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들의 완벽한 의사소통

간판에 상호 대신 메뉴판처럼 제공하는 서비스와 가격을 크게 써 놓은 가게가 멋 없다고 생각했지만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게들의 완벽한 의사소통

다른 해 여름에는 도통 집에서 먼 곳에 가지 않습니다. 일단 여름은 성수기로 설정되어 모든 물가가 비쌌고 어딜 가도 사람들이 가득해 뭘 하든 기다려야 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사이에 치어야 해 피곤했고 도시에서도 너무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살았는데 좀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 멀리 나가도 똑같은 상황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묘하게 처음 본 은하수점진적 닭갈비 디자인에서 사람들이 사방으로 놀러 나가 모든 지방에 북적거리는 때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먼 곳까지 여러 번 갈 일이 있었습니다.

수도권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질 수록 기분 전환이 되는 느낌이 들었는데 수도권으로부터 약 200킬로미터쯤 떨어지고 나면 그제서야 일 생각도 좀 덜 들고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둘러보기 시작한 주변 풍경은 사실 도시와 별로 다르지 않은데 어딜 가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매장의 익숙한 간판이 눈에 띄고 그 동네 지명과는 전혀 상관 없는 아예 다른 지명으로 시작하는 상호가 눈에 띄며 어디나 똑같이 신호등이 있고 또 어디나 똑같이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굳이 똑같은 음식을 먹으러, 비슷한 풍경을 보러 굳이 수도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저 자동차 안에 앉아 흘러가는 바깥 풍경을 보기만 해도 재미있는 차이들을 발견할 수 있어 재미있습니다.

이건 자동차는 아니고 자전거로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느낀 점인데 자전거로 먼 거리를 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방 소도시, 그 소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큰 길 따위를 지나가게 됩니다. 수도권에서는 두 행정구역을 연결하는 여러 길과 여러 교통수단이 있지만 수도권을 조금만 벗어나면 두 행정구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경로는 중앙분리대가 있는 큰 도로 뿐입니다. 그래서 한 마을에서 다음 마을까지 자전거로 이동하려면 램프를 타고 중앙분리대가 있는 고속화도로에 올라가야만 합니다.

수도권의 고속화도로는 자동차 전용으로 설정되어 자전거가 들어갈 수 없지만 지방의 마을 사이를 연결하는 고속화도로는 자동차 전용이 아니어서 법적으로 자전거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자동차들은 자전거를 고려하지 않아 상당히 무서워서 웬만하면 피하고 싶지만 지방에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데 경로가 그것 뿐이라면 그 무서운 큰 도로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전거 뿐 아니라 유아차에 의지해 걸으시는 나이 드신 분들 역시 이런 고속화도로에 들어와 걸어 이동하곤 합니다.

지방 소도시를 지나다 보면 마을에 유일한 공공시설이 우체국에 집중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체국과 파출소가 한 곳에 묶여 있고 종종 그 바로 옆집은 그 일대에서 유일한 택배 사업소일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마을 규모가 아주 조금 더 크다면 농협과 농협 하나로마트가 붙어있기도 하지만 이쯤 되면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큰 소도시 정도 규모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마을 큰 도로에서 나와 건물이 시작되는 마을 어귀에 접어들어 몇 분을 달려도 마을 안에는 열린 가게도 없고 또 지나다니는 사람도 안 보이는 적막한 분위기가 계속되다가 마을을 빠져나갈 무렵 나타난 우체국 앞에 거의 유일한 사람을 마주치게 됩니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풍경과 간판을 보는데 남쪽으로 이동하면 산이 점점 사라지고 넓은 평야가 나타나는가 하면 동쪽으로 이동하면 눈을 흑백으로 바꾸고 눈 앞의 고속도로를 지우면 넓게 펼쳐진 산수화가 다른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편 그렇게 수도권으로부터 멀어져 지방 도시에 들어가면 간판을 읽어보곤 하는데 물론 그런 간판은 수도권에도 있지만 지난번에 수도권 동쪽으로 이동했다가 잠깐 사이에 비슷한 느낌이 드는 간판 수 십 개와 마주친 다음 왜 이런 간판이 이렇게 많이 눈에 띌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간판에는 주로 상호가 큼직하게 적혀 있을 겁니다. 상호를 보면 대강 뭘 하는 곳인지 알 수 있는데 전통적으로 상호에 업종 이름이 포함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것 저것 파는 가게는 무슨무슨 ‘마트’, 고전적인 철물점은 무슨무슨 ‘철물’, 고기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는 무슨무슨 ‘정육’, 식당은 말 그대로 무슨 ‘식당’ 같은 식이어서 간판에 적힌 상호를 보고 뭘 하는 곳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간판에 상호보다는 메뉴판에 가까운 정보를 적는 곳이 있고 체감 상 수도권에서 멀어질 수록 이런 간판을 더 자주 만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앞에서 말한 식당은 식당 상호 대신 간판에 크게 ‘아침식사 됩니다'나 ‘한식뷔페 8000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런 가게에서 밥을 먹어도 가게 상호를 알 수가 없는데 신용카드를 내고 결제 메시지를 받은 다음에야 이 가게의 이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국립공원 근처에서는 ‘등산복 5만원 균일가’나 ‘아메리카노 1500원’ 같은 간판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또 도심지에 들어가면 ‘광어회 5만원부터’, ‘야간세차 2만원’ 같은 간판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간판을 처음 볼 때는 좀 멋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좀 더 그럴싸한 상호를 지을 수 있었을 테고 그 상호를 간판에 적어 놓는 편이 장기적으로 상호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도움이 될텐데 왜 상호 자리에 저런 메시지를 붙여 놨을지 알 수 없었고요. 일단 상호가 있고 이 가게에서 중요하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할 공간은 간판 아래쪽에도 많을 것 같은데 왜 굳이 상호 자리에 저렇게 해 놨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정보기술에 강하게 의존하지 않는 뜨내기 손님들이 원하는 정보는 가게 상호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정보기술에 강하게 의존하는 손님들은 현대에 가게가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나 대중교통으로부터 접근하기 쉽지 않은 위치에 있어도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습니다. 또 그 가게가 뭐 하는 곳이고 어떤 메뉴가 있는지 미리 파악할 수 있고 심지어 지금 가게 안에 있는 사람이 찍어 올린 최신 사진을 보고 상황을 미리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정보기술의 도움을 받는 손님들을 상대하는 가게들은 간판에 제대로 상호를 표시하고 그 상호와 상호를 표현하는 간판에도 신경을 쓰는 것 같아 보입니다. 또 가게가 직관적으로 뭘 하는 곳인지 인식되지 않는 종류의 상호라도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반면 정보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손님들에게 직관적으로 뭘 하는 곳인지, 어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인지 알 수 없다면 기피할 수 있습니다. 가령 밤새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다가 새벽녘이 가까워 올 때 뭐라도 먹기 위해 열심히 찾는 곳은 주로 국밥집인데 지방에서 새벽에 문을 여는 식당 대부분이 국밥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국밥집 이름이 국밥을 파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새마을 식당’ 같은 이름이라면 사전정보 없이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밤새 자전거를 탄 다음 뭐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는 간판이고 뭐고 일단 불 켜진 가게가 보이면 일단 멈춰 살펴보게 되기는 하지만 기왕이면 불 켜진 가게 간판에 무슨 ‘국밥’이라고 적혀 있다면 좀 더 마음 편히 자전거를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이 상황에서 자전거를 타던 우리들은 사전정보가 없었고 목적이 확실했으며 최대한 빨리 목적을 달성하기를 원했고 훌륭한 경험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의 퀄리티와 이를 대변하는 가격, 그리고 음식이 너무 늦게 나오지 않는 국밥집에 대한 적당한 상식을 만족하기만 하면 가게 이름이 뭐라도 상관 없었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위에서 멋 없다고 생각한 ‘아침 됩니다’ 같은 간판을 만나면 어떻게 판단하게 될까요. 아마 아직 해 뜨기 직전이라 주변이 어둑어둑한 상황에서 다음 대안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배고픈 몸을 이끌고 자전거를 계속 타고 이동하기 보다는 확실한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 저 간판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한 끼 식사를 하는 편이 더 좋은 결정일 겁니다.

지난번 수도권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마주친 간판들 역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완벽한 의사소통을 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오늘 등산 직전에 바막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늦게서야 알게 됐다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등산복 균일가’ 같은 간판을 보자마자 빨려 들어가듯 가게에 달려갈 겁니다. 또 회사 주변에 그럴듯한 카페 상호보다는 ‘아메리카노 1500원’이라고 적힌 간판이 지나가던 사람들을 더 잘 붙잡을 수 있으며 서기 2023년 가을 현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해양 수산물을 먹고 싶어 사전 정보 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광어회 5만원부터’라고 적힌 간판 역시 이들을 사정 없이 빨아들일 테고요.

이런 생각 끝에 처음에는 별로 멋 없는 간판이라고 생각했던 이런 간판들을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는 간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상호를 기억하고 가끔 방문하고 정보기술에 의존한 사람들이 찾아와 매출을 올려 주고 사진을 찍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올리는 행동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애초에 이런 사람들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굳이 직관적이지 않은 상호를 간판에 걸어 의미 없는 역할을 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목표가 정보기술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이 지나가다가 목표를 쉽게 발견하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음을 빠르게 판단한 다음 의사결정 할 수 있도록 직관적이지 않은 상호 대신 ‘완벽한 의사소통’을 시도해 목표로 한 손님들을 빨아들이는데 확실한 역할을 하게 해야 합니다.

결론. 수도권에서 멀어질 수록 가게 상호 대신 가게에서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종류와 가격을 엄청나게 직관적으로 표기한 가게를 점점 더 많이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가게들이 멋 없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간판은 사전 정보 없이 간판을 훑으며 목적을 달성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