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세계에서 생활

가상 세계에 생활 기능을 넣고 싶어하지만 실제 세계의 생활 맥락을 생각하면 가상 세계에서 생활은 너무나 이상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가상 세계에서 생활

지난 존의 시대와 나의 시대를 쓰는 제 마음가짐은 마치 나는 클라리스 스탈링. FBI 소속이다를 쓸 때의 마음가짐과 비슷했습니다. 오랫동안 소설 한니발과 영화 한니발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한니발 트릴로지라고 생각하는 레드 드래곤, 양들의 침묵, 그리고 한니발 중에서 드디어 한니발 렉터 박사가 구속구를 벗어던지고 감옥 밖으로 걸어 나와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 한니발이야말로 한니발 트릴로지의 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소설 한니발의 결말이 썩 훌륭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여러 이야기에 묘사되어 온 클라리스 스탈링은 정말 강인한 사람이었고 한니발 렉터 박사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지탱해 온 근본을 내려놓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렉터 박사의 갖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영화 한니발 끄트머리에서 지계차에 매달린 박사를 묶은 줄을 끊어 주며 ‘셧업’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소설 결말에서 클라리스는 한니발 렉터 박사의 새로운 친구가 되었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결말이 클라리스 스탈링의 관점에서 아쉽다고 생각했고 마음의 불편함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개봉된지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보통 소설보다 더 잘 만든 영화는 없다고 하지만 한니발 영화야말로 소설에서 느낀 아쉬운 점을 완전히 채워 한니발 트릴로지를 마무리하는 이야기를 만들면서도 한니발 렉터 박사와 클라리스 스탈링이 각자의 어릴 때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독립된 인간으로써 그려집니다. 영화 한니발에서 마지막 순간 한니발 렉터는 자신의 오랜, 그리고 진정한 친구를 위하고 또 동시에 자기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자유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희생합니다. 또한 클라리스 스탈링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한니발에게 저항함으로써 한니발 렉터 박사가 클라리스 스탈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또 오랜 세월에 걸쳐 그가 클라리스 스탈링을 식사로 삼는 대신 친구로 삼게 만든 바로 그 강인한 모습을 끝까지 유지했고 한니발 렉터 박사에게 일생 일대의 선택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메이슨 버저의 저택 안 숲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끝부분에서 클라리스 스탈링이 경찰이 겨누는 총구 앞에 양 손을 들어올리며 ‘나는 클라리스 스탈링! FBI이다!’라고 말할 때 소설 결말에서 느낀 묵직한 소화불량이 한 순간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거야말로 제가 생각한 클라리스 스탈링의, 그리고 한니발 렉터의 그들 다운 올바른 결말이라고 생각했고 이 결말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는 클라리스 스탈링. FBI 소속이다를 쓸 때 저는 마치 유년기의 끝을 맞이하는 것 마냥 너무 오랜 세월에 걸쳐 한 가지 영화와 한 가지 소설을 끝없이 좋아하며 고민해 온 자신을 그 자리에 두고 다음 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니발 렉터의 창조자인 토머스 해리스조차 이야기 중에 아이패드와 우버가 나오는 비교적 현대를 배경으로 한 신작 카리 모라를 출간하는 마당에 언제까지 이 오래된 이야기를 끊임 없이 곱씹고 있어서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클라리스 스탈링, 그리고 한니발 렉터와 작별을 고하기 전에 마치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전 까지 답답한 기억울 가지게 만든 소설 한니발을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 보고 생각을 정리할 생각으로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읽은 소설 한니발은 양들의 침묵에서 그들이 처음 던전 안에서 만나 이야기를 시작하던 순간에서부터 시작해 마지막으로 폴을 초대한 만찬을 함께하고 영화와 달리 폴과 함께 식사한 다음 클라리스 스탈링의 인격을 파괴하려 든 폴에게 마지막을 선사하며 함께 떠나는 이야기가 이전만큼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은 마치 클라리스 스탈링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어릴적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과정으로 느껴졌으며 이전의 답답함과는 달리 마지막으로 폴에게 화살을 박아 넣으며 그에게 받은 모든 굴욕과 고통을 이 자리에 넘겨 둠과 동시에 그 모든 고통을 주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한니발 렉터 박사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느껴집니다.

이제 그만 한니발 시리즈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와 소설로부터 떠나 보내고 그 다음 장으로 나아가려는 마지막 작별인사는 소설 한니발의 결말이 이전과 완전히 달리 느껴졌다는 점에서 정신적인 충격, 신선함, 새로운 감동, 그리고 이들과 작별할 수 있는 용기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이야기의 끝을 그렇게 받아들인 다음에는 더 이상 마냥 아쉽지 않게 웃으며 그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을 떠나 보낼 수 있게 됩니다. 존의 시대와 나의 시대를 쓸 때의 감정도 비슷했는데 현대적인 일인칭 슈터 장르와 데스매치를 창조했으며 현대적인 삼차원 게임을 만들어냄으로써 제가 짧지는 않은 세월에 걸쳐 제 생계를 유지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바로 그 산업의 태동기를 일궈낸 바로 그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항상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첫 회사에서 점심 시간마다 그들, 또는 그들 중 한 명이 기여해 만들어낸 게임을 플레이하며 팀 멤버들에게 로켓을 쏴 대곤 했고 절대로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경험을 Q3DM17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다가 더블베럴 샷건에 맞아 죽으며 했습니다. 물론 하프라이프 이후에는 그 생각을 바꿨다고 하지만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스토리를 억지로 게임에 붙이기 위해 게임의 곳곳을 뒤틀리게 만드는 이상한 시도들을 볼 때마다 마음 속으로 한때 존 카멕이 말했다는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는 말을 되뇌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저 자신이 게임에 스토리를 만드는 분들의 요구사항을 받아 제 스스로 게임을 뒤틀린 모양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장본인일 때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두 존이 게임 개발의 최일선에서 물러낼 즈음 시작된 현대적인 삼차원 게임에 온라인을 접목해 영속적인 세계를 만드는 비즈니스로부터 제 커리어를 시작해 짧지는 않은 세월에 걸쳐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느 정도 안정적인 영속적인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경험적 기반을 가지게 됩니다. 이 경험적 기반을 구축하며 일어난 온갖 시행착오는 저 뿐만 아니라 업계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함께 되풀이 되었기 때문에 고객들 입장에서는 비슷한 게임이 시장에 넘쳐난다고 생각했고 ‘양산형 게임’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표현이 그리 비하적인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들이 게임을 개발하는 단계 중 일부를 실제로 ‘양산’이라고 부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제 개인적으로는 게임을 개발하는 단계들을 제조업의 그것, 혹은 화공의 그것처럼 좀 더 체계적이고 구조화된 모양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음에 한탄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고객들로부터 ‘양산형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데 기여하며 여러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칭찬을 받지는 못했지만 양산형 온라인 게임의 범위 안에서는 과거에 현대적인 삼차원 공간을 온라인에 영속적으로 구축하려는 시도로부터 훨씬 멀리 까지 와 안정적인 규칙에 기반한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지난 유년기의 끝을 맞이할 때와 마찬가지로 새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하며 지금까지 제가 잘 하는 일인 지금까지 구축해 온라인 상의 영속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부속을 설계하는 일 이외에도 팀을 지탱하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또 지금까지와는 다른 특징 있는 영속적인 온라인 세계를 만드는 임무의 일부를 담당하게 됩니다.

이 글의 초안을 작성하며 지금 이 위치까지 약 4천글자 조금 못 되는 분량의 이야기를 했는데 언제나와 같이 아직 본론을 시작하지도 않은 채로 여러 문단을 건너와 이미 기나긴 텍스트에 질려 슬슬 이 탭을 닫을 생각을 하고 계신 분이 많으실 것 같아 죄송하지만 제목의 ‘가상 세계에서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각기 다른 두 가지 경험으로부터 한 번은 가장 사랑하던 이야기의 가장 사랑하는 두 인물을 그 시점의 저 자신에게 남겨 두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는 새로운 시간대의 새로운 제 스냅샷은 새로운 시대의 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여러 책과 여러 영화를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비슷하게 이전까지 고객들에게 종종 양산형 온라인 게임, 혹은 양산형 모바일 게임이라는 썩 달갑지는 않은 평가를 받는 비슷하지만 단단한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영속적인 온라인 세계를 익숙하게 만드는 일로부터 조금 벗어나 적어도 국내에서는 잘 시도하지 않아 온, 그래서 노하우가 별로 없는 새로운 요구사항을 달성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 새로운 요구사항이 바로 가상 세계에서의 생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가상 세계에서 생활하지 않았단 말인가요?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세 가지 신화에서 어쎄신크리드 발할라에 잠시 등장하는 발할라와 같이 의미 없는 싸움을 반복하는 세계를 만든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토리에 의해 최소한의 이야기에 기반하기는 하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경쟁하고 다투고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경험을 세계가 유지되는 원동력으로 삼는 그런 세계에 가까웠지만 그 세계에서 생활한다고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뭔가 말을 길고 복잡하게 해 왔는데 저에게 주어진 미션은 게임의 일부를 담당하게 될 소위 생활 컨텐츠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느 온라인 게임에서 전투 이외에 생활하는 부분을 만들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있어 왔습니다. 다만 전투 부분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전해 온 것과는 달리 생활 부분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잘 발전하지 않아 온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전투가 계속해서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며 재시도된 것과 달리 생활은 프로젝트에 따라 시도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면서 시행착오가 이어지지 않고 항상 짧지는 않은 공백을 거친 다음 다시 거의 바닥부터 재시작하는 과정을 반복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우리들은 그 동안의 시행착오를 통해 전투 메커닉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 사이에 게임의 일부를 담당할 생활 컨텐츠를 충분히 단단하게 설계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제 이 일을 제가 이어 받아 그 깊은 심연에서부터 고객이 접하는 겉모양에 이르는 모든 부분을 만들어내야 하게 됐습니다. 저는 온라인 게임의 영속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이를 오랜 기간에 걸쳐 지탱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그럭저럭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세계에서 전투가 아닌 방법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설계하고 개발해 성공시킨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저에게 왔을 때 과연 이걸 멀쩡히 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긴 했지만 회사원 답게 까라면 깐다는 심정으로 이 일이 얼마나 무서운 지 잘 알고 있고 제가 이 일에 썩 적합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봤습니다. 먼저 가상 세계에서 생활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가상 세계에서 생활이 기존에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해 온 전투 메커닉과 적당한 수준으로 공존할 수 있는지입니다. 실제 세계에서 생활과 가상 세계에서 생활은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특징 때문에 이를 똑같이 생활이라고 부르기 어렵게 만듭니다. 실제 세계에서 생활은 일단 나 자신이 인간으로써 인간성을 유지하며 살아 있기 위한 행동의 집합이라고 보는데 아주 간단히 사람은 대략 3분 정도 숨 쉬지 않거나 대략 3일 정도 물을 마시지 않거나 대략 3주 정도 먹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으며 여러 가지 욕구를 해소해 나가는 과정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범위를 벗어나 사회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하며 이 역시 개인 관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실제 세계에서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상 세계에서 인간은 숨 쉬지 않아도, 물을 마시지 않아도, 먹을 것을 먹지 않아도 보통 죽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가상 세계가 없지 않지만 우리들은 이런 가상 세계를 서바이벌 장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장르는 아닙니다. 이전에 플레이 해 본 ‘돈 스타브’라는 게임에서는 게임 상의 여러 이벤트에 의해 주인공의 정신력이 감소하며 이에 따라 헛것을 보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등의 문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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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이런 이유로는 죽지 않으며 미치지도 않습니다. 마치 오래된 영화 매트릭스의 스파링 프로그램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이 공간에서 숨이 찬다고 느끼는가?’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데 이 가상 세계는 근본적으로 실제 세계에서 우리들이 ‘생활’이라고 부르는 행동의 거의 대부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 세계와 달리 가상 세계에서는 근육의 강함에 따라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숨을 쉴 필요가 없으니 숨이 차지도 않습니다. 또한 모피어스의 말과 같이 어떤 규칙은 실제 세계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어떤 규칙은 깰 수도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생활이란 우리가 실제 세계에서 경험해 온 생활에 기반해서는 만들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실제 세계에서 경험하고 또 좋든 싫든 해내야만 하는 생활로써 하는 거의 모든 행동은 가상 세계에서 필요하지 않으며 고객으로써 우리들 역시 가상 세계에서 실제 세계와 단어만 같을 뿐 같은 생활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먹지 않는다고 굶어 죽는 세계는 실제 세계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해 주기는 하겠지만 그런 세계에 고객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머무르게 만들어 그들에게 경험을 부여함과 동시에 우리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가상 세계에서 실제 세계와는 다른 다양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실제 세계에서는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경험해볼 수 없었던 여러 경험을 가상 세계에서는 경험해볼 수 있게 해 주고 이를 생활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가령 실제 세계에서는 몇 가지 깊이 있는 취미를 가지기도 쉽지 않습니다. 각자의 시간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각각의 취미를 깊이 있게 만들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다 보면 다른 취미에 시간을 쏟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취미에 쏟을 시간과 자원, 특히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가 부족한 나머지 최소한의 에너지만으로 도파민 충족 욕구를 만족 시킬 수 있는 영상을 보는데 집중하기도 하고 시장은 이런 욕구의 형태에 부응하고자 수많은 영상물을 만들어내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상 세계에서 숨을 쉴 필요가 없고 근육이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가상 세계에서는 실제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 가령 반복, 시간과 자원 투입, 실패에 대한 두려움 같은 요소를 최소화한 새로운 규칙에 따라 생활에 접근하게 만들 여지가 있습니다. 가상 세계에서는 시간이 없어 집 근처에 있는 공방을 매일 보면서도 엄두를 못 내던 목공을 배울 수도 있고 건물을 만들 수도 있으며 요리할 수도, 그림을 그릴 수도, 음악을 연주할 수도 있고 또 세계를 여행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행동들은 실제 세계에서는 생활이라고 부르지 않을 만한 것들이지만 가상 세계에서는 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만 여태까지 가상 세계를 만들며 세계에서 대체로 전투 할 것을 가정하고 세계를 만들어 왔기에 이미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는 그 안에서 실제 세계와는 다른 생활을 만들어내기에는 썩 적절하지 않은 모양을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가령 전투가 근본인 게임 속 세계는 세계와 상호작용 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세계는 나무와 꽃과 풀과 물과 흙과 돌들로 구성되지만 시각적으로 그럴싸할 뿐 이들과 상호작용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저 이들은 플레이어의 이동을 제약할 뿐 이들과 실제 세계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인 꽃을 파내 집에 있는 화분에 옮겨 심거나 나무를 베거나 풀을 뜯는 것 같은 행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계에서 가상 세계에 적합한 여러 생활이 가능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생활컨텐츠’를 설계하는 행동 이전에 그런 행동이 가능하도록 여태까지 구축된 세계의 규칙을 생활이 가능한 모양으로 바꿀 필요도 있습니다. 나무는 벨 수 있어야 하고 열매를 채집할 수 있어야 하며 물은 물 자체를 떠내거나 그 안에 사는 다양한 생물에 접근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전에 주로 전투만 가능했던 세계에 생활을 더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세계에 대한 시각적 접근에서 좀 더 본격적으로 세계 그 자체의 상호작용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가능하게 만들 기술적으로 너무 비싸지는 않은 방법을 찾아야만 하며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상세계와는 약간 다른 가상세계를 구축해야 할 겁니다.

다음으로 지금까지의 가상 세계의 경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해 온 전투와 생활이 공존할 수 있을지 좀 걱정입니다. 여러 프로젝트가 온라인 가상 세계를 만들라 치면 반사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코어메커닉으로 전투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프로젝트의 고위 의사결정자들이나 경영진들이 ‘전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간단히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이 여태까지 고객들로부터 ‘양산형’이라는 썩 인상적이지는 않은 평가를 들으며 만들어 온 가상 세계는 전투 말고는 사실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전투에 의해 가상 세계의 거의 대부분이 결정되었는데 가령 앞서 잠깐 언급한 가상 세계의 상호작용 수준은 전투가 필요로 하는 만큼만 만들어지곤 해 왔습니다. 나무, 풀, 바위 따위는 이동을 방해하고 전투 할 때 상대의 공격을 잠깐 피하는데 활용할 여지가 있지만 이들은 오직 시각적으로 나무 모양을 하고 있을 뿐 실제 세계에서 나무와 할 수 있는 상호작용 거의 전부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 달리 정의해 본 가상 세계에서 생활을 위해서는 전투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방법으로 나무에 대한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데 이는 이전에 비해 ‘전투보다는 덜 중요한’ 요소에 개발 자원을 투입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전투가 가장 중요한 나머지 전체 개발 기간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전투를 갈아엎는데’ 사용하다 보면 나머지 구성요소는 적당히 말이 되는 수준으로 짜 맞춘 다음 그 위에 완성된 전투를 얹어 완성시키는 경험을 해 오다 보니 과연 우리들이 전투가 아닌 다른 요소에 큰 비용을 들여 세계에 영향을 끼치게 만들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무를 벨 수 있게 만들고 그로부터 나온 나무로부터 다양한 물건을 만들고 이를 사용해 다시 가상 세계에 영향을 끼치기를 반복하고 서로가 만들어낸 물건을 교환하고 서로의 행동이 온라인 세계에 서로 동기화되고 이 행동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만들려면 분명 이전과 같이 전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여기에 가장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여기에 가장 많은 세계에 대한 결정 권한을 부여해 오던 개발 관행을 조금은 벗어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투는 대대로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코어 메커닉으로 불리기도 했으니 전투에서 필요한 가상 세계에 대한 변경은 그리 어렵지 않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우선순위가 낮은 생활컨텐츠가 가상 세계에 변경을 가하려고 하면 지금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전투에 비해 우리가 세계에 변경을 가하려고 하는 온갖 이유를 설명해야 했고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 하는 질문을 끝없이 들으며 자기 검열을 반복해야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미 있는 생활컨텐츠를 갖춘 게임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 임무 중 하나는 생활컨텐츠를 설계하고 개발을 진행에 고객들에게 게임이 전달될 때 이를 포함시키고 이들이 고객들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주는 것입니다. 실제 세계의 생활과는 개념이 상당히 달라 그 수준을 주의 깊게 설계해야 하고 또 여러 프로젝트에서 이런 기능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취급 되지 않아 프로젝트의 자원을 사용하는데 저항이 있어 왔지만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개발을 계속해 의미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상 세계의 생활이 실제 세계에서 같은 단어로 부르는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며 그 가장 큰 이유는 실제 세계와 달리 가상 세계에서는 실제 세계와 같은 이유로 사람이 잘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 매트릭스 스파링 프로그램 영상에서 모피어스가 계속해서 말하는 내용들이 실제 세계와 가상 세계의 차이여서 이를 염두 해 두면 실제 세계의 생활을 가상 세계에 그대로 가져오는 실수를 훨씬 덜 저지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전투에 비해 덜 중요하면서도 프로젝트의 자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좀 더 멋진 비전을 공유하고 높은 단계의 컨셉에서 출발해 실무 수준의 기능에 이르는 연결 관계를 항상 명확히 보이며 설득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포함된 우리들이 과연 오랫동안 잘 만들어내지 못하던 가상 세계에서 생활을 잘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걱정이 앞서지면 여튼 뭐라도 해 볼 작정입니다.

이번 60호에도 지난 2주간 공유한 이야기를 함께 보내 드립니다.


위키의 계층을 관리하는 방법
개인적으로 위키는 계층 혹은 트리 구조를 관리할 필요가 없는 기록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능을 제공하는 위키에서는 이를 관리하려는 요구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의 서드파티 도구 도입은 실패할까?
여러 프로젝트에 걸쳐 항상 비슷비슷한 기능을 개발합니다. 이런 기능 중 상당수는 플러그인 모양으로 이미 누군가 예쁘게 만들어 놓아 돈을 내면 순식간에 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보통 실패하는데 어째서일까요.
팀즈 만든 놈들은 지옥에나 가라
마이크로소프트 팀즈는 형편없습니다. 동작이 문제가 아니라 채팅과 채널로 구분된 개념은 여러 다른 도구와 충돌하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말할 수 없게 만드는 나쁜 도구입니다.
지라와 컨플루언스의 차이
문서에 내용을 기입한다는 관점에서 지라와 컨플루언스의 차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라에는 문서의 상태를 규칙에 따라 변경하는 자동화된 규칙을 포함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지금까지 여러 대형 오피스빌딩에서 일하며 냉난방이 똑바로 되는 꼴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나름 이 시대의 첨단 기술로 지은 건물일 것 같은데 항상 냉방을 하면 어느 쪽은 추워 죽고 어느 쪽은 더워 죽으며 난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쪽은 뜨거운데다가 건조해 죽고 또 어느 쪽은 얼어 죽는 상황이 고작 몇 미터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오피스 빌딩을 건설해 왔음에도 이런 문제가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같은 문제가 지금 제가 일하는 공간에서도 일어납니다.

분명 냉방을 가동하고 있지만 저를 포함한 제 주변은 집중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덥고 특히 더위를 더 많이 타는 저는 제 자리에 선풍기를 풀 가동하고도 그리 쾌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또 제 주변의 누군가는 "지금 여기 더운 거 맞죠?"라며 자기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분명 더운 거 맞았으니까요.

하지만 건물 운영 측이 냉방이 돌고 있다고 주장하며 우리들이 평생에 걸쳐 대형 오피스 빌딩에서 경험해 온 똑같은 냉방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그리 인상 깊게 대응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냉방 장치 제어 패널에는 분명 냉방을 최대로 가동하고 있었고 또 거기에 표시된 현재 기온은 분명 쾌적하고도 남을 숫자였거든요. 하지만 우리들은 분명 덥다고 느끼고 있었고 이 사실을 냉방 장치의 제어 패널로는 납득 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다 못해 온도계를 샀습니다.

다른 온도계에 비해 조금 더 비싼 이 물건은 와이파이 네트워크에 접속 되어 한 시간마다 이전 기온 기록과 비교해 0.5도 이상 차이가 발생할 때 온도를 서버에 기록합니다. 사실 개인적인 바램은 그냥 매 1시간마다 기록하면 더 좋겠지만 제조사는 아마도 배터리를 절약하기 위해 이런 동작을 하도록 만든 것 같습니다. 또 저는 이 동작을 수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여러 날에 걸쳐 더워 죽겠는 상황에 최대한 짜증을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집요하게 온도를 기록해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덥다는 주장을 데이터에 기반해 뒷받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데이터에 기반해 주장한 다음 채 48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드디어 실내 기온이 24도에 도달하며 쾌적한 상태에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이 상태를 만들기 위해 열흘 이상을 써야 했다는 점은 썩 유쾌하지 않지만 어쨌든 저는 원하는 것을 얻었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폭주하지 않고 느긋하게 행동하는 것은 유년기의 끝에 한 다짐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다만 느긋하게 행동하는 것과 광기에 차 행동하는 것은 서로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는 어느 아침입니다. 이 글을 타이핑하는 지금은 열대성 저기압이 몰고 온 거대한 비구름 덕분에 비가 잔뜩 내리는 길을 뚫고 출근했습니다. 많은 비에 피해 입지 않도록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시 2주 뒤에 뵙겠습니다. :)


추신: 지난 월요일(2024-08-19)에 올린 왜 우리의 서드파티 도구 도입은 실패할까?에 아주 쪽팔린 오타가 있었는데 독자님의 신고로 부끄러움이 더 오랫동안 박제 되는 더 더 부끄러운 상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블로그 전체에 무한한 오타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항상 새 글을 만들어내는데만 집중하며 제 스스로 오타를 찾는 행동을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혹여 오타를 발견하시면 간단히 글 아래로 스크롤 해 답글을 남겨 주시면 제 부끄러움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