확실히 알게 된 점은 게임디자이너는 프로젝트의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낮은 곳 또는 피라미드에 포함되지조차 못하는 낮은 위치에 있으며 우리들은 무엇을 하든 결코 빛나지 않으면서도 프로젝트의 흥망성쇠에 따라 종종 계급 피라미드에 끼지도 못하는 우리들이 맨 먼저 정리 대상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 직군에서 오래 살아 남으려면 평소에도 손과 발기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싹싹 비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할을 다시 주로 업계에서 통용되는 직군 이름으로 바꾸면 게임디자인 직군 내에서도 시스템디자인이라고도 하는데 이 직군으로 일하다 보면 왜 이 직군이 프로젝트 전체의 계급 피라미드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밖에 있을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체로 어떤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고 또 우리들 스스로가 고위의사결정자들처럼 뜬구름 잡는 요구사항을 말하지도 않으며 우리들 스스로가 프로덕션 코드나 에셋을 직접 도출하지도 않고 그저 수명이 짧은 문서만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이다 보니 뭐든 잘못된 일이 일어나면 우리들이 맨 처음 화를 정면으로 맞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우리들이 다른 팀에서 사용할 규모가 큰 시스템에 대한 일관되지 않고 또 완전히 조각난 상태로 그때그때 전달되며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모양의 요구사항을 받아 그나마 말이 되는 모양의 시스템으로 만들어 이를 이미 발로 바뀐, 과거에는 손이었을 인체의 그 부분을 싹싹 빌어 가며 협업 부서에 요구사항을 전달해 진행 시켜 결국 동작하는 기능을 만들어 이 기능을 요청한 부서에 전달하더라도 이는 애초에 뚜렷하지 않은 요구사항에 기반했기 때문에 실 사용자인 그들의 요구사항에 잘 부합하지 않는 모양이기 쉽습니다. 우리들은 현실이나 미래를 고려하지 않는 조각 조각 나오는 요구사항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요구사항을 정제해 개발을 수행해 냈지만 결국 우리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우리들이 요구사항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냈고 이걸로는 프로덕션 데이터를 제작하기 쉽지 않다는 평가 뿐입니다. 사실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여러 고객들은 그들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들이 말하는 불확실한 요구사항에 기반해 제품을 설계하는 것은 대체로 옳지 않습니다. 때문에 고객을 무시하고 완전히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거나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고 또 알고 있어야만 하는 소수의 고객들만이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를 발주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적어도 규모가 큰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에 속한 우리들 모두는 회사 밖에서 만날 수 있는 고객들과는 달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조리 있게 정리해서 설명하고 또 자신이 원하는 바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어떻게 변화해 가기를 원하며 궁극적으로 동작하기를 원하는 모양 따위를 잘 생각한 다음 요구사항을 말할 거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며 때때로 이들은 고객보다도 더 모호한 요구사항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고 심지어는 요구사항으로 정리할 의견조차 가지고 있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는 요구사항에 기반해 어떻게든 다른 프로젝트의 이와 비슷한 시스템에 기반해 비슷하게 동작하는 빌드를 개발해 전달해 이에 기반해 프로덕션 데이터를 만들어 주기를 기대하지만 자신의 요구사항을 정의하지 못하는 여느 고객들과 마찬가지로 개발팀에 속한 구성원들조차 막상 납품된 빌드를 직접 만져본 다음에야 그들의 요구사항을 도출하기 시작할 뿐입니다. 그래서 개발 공정 상으로는 이미 개발이 끝나 이를 발주한 부서에 시스템이 납품 된 상태이지만 실제 개발은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만약 이미 개발된 시스템이 어느 정도 요구사항 변경을 견딜 수 있는 모양으로 설계되고 또 개발되었다면 이 과정에 비용이 엄청나게 높지 않을 수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실컷 개발한 시스템은 프로덕션에 유효하게 사용되지 못한 채 바로 바닥부터 다시 개발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할 수 있습니다. 섬뜩하지만 이런 일은 생각보다 자주 발생해 이 과정에 관여한 여러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한편 현대 온라인 게임은 과거와 달리 설정과 시나리오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과거에는 그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과 메커닉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고객들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전달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들의 눈높이가 올라가고 또 기술 수준 역시 상향 평준화 되어 이전과 같이 뻔한 그저 여러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 만으로는 고객들을 끌어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어 왔는데 그 중 하나는 우리들이 근본적으로 MMO를 기반 장르로 삼고 있으면서도 싱글플레이 게임에 가까운 플레이 경험을 주는 것입니다. 싱글플레이 게임에서는 세 가지 신화에 소개한 것 같은 대단한 경험을 줄 수 있는데 이들은 근본적으로 이들의 기반 장르가 싱글플레이 게임이기 때문에 고객들이 설정과 시나리오에 몰입하고 이 상태를 다른 고객들에 의해 방해 받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며 게임을 경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들은 기반 장르가 다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주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이들은 겉보기에는 여전히 본격적인 싱글플레이 게임에 비해 한없이 부족하지만 기반 장르인 MMO의 여러 가지 제약을 이해하고 있다면 현대의 MMO 게임들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대담한 시도를 마구 해 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른지도 모릅니다. 핵심은 여러 게임들이 MMO 장르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싱글플레이 게임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경험을 주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이런 시도는 주로 고객들을 외부 환경과 단절 시킬 수 있는 명시적인 인스턴스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명시적인 인스턴스만으로는 경험을 만들어내는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우리들의 기반 장르가 MMO임에도 불구하고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개인화된 경험을 만들 온갖 꼼수를 고안해냈으며 심지어 과거에 인스턴스 시작을 위한 명시적인 동작 뿐 아니라 이제는 스토리 진행에 따라 묵시적으로 인스턴스가 시작되어 중간에 MMO 환경에서 싱글플레이 환경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고객이 인지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기반 장르가 MMO임에도 고객들에게 강력한 싱글플레이 스타일의 경험을 제공하는 사례에는 로스트아크가 있고 진행에 따라 묵시적인 인스턴스에 진입하게 만들어 아주 자연스러운 경험을 만들어낸 사례에는 디아블로 4가 있습니다. 전자는 MMO 장르에서 에셋을 대규모로 제작해야만 해서 잘 시도하지 않는 것들을 시도합니다. 가령 싱글플레이 게임에서 주로 사용하는 재사용 불가능한 컷씬 - 언리얼에서는 시퀀스라고 부름 - 을 대단히 적극적으로 사용해 시각적으로 대단히 풍부한 경험을 만들어냈는데 우리들도 끝이 있는 싱글플레이 게임을 만든다면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른지도 모르지만 MMO 게임을 개발하면서 재사용 불가능한 컷씬을 제작하는데 이토록 엄청난 자원을 투입할 결정을 내리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또한 MMO 장르에서는 각 플레이어 캐릭터가 클래스에 따라, 혹은 캐릭터 각각의 성별이나 체형에 따라 움직임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탈것을 잘 만들지 않습니다. 그저 말에 탈 뿐이지만 덩치가 큰 사람이 말을 타는 동작과 덩치가 작은 사람, 혹은 아예 체형이 극단적으로 작은 클래스나 종족이 말을 타는 동작은 서로 굉장히 달라 이들 각각을 커버하는 애니메이션 에셋을 사람이 직접 제작해야만 합니다. 때문에 클래스, 성별, 종족 등에 의해 캐릭터가 증가하고 또 탈 것의 종류 역시 말 뿐 아니라 아예 탑승하는 방식이 다른 곤충이나 인공물 같은 것이 등장할 때마다 모든 경우에 자연스럽게 동작하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야만 하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탈것을 제공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람이 직접 모든 에셋을 제작해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가진 다양한 탈 것을 만들어냅니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있는데 플레이어 캐릭터가 한 명 뿐인 레드데드리뎀션 시리즈에서 사람이 말에 타고 내리는 애니메이션은 정말 아름답고 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말과 사람의 애니메이션 변화 역시 굉장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주인공 캐릭터가 단 한 명 뿐이기 때문으로 아무리 상황이 늘어나더라도 각 상황에 따라 애니메이션 에셋을 단 한 번만 만들면 되기 때문에 이 의사결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여러 종족과 성별, 그리고 체형이 서로 다른 클래스에 따라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캐릭터가 나올 수 있으며 이들 각각이 탑승 가능한 탈 것이 말 뿐 아니라 바닥으로부터 떠서 날아다니는 모양이거나 바퀴가 달린 인공물일 경우 모든 캐릭터와 모든 탈 것의 경우의 수에 따라 이들이 자연스럽게 동작하도록 하는 애니메이션 에셋을 하나하나 제작해야만 하며 새로운 탈 것이 하나라도 등장하면 이 탈 것에 대응하는 모든 캐릭터의 경우의 수에 따른 애니메이션 에셋을 추가로 제작해야만 합니다. 현대에는 이런 작업의 꽤 많은 부분을 기계가 처리해 주기는 하지만 여전히 가장 자연스러운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손을 거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 현대 게임에 설정과 시나리오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적인 설명을 하다가 주제로부터 약간 벗어났는데 이런 경향은 서기 2024년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고 시장의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비슷한 접근을 취하고 있기에 우리들 역시 크게 다른 접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느 프로젝트에서나 설정과 시나리오에 집중한 접근을 하다 보면 종종 우리들이 개발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기반 장르가 MMO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저 자신은 게임디자이너들과 엔지니어들의 경계에서 서로의 인터프리터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거의 잊지 않을 수 있지만 이 경계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우리들이 싱글플레이 게임을 만들고 있지 않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만들어진 요구사항을 보고 도대체 이 요구사항을 어떻게 우리들의 현실을 감안해 게임에 녹여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가령 앞서 사례에 소개한 디아블로 4는 특히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개인화된 경험을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또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자연스럽게 인스턴스로 전환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과거로 돌아가도 이런 경험이 필요함을 엔지니어들에게 설명하고 이 경험을 개발하는데 큰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득하기는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까지 우리들은 여전히 과거에 설정만 존재하고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시나리오 대부분은 이 시나리오 경험이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로 준비된 시나리오를 구현해봤을 뿐 같은 공간에서 플레이어 각각에게 개인화된 경험을 제공할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 지, 또 그게 MMO 환경에서 어떻게 동작해야 할 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플레이 하던 퍼시스턴트 월드에서 퀘스트에 의해 바닥에 동물의 발자국이 나타나야 한다는 요구사항을 본 다음 한숨을 쉬고 모든 것을 다음 날의 저에게 맡긴 채 그냥 퇴근해 버린 적도 있습니다.
이제 현대에는 로스트아크나 디아블로 4처럼 기반 장르가 MMO임에도 불구하고 개인화된 경험이나 대규모로 일회성 에셋을 투입하는 결정을 하는 사례들이 나타나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싱글플레이에 가까운 경험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설정에 맞춰 게임을 자작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중세 판타지 게임에 화약이 없어 이와 관련된 어떤 메커닉도 등장할 수 없어 저 망할놈의 거대한 몬스터를 쓰러뜨릴 말이 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그 간단한 대포를 피해 온갖 방법을 생각해내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또 저 무지막지한 성벽을 파괴하기 위해 그저 돌을 던져서는 절대 불가능한 그 과업을 초인적인 주인공이 홀로 성벽 위로 돌진해 성문을 열어 버리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이나마 이 장면이 게임에 아주 중요하거나 여기에 이 정도 비용을 투입할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일 때 가능할 뿐 대부분은 여전히 과거에 MMO 게임을 만들던 대로 이런 장면 하나를 위해 재사용 불가능한 에셋을 제작하거나 메커닉을 개발하는 일은 쉽지 않고 또 제 스스로도 이런 요구사항이 나타나면 설정에 맞춘 방법을 생각하기 보다는 설정을 무시할 방법이 없을지 생각하곤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은 게임이 라이브 서비스를 계속하며 여러 컨텐츠가 추가되는 과정에서 쉽게 무너집니다. 화약이 등장할 수 없던 설정은 라이브가 시작되어 수직성장요소가 투입될 때 누군가 말 없이 대포를 추가해 버리며 무너질 수 있고 중세 판타지 배경을 끝까지 지키며 출시 직전까지는 게임에 존재할 수 없었던 복장이나 방어구들이 순식간에 겉잡을 수 없도록 나타나며 이쯤 되면 게임의 설정은 초반 성장 구간의 싱글플레이에 가까운 경험을 할 때만 유효할 뿐 그 경험을 마치고 나면 스마트폰이 등장하지 않을 뿐 현대와 별로 다르지 않은 세계에서 플레이를 이어갑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결말을 이미 알고 있기에 개발 기간에 특히 설정에 의해 메커닉이나 시각 요소에 제한을 크게 받는 상황에 약간 시니컬하게 반응합니다. 앞서 사례를 든 중세 판타지 시나리오에서 화약이 없어 대포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 대포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하는 대신 그냥 대포를 넣어 버린다 하더라도 설정을 만든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이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대포가 있으니 대포를 사용해 저 망할놈의 거대 보스를 박살 내고 또 흔해 빠진 영웅 홀로 성벽 위에 올라가 병사들을 때려 잡은 다음 구석에 있는 레버를 돌려 성벽을 여는 대신 그냥 화끈하게 성문에 대포를 발사해 성문을 박살 내고 그 안으로 몰려 들어가는 장면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싱글플레이 경험을 만들고 있지만 결국 이 게임의 기반 장르가 MMO일 뿐 아니라 우리들이 수익을 내기 시작하는 포인트 역시 MMO 장르에 의한 것인 이상 설정에 너무 강하게 붙잡혀 일을 굳이 어렵게 만들 필요는 적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런 상황을 완화하려면 설정을 하는 입장에서 더 강력하게 설정에 기반한 게임 메커닉을 제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설정에 더 익숙하고 설정을 만들면서 분명 게임이 동작할 시각적 상상을 했을 가능성이 높기에 이들이 직접 메커닉을 제안한다면 일이 꽤 쉬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해 본 거의 모든 설정은 설정 모양으로 존재할 뿐 이에 기반한 메커닉은 설정을 만든 사람과는 분리된 사람이나 부서에서 만들어야만 했기 때문에 설정은 항상 개발에 족쇄로써 동작했고 이런 경험이 쌓여 결국 설정의 제약에 시니컬한 입장을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설정 설명 그 자체만을 위해 만들어진 지루한 텍스트 뭉치 역시 웬만하면 피하고 싶습니다. 현대 싱글플레이 게임에서는 설정을 설명할 때 설정에 의한 현대의 결과를 그냥 뜬금 없이 고객이 경험하게 만든 다음 나중에 적당한 시점이 되면 이전에 경험한 설정에 의한 결과를 천천히 설명하는 식으로 접근하곤 합니다. 가령 GTA에서 트레버는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처음부터 설명하지 않습니다. 일단 트레버가 사람을 발로 짓이겨 죽여 버리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여준 다음 한참이 지나서야 한밤중에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도중에 옛날 이야기를 해 주는 식으로 접근하곤 합니다. 그런데 MMO 기반으로 만들어진 여러 게임에서 설정은 그 설정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마치 지루한 소설책의 230페이지부터 시작하는 재미있는 부분을 읽기 위해 앞부분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설정을 다 읽어 나가야 하는 것 같은 경험을 줍니다. 분명 이런 장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역시 근현대의 여러 게임을 해 보고 이들의 변화를 인식하고 또 영화나 드라마, 웹툰 따위를 살펴보며 음악도 드라마도 첫 화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파일럿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그 다음의 제작 비용을 얻을 수 있는 시대라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지 않을 것 같지만 유난히 이 업계에서는 설정을 하면서도 설정에 따른 메커닉은 설정 밖에서 고민해야 하고 또 설정을 설명하기 위해 너무 낡은 접근으로 고객 뿐 아니라 개발 중인 우리들 자신 조차 시나리오를 스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다 보니 앞서 설정에 의한 제약에 시니컬한 입장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런 제 의견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두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둠 이터널에 나오는 악마 중 하나인 ‘둠 헌터’인데 둠 시리즈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이 그렇지만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습니다. 설정 상 이들은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이지만 지옥에서 나름의 문명을 구축해 전통의 악마 모양과 현대적인 기계 모양이 적당히 뒤섞인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둠 이터널을 플레이 해 보면 한쪽에서는 잠들어 있는 고대 악마인 아이콘 오브 신을 되살리기 위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밋밋한 레벨디자인을 동적으로 바꾸기 위해 현대적인 플락시글래스로 만든 투명한 방패를 든 악마들이 나타나고 슬레이어는 이들 각각에 변함 없는 폭력성으로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둠 헌터는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임에도 둠 스러운 현대적인 무기를 들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악마에 바퀴가 달려 있기까지 합니다. 실은 바퀴가 아니라 일종의 제트 추친 장치를 바닥 방향으로 분사래 공중에 떠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한참 이놈에게 더블베럴 샷건을 난사할 때는 이 놈의 움직임을 보고 하체에 바퀴가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림을 찾아보니 바퀴가 달려 있었다는 것은 제 잘못된 기억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제트엔진을 바닥 방향으로 분사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설정에 대해 시니컬한 입장에서 둠 헌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애초에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를 현대 무기를 사용해 갈기갈기 찢어 놓는 설정의 게임에 등장하는 본격적인 지옥에서 온 괴물들조차 하체에 제트 추진체가 달려 있는 현대적이고 또 어처구니 없는 모양으로 등장하더라도 게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둠 이터널에는 지옥에서 나온 악마라도 현대적인 무기와 현대적인 이동 방식을 사용하기도 하는 반면 직접 지옥에 들어가 보면 그 곳을 떠나지 못하는 전통적인 대장장이 모양을 한 NPC가 등장하기도 하고 또 진짜 악마처럼 보이는 아이콘 오브 신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둠 시리즈의 설정에 기반하기는 하지만 하나 같이 나사가 좀 빠져 있고 이들이 집중한 것은 클래식 둠 시리즈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빠른 움직임과 격렬한 전투일 뿐이었습니다. 설정은 이 경험을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들어줄 뿐 설정 자체가 게임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설정은 게임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게임 상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효과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물론 둠 이터널에서 둠 헌터를 처음 마주칠 때 지옥에서 튀어나왔다는 악마가 하체로부터 바닥을 향해 제트를 분사하며 빠르게 저를 향해 달려오는, 아니 날아오는 모습을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아니 ㅅ발 이건 너무한 거 아냐?’라고 1초 정도 생각했지만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순간 저는 일단 어깨에 장착한 보조 화염방사기로 놈의 정면을 지진 다음 놈이 회전하기 전에 재빨리 놈의 옆으로 돌아 샷건 탄환을 받아 넣었을 뿐입니다.
다른 한 가지 사례는 영화 존윅 시리즈입니다. 이 영화는 생각보다 복잡한 설정이 존재하지만 처음부터 그 설정을 모두 다 설명하려는 시도 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인공의 개가 죽고 영화 상의 빌런들의 입을 통해 마치 빌런을 소개하는 것처럼 주인공을 소개하며 사건을 설명할 뿐 설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을 처음부터 집어 넣지 않습니다. 그저 존은 영화가 시작될 때 죽여야만 하는 한 사람을 지정할 뿐이고 그 후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은 그런 존의 특징을 크게 보여주고 그 설정은 아주 조금씩 풀어낼 뿐입니다. 물론 영화를 끝까지 보고 또 시리즈를 계속해서 보면 이 영화의 세계관을 폭넓게 이해하게 되지만 그걸 처음부터 할 필요는 전혀 없었고 영화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으로 전개됩니다. 존은 한때 루스카 로마라는 조직에 속해 있었고 이 조직 뿐 아니라 다른 조직들 모두 하이 테이블 밑에 있으며 이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컨티넨탈 호텔이 세계 각지에 있지만 이런 깊은 설정을 시작하자마자 지겨운 대사나 짜증나는 텍스트로 설명할 시간에 존은 3명을 더 죽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존윅의 세계관을 설명할 수 없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만 앞서 소개한 트레버 사례처럼 그 설정을 처음부터, 혹은 올바르지 않은 시점에 무리하게 주입하려는 바보 같은 시도를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게임과 영화의 대단한 경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설정에 분명 강력한 권한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설정은 그만큼의 책임과 그 책임을 지탱할 역량 역시 필요합니다. 설정은 설정을 작성해 아무도 읽지 않는 문서에 조용히 남겨 놓은 다음 설정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개발 결과물이나 산출물을 살펴보며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만약 설정이 게임을 강하게 통제해야 한다면 설정 수준에서 게임의 핵심 메커닉과 스토리를 설명하는 방법 따위의 게임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들이 함께 도출되어야만 합니다. 설정이 설정만으로 존재할 때 이는 지켜지기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설정과 함께 이를 지탱할 게임의 핵심 구성요소가 바로 뒤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은 이상 설정은 개발을 시작하기 위한 한 가지 도구에 불과할 뿐 그 이후 설정이 지켜지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설계된 설정에서 악마는 전투 메커닉을 지탱하기 위해 하체에 제트엔진을 달고 나타나며 제대로 설계된 설정을 설명할 시간에 존은 3명을 더 죽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트레버 역시 한 명을 더 죽입니다. 여기에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