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허들
여러 해 전 회사가 프로젝트를 드랍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전 1년 반에 걸쳐 개발한 게임은 형상관리도구 서버를 구동하는 기계의 스토리지 일부를 차지한 채 더 이상 동작할 일이 없는 바이너리 덩어리로 변해버렸습니다. 윈도우 기계에서 언리얼 에디터를 실행해 프로젝트를 연 다음 모바일 프리뷰 모드로 플레이 하면 큰 화면으로 플레이 할 수 있었고 또 빌드머신을 거쳐 받은 안드로이드 빌드를 모바일 기계에 옮기면 퍼블리셔의 소프트웨어에 연동되지 않은 채로 플레이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이 프로젝트 개발을 계속해도 더 이상 시장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리라 판단했고 개발팀 구성원 모두는 할 일을 잃어버립니다.
카지노 라이크 - 1.5년 정리에서 이 드랍 된 프로젝트로 옮기기 전 상태를 소개했습니다. 굳이 링크를 클릭해 다른 글을 읽는 수고를 줄이기 위해 여기 같은 이야기를 기억에 의존해 옮겨 보면 삼평동에 유명한 MMO 게임 개발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개발했고 또 앞으로 한동안 더 개발해야만 런칭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 장르를 마르고 닳도록 만들어 본 장인들이 개발하고 있었고 유명한 행사에 전시한 게임 플레이 영상을 편집한 트레일러는 사람들의 아주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직접 행사장에 가지는 않았지만 전설에 의하면 공개된 영상을 보고 매료된 사람들이 부스에 자신의 포트폴리오가 담긴 USB 스틱을 놓고 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처음 그 프로젝트에 합류하기로 결정되었을 때는 드디어 내 인생도 펴겠구나 싶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썩 잘 알려지지 않은 회사를 전전하며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곤 했는데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기 직전에는 냄새의 추억에서 소개한 튀긴 가난의 냄새 끝에 밀린 월급을 뒤로 하고 새 직장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회사에서 새로 공개한 굉장해 보이는 프로젝트에 합류했으니 모나지 않게 행동하고 또 열심히 일하면 저도 유명한 회사에서 런칭한 여느 MMO 게임에 영화 산업의 관습으로부터 비롯된 프롤로그에 주요 스탭 이름을 표시할 때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회사에서 새로운 MMO 게임을 런칭하는 일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회사의 검증 시스템은 프로젝트가 얼마나 잘 진행되고 있는지, 시장 상황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 또 이전에 출시할 때마다 거대한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이전 게임들과 비교해 어느 정도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지를 미리 평가하는 다양한 검증 절차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과정들은 잘 만들어진 빌드 뿐 아니라 이 빌드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자료와 발표 기술 역시 요구했습니다. 이런 절차는 400명짜리 팀으로 개발할 수 있을까에서 설명한 광기에 가득 찬 개인이나 그룹 없이는 회사가 늘어 놓은 허들에 걸려 버둥거리기를 반복하며 표류 하기 십상이었고 정신 없이 야근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우리들은 이미 한창 표류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표류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이 상태로는 결코 런칭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블랙홀 주변의 같은 궤도를 도는 두 천체가 블랙홀을 사이에 두고 정 반대 방향에 있을 때 둘 사이의 거리는 무한대로 측정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단기 목표에 따라 개발을 계속해 나갔지만 런칭과는 결코 가까워 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이언맨 1에서 어느 순간 잉센이 이 상태로는 남은 시간 안에 작업을 끝마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이 때는 뭘 잘 몰랐는데 특히 한 사람이 어떻게든 발버둥 쳐서 몇 발자국 더 나가다 보면 런칭에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고 이 때 시큰둥한 팀을 얼마 되지도 않는 권한으로 움직여 뭐든 만들어 내려고 했다가 이 때 함께 한 분들 중에는 지금도 저를 결코 좋게 평가하지 않는 분들을 만들고 맙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게임을 개발하고 런칭을 경험하기 위해 팀과 회사를 떠났는데 그로부터 다시 1년 반이 지난 다음 회사가 프로젝트 드랍을 결정해 다른 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이전에 떠난 그 프로젝트는 출시되지 않았고 여전히 출시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지만 프로젝트를 떠날 때 머지 않은 시간에 게임을 출시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출시 단계에 도달하기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임 업계의 고용 형태는 프로젝트 단위 계약직에 가깝습니다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들은 회사에 정직원으로 고용되어 있지만 실상은 프로젝트와 연결된 계약직에 가깝기 때문에 프로젝트가 드랍 되면 사실상 해고되어 다른 직장을 찾아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는 회사 안에 있는 다른 프로젝트에 자리가 있어 회사 안에서 면접을 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몇몇 팀과 접촉했는데 솔직히 그 팀들도 이번에 회사가 우리 프로젝트를 드랍 시킨 의사결정 과정으로 미루어 이들도 딱히 좋은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나름 업계의 네임드를 구입해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그 전까지는 업계의 네임드를 만나본 적도 없던 입장에서 나름 업계의 역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네임드와 함께 일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미리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 경험은 성공한 리더십을 구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남겼고 실패로 돌아갑니다. 여튼 어느 날 오전 퇴사가 확정된 다른 스탭님과 면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약간 급작스럽게 그 네임드님과 이야기 할 시간이 잡혀 회의실 대신 휴게 공간에서 테이블 하나를 마주하고 그 분, 그리고 게임디자인 리드님과 이야기 하게 됩니다.
그 때 그 네임드님은 제 이력서를 보고 딱 한 마디로 논평 했는데 이 말은 지금도 그 말씀을 하시는 순간의 분위기와 목소리를 재생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미 내 머리 속에서 수 없이 재생되어 바랠 대로 바랬을 텐데도요. “이건 불운한 이력서네요.” 사실입니다. 바로 직전 프로젝트는 드랍 됐고 그 전 프로젝트는 결코 출시되지 않는 것으로 이미 유명해졌으며 그 이전에는 가난의 냄새를 맡으며 밀린 임금 때문에 노동부에 진정을 넣은 다음 몇 달이 지난 다음에야 간신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두 프로젝트를 출시했지만 그 다음 한동안 출시 경력이 없었고 합류하는 프로젝트 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런칭 하지 못했습니다. 그 분은 이런 제 상황을 ‘불운’으로 요약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다음에도 한동안 불운을 끌고 다니며 실패 경험을 더 쌓은 끝에 몇 년 만에 간신히 런칭 단계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막상 런칭 해도 딱히 기분이 더 좋지는 않았습니다. 마감이 끝나면 다음 마감이 기다리고 있듯 런칭을 하면 그 다음은 라이브가 기다리고 있고 개발 단계보다 훨씬 더 강한 제약 속에서 게임이 맞닥뜨리는 온갖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고객의 말과 행동을 직접 마주하며 그에 따라 개발할 수 있는 점은 좋았지만 고객들이 게임을 먹어 치우는 속도에 맞춰 게임을 만들어 매 주 업데이트 하는 일상은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행복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객들 역시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게임을 먹어 치우며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른지도 모르겠습니다.
큰 회사의 큰 프로젝트, 작은 회사의 작은 프로젝트, 받지 못한 월급, 불운한 이력서, 뭐든 해 보려고 하던 발버둥 따위를 거치며 느낀 점은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은 결국 런칭하고 고객과 만날 때 이 업에 종사하는 개인에게 가장 큰 성장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큰 성장을 체험하는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으려면 계속해서 개발하고 계속해서 고민하고 계속해서 허들을 높여 가야 합니다. 절이 이상하면 중이 떠나야 합니다. 절을 떠난 중은 대신 런칭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에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더 높은 허들을 제시하는 더 경쟁력 있는 절을 찾아 가야 합니다.
처음 이런 소위 ‘불운한 이력서’를 마주할 때는 마치 저 자신의 이력서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분명 그리 길지 않은 이력 하나하나의 끄트머리를 장식한 결말은 그 짧은 문구 안에 고민과 실망과 좌절로 얼룩져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력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이전에 결코 출시되지 않을 그 프로젝트에서 이 상태로는 도저히 출시 단계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어떻게든 발버둥 쳐 출시에 조금이라도 다가 가려다가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면서 - 참고로 이 낙인은 10년 뒤에도 유효해 저에게 나쁜 평가를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 이 프로젝트를 감싼 어떤 조류는 결코 한 사람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력 모양은 그리 예쁘지 않았지만 함께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올린 이력서는 상급자에 의해 거절되었는데 그 상급자님과 이야기 하며 그 분의 채용에 대한 철학을 조금 들을 수 있었고 이제 이 생각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한동안 불운이 겹쳐 런칭 경험과는 거리가 먼 작은 회사와 짧은 이력, 그리고 나쁜 결말을 전전할 수는 있습니다. 이건 확실히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어떻게 보면 행운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런 이력이 계속해서 쌓이면 운도 결국 실력의 일부라고 해석해야 하는 시점이 옵니다.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은 결국 성공하는 경험과 방법을 체험한 사람들이 모여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통해 진행할 때 런칭을 통해 고객을 만나고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실패하는 경험을 반복했다면 긴 경력이라도 이 경력이 개발 과정의 여러 단계를 경험했다고 말하기 어려우며 어느 시점이 되면 연차가 늘어날 뿐 그에 따른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례를 만나면 ‘낮은 허들을 전전한 결과'라고 정의하기로 했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실패하는 회사, 실패하는 프로젝트에는 다양하기는 하지만 아주 다르지는 않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적은 운영 경험, 부족한 자금, 수준이 높지 않은 인력, 광기에 찬 개인 혹은 집단의 부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의사결정, 오직 자신 앞에 놓인 명시적인 업무에 집중하는 사람들, 이들을 채용한 상급자들, 팀에 프로파간다를 형성하지 못하는 엉성한 비전, 잦아지는 술자리, 길어지는 담배타임 등등이 생각납니다. 어떤 신호는 권한과 카리스마가 있는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기도 하지만 또 다른 신호들은 구조적인 원인 때문에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기도 합니다. 이 때 개인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만약 개인이 구조를 좌우할 수 없다면 그런 구조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 구조에 머물면 몸과 마음이 조금 덜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구조의 일원으로써 기능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이런 생각 끝에 개인적으로 불운한 이력이 너무 오래 반복되어 경력이 길어졌지만 썩 인상 깊지 않은 서류를 제출해 주신 분들께 그리 좋은 평가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들은 고객들께 우리의 일부를 갈아 넣은 이 바이너리 덩어리를 제시해 고객들에게 그들께 어떤 경험을 제공한 댓가로 월급을 받고 또 개인적인 발전을 해 나갑니다.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고 또 이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개인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면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의 주변 상태가 변하는데 개인의 잘못이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 안에 계속해서 남아 그들의 일부가 되는 것은 어쩌면 개인의 잘못일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결론.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은 결국 런칭 단계에 도달해 고객들을 만나 피드백 사이클을 경험할 때 여기 참여한 개개인들에게 가장 큰 성장을 하게 해 줍니다. 불운으로 한동안 실패를 반복해서 겪을 수 있는데 이를 개인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대로 있으면 결국 그들의 일부가 되며 길어진 경력에도 불구하고 경쟁력을 가지고 발전하지 못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실패의 반복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허들을 높여야 합니다. 절을 떠나 더 높은 허들을 제시하는 더 가능성 있는 절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여기부터는 그저 불운으로 여겨 경력에 어울리는 실력의 부재를 개인의 잘못으로 생각하지 않을 여지가 있습니다.
좀 무겁게 시작했지만 이번 주에도 다른 다섯 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요즘 드는 고민은 글이 너무 길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이전 빽빽한 글의 용도에서 영상 위주로 컨텐츠를 소비하는 현대에 빽빽한 글은 정보를 전달하기 보다는 뭔가 있어 보이는 장식적인 의미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의견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이전에 비해 쓸 데 없이 텍스트가 길어질 뿐 이게 과연 의미 있는 생각과 체험을 전달하기에 적당한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보내드리는 글의 분량은 어떤가요. 별 것 아닌 내용을 말하는데 너무 길게 느껴지거나 다른 글로 나눠야 할 것 같은 주제를 한 페이지에 몰아 넣느라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지 궁금합니다. ... 하지만 제 자신의 행동과 비슷하게 생각을 저에게 알려주시지 않으시리라는 사실을 예상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상처 받지 않고 계속 고민해 보고 또 실험해볼 작정입니다. :)
아직도 덥습니다. 더위에 조심하시고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