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부터 함부로 초과근무 하면 안돼요

새 마일스톤이 시작될 때 기획팀은 다양한 압력을 받습니다만 함부로 압력에 응하면 프로젝트 전체의 성공 가능성을 낮추게 됩니다.

기획부터 함부로 초과근무 하면 안돼요

새 마일스톤이 시작된 지 어느새 한 달이 지났습니다. 여러 높은 분들은 새 마일스톤을 시작하자 마자 프로젝트 구성원 모두가 이번 마일스톤의 목표를 깊이 이해하고 전력 질주 하기를 원하는 것 같아 보일 때가 많지만 항상 반드시 무조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단 지난 마일스톤 목표를 급하게 달성하기 위해 실제 미래에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지점과는 아무 관계 없는 의사결정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미래의 시간을 끌어다 쓴 코드, 미래에 사용했어야 할 자금과 에셋을 미리 끌어다 쓴 결과 이를 수습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 따위를 준비하기 위해 마일스톤을 시작하자 마자 바로 개발을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훌륭한 팀들은 마일스톤이 끝나면 다음 마일스톤을 명시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어느 마일스톤에도 속하지 않는 기간을 두고 그 사이에 각자가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수행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간이 필요하다고 여러 번 주장해 봤지만 이를 인정하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 마일스톤 초반에는 새로운 계획에 따라 기획서를 준비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이렇게 기획팀으로부터 나가는 요구사항이 없는 틈을 타서 다른 부서들은 급하게 요구사항을 달성하느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싸 놓은 똥을 치우며 기획팀에서 쌀 그 다음 똥에 대비하곤 합니다. 하지만 근미래에 맞이할 마일스톤 마감 기간에 다시 똑같이 미래를 고려하지 않는 의사결정과 황급한 마무리를 반복할 것을 걱정해 마일스톤 시작할 때 기획서가 완성되어 있으면 좋겠어요 같은 요구사항 혹은 불만을 기획팀에 표출하기도 합니다.

한때는 이런 불만 표출을 받을 때 너무 죄송하고 미안하고 형편 없는 기획팀이어서 부끄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며 다음 마일스톤 기획서를 미리 쓰는 계획은 왜 항상 실패할까를 고민해 봤고 우리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는 마일스톤이 시작되자 마자 프로젝트 전체가 마일스톤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만들 방법은 없거나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럼 마감 테스트를 우리가 하면 안되죠’ 라든지 ‘그럼 그 컨텐츠 개발을 우리가 하면 안되죠’ 라든지 ‘그럼 우리가 운영을 하면 안되죠’ 처럼 기획팀의 일로 느껴지지 않지만 실제로는 기획팀이 수행하고 있는 온갖 실제 업무를 들먹이며 마일스톤 시작하기 전에 준비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뻔뻔하고 또 적극적으로 어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마일스톤 초반에는 유난히 기획팀에 시선이 모이는데 우리들이 마일스톤 목표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발생시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두운 면으로는 지난 마일스톤 마감 때 모두가 비슷한 초과근무를 하고 마일스톤 초반에 좀 느슨하게 정시퇴근 하며 근미래에 닥쳐 올 또 다른 초과근무에 대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분위기 속에서 기획팀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이를 한 목소리로 걱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지난 마감 때 조립과 테스트와 운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꽤 소진된 상태여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마일스톤 초반에는 노동법에 의해 정의된 정당한 노동시간을 준수하며 어질러진 모든 것들을 추스르고 싶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요구사항이 그만큼 늦어지고 요구사항이 늦어지면 다시 모두가 별로 겪고 싶지 않은 마일스톤 마감 때 난장판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곤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부서들은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리서치 작업이 실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으로 쉽게 인정 받곤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 상 기획은 유난히 리서치 작업을 실제 작업으로 잘 인정하지 않곤 합니다. 가령 리퍼런스 삼을 게임을 업무 시간에 플레이 하고 있으면 게임 회사에서조차 리서치가 아니라 노는 것으로 인식될 때가 많습니다. 이를 잘 설명해 보기도 하지만 게임은 업무시간이 아닐 때 하고 업무시간에는 업무를 수행하라는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기 쉬운데 이는 달리 말하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버타임을 하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런 결과로 기획팀은 종종 리서치가 부족한 상태로 일단 마일스톤 목표를 만족하는 요구사항을 문서로 만드는데 집중하지만 이렇게 작성된 문서는 리서치가 부족해 다양한 경험을 가진 다른 부서 스탭들로부터 쉽게 공격 받거나 쉽게 부정될 수 있습니다. 특히 리서치가 부족해 요구사항이 부정되기를 반복하면 기획팀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이후 개발에 아주 큰 고통을 겪을 수 있으며 스탭들의 사기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는 아주 저렴하고 쉬운 방법은 지난 마일스톤 마감에 이어 빈 기간 없이 바로 시작된 새 마일스톤 초반에 기획팀이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한 숨 돌리는 대신 바로 이어서 기획서를 작성하고 모두가 퇴근한 시간대에 리서치를 수행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실은 누구도 입으로 직접 이런 말을 하거나 지시를 내리지는 않지만 우리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별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 우리들을 이런 상태로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새로운 초과근무를 시작하면 결국 머리는 점점 더 안 돌아가고 일과시간에 집중력은 점점 낮아지며 정당한 문제 제기나 추가 설명 요구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거나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의 원인은 넓은 범위에 걸쳐 있지만 상황 자체의 문제 지적은 또 다시 우리들이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마일스톤 초기에 우리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먼저 명시적으로 마일스톤에 속하지 않는 기간이 없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지난 마일스톤과 이번 마일스톤 사이에 난장판을 정리할 기간은 필요합니다. 기획 입장에서는 지난 마일스톤에 실제로 일어난 일 중 문서로 남지 않은 여러 사건을 기록해야 합니다. 분명 처음 기획서에 작성한 요구사항과 실제로 개발된 결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이론 상 기획서는 개발 진행에 따라 업데이트 되어야 하지만 흔히 한 사람에게 한 마일스톤에 여러 가지 일을 한 번에 수행하게 하고 이들이 병렬로 진행되는 상황 상 한 번 작성된 기획서는 체계적으로 업데이트 되지 않으며 그때 그때 변경을 별도로 기록한 문서와 회의록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나마 나은 상황입니다.

이렇게 실제 결과와 큰 차이가 발생한 문서가 실제 상태를 따라잡을 유일한 기회가 마일스톤이 끝나고 명시적으로 다음 마일스톤 업무를 시작하기 직전에 찾아오는데 이 때 다음 마일스톤 기획서를 쓰기 시작하면 지난 마일스톤 업무 결과는 이를 수행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남아 서서히 희미해져 다음 사람들의 온보딩과 미래의 문제해결을 아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시간을 조금이라도 내서 파편화된 문서를 최소한 한데 모으기라도 하고 이들을 정리한 예쁜 문서를 작성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페이지에 나열된 링크를 차례대로 읽어 이들을 머릿속에서 조합하면 그나마 최신 상황에 가까운 정보를 얻을 수라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서로 이어지는 두 마일스톤 사이에 명시적인 시간 공백이 없다면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면 다른 부서들에게 ‘이번 마일스톤 작업을 안 한다’든지 ‘노는 것 같다'고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기획팀은 마일스톤 초반에 지난 마일스톤 정보 정리, 이번 마일스톤 목표 파악, 그에 해당하는 리서치 수행, 이번 마일스톤 요구사항 정의 같은 업무를 마일스톤 초반의 짧은 기간 안에 거의 동시에 모두 해 내야 하는 이상한 상황에 처하도록 압력을 받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런 압력에 굴복해 소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겠다며 지난 마일스톤이 강렬한 초과근무에 의해 마무리된 직후 이번 마일스톤 시작부터 초과근무를 통해 이런 압력을 돌파하도록 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다음 몇 달 개발하고 은퇴할 작정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요.

마일스톤 사이에 명시적인 정리 기간이 없다면 새로운 마일스톤 초반에는 다른 모두가 그렇듯 초과근무를 극도로 제한하고 스탭들의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줘야 합니다. 여기에는 사람들마다 다른 시간이 필요하며 어떤 사람들은 회복이 빠르지 않아 긴 기간에 걸쳐 생산성이 낮아진 채로 남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원인은 지난 마일스톤 마감 때 일어난 초과근무가 원인으로 이 사람을 쓰고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이런 상태를 존중하고 계획에 고려해야 합니다.

마일스톤 초반에 다른 사람들의 압력을 받아 함부로 초과근무를 한다 하더라도 이 때 일어난 초과근무는 절대로 인정 받지 못합니다. 마일스톤을 시작하고 나서 기획서를 받는 것은 팀 바깥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들이 리서치에 시간을 쓰고 내부에서 리뷰를 하고 의사결정을 한 결과를 문서 모양으로 내놓는데 걸린 시간은 보통 업무 시간으로 잘 인정 받지 못합니다. 문서는 팀 밖에 나간 시점부터 각자가 가진 마일스톤 목표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과 요구 수준과 서로 다른 경험에 기반해 난도질 될 예정이며 이를 따라 잡으려면 기획서 작성으로 퉁 칠 수 있는 새로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피드백을 받아 바닥부터 문서를 다시 쓸 때 사용하는 시간 역시 잘 인정받지 못하며 쉽게 ‘기획서가 늦게 나와 전체 작업이 늦어졌다’는 핑계가 쉽게 받아들여지는 세계에서 초반에 첫 기획서를 빨리 내기 위한 초과근무는 피드백을 받아 들여지는 시점에 낭비한 시간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이런 상황과 뿌리 깊은 인식을 쉽게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기획팀 관점에서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은 협업 부서의 압력에 굴복해 마일스톤 시작부터 지난주에 이어지는 초과근무를 함부로 실행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스탭들의 몸과 마음을 추스를 기회를 없애 전반적인 생산성 저하를 가져와 길게 볼 때 프로젝트의 실패 가능성을 올립니다. 물론 2-3년마다 한번 씩 거의 모든 스탭들을 배터리 갈아 끼우듯 바꿔 주는 프로젝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인사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 곳에서만 가능할 뿐 어지간한 회사는 그런 테크닉을 흉내낼 수 없습니다. 기획팀 역시 사람이라 마일스톤이 연속해서 붙어 있어도 이 사이 어딘가에는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고 또 업무로 잘 인식되지 않는 리서치와 토론, 지난 마일스톤 정보 정리 따위에 사용할 시간 역시 필요하며 이 시간은 쉽게 업무시간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초과근무를 실행해서는 안됩니다.

결론. 이상적인 형태는 지난 마일스톤과 새 마일스톤 사이에 명시적인 마일스톤에 해당하지 않는 기간이 있어 이 사이에 정보를 정리하고 급한 의사결정의 결과를 되돌리거나 미래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공유하고 급하게 마무리한 구현을 되돌리거나 유지하되 이번에는 좀 더 오래 가는 모양으로 변경하는 등의 업무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C레벨 패닉을 일으키는 분들이 운영하는 조직에서 이런 기간을 명시적으로 가지기는 어려우므로 다음 마일스톤 시작 후에 이 업무들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 때 새 마일스톤 업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시각에 의해 초과근무 압력을 받을 수 있는데 이에 굴복해 초과근무를 실행하면 장기간에 걸친 생산성 저하를 겪어 프로젝트 전체의 성공 가능성을 낮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