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하우스의 유령

힐 하우스의 유령

지난 추석 연휴 직전에 겨울서점 채널에서 추천 영상을 봤습니다. 결국 이 책들 모두 추석 연휴 동안에는 읽지 않았지만 이후에 파과힐 하우스의 유령을 읽었습니다. 파과는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제 입장에서는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는데 시각적인 설명에 빠른 전개를 기대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장면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나면 내 머릿속에 옮겨진 장면이 움직이며 사건으로 발전해 가기를 기대하지만 여러 부분에서 내 머릿속으로 옮겨진 장면을 두고 카메라가 등장인물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다른 시간대로 넘어가 버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시각적인 설명이 오히려 갑갑하게 느껴졌습니다. 맨 마지막 줄까지 이어지는 고구마를 견딜 체력이 있다면 추천합니다.

그건 그렇고 영상에 함께 등장한 힐 하우스의 유령은 이런 무서운 집 이야기의 원조 격이라는 말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어릴 때 TV에서 무서운 집 이야기를 다룬 더빙된 외화를 보고 그 무서운 집을 계속해서 상상하며 무섭고 흥미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무서운 집 이야기를 꼬박꼬박 챙겨본 것은 아니지만 가끔 극장에 혼자 가서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 놓고 뭐가 나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만든 다음 영화를 보곤 합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같은 영화는 맨 마지막 장면에 ‘헉!’ 하고 눈을 꾹 감아버렸습니다. 하지만 원조 격의 소설이 나오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보다 더 강력한 장치가 고안됐을 테고 이미 저는 그런 장치를 체험한 미래의 사람이니 이야기가 좀 밋밋하더라도 이를 이해할 수 있을 준비를 했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결정적인 이야기를 직접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책을 읽으실 계획이 있으시면 읽지 않으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이야기가 넬리 관점에서 진행되기는 하지만 유난히 넬리의 생각과 넬리의 개인사를 많이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힐 하우스에 가기 전까지 자동차를 사용하기 위해 동거인들과 다투고 길에서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이미 넬리의 여러 습관을 떠올린 끝에 가만히 앉아 주변을 바라보는 넬리의 행동과 생각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왼쪽으로 누워 자는 넬리의 습관에 대해 들었을 때 그러다가는 저녁 먹은 것이 잘 소화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 피식 거리기도 했습니다.

넬리의 생각과 감정에 마음을 맡기고 편안하게 책을 따라 흘러가다 보면 이 이야기가 분명 무서운 집에 대한 이야기이고 또 꽤 무서운 일이 조금씩 일어나지만 점점 더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넬리로 대변되는 책을 읽어 가는 나 자신은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가는 길을 잃고 헤매거나 오싹한 한기가 끊임 없이 세어 나오는 모퉁이를 지나거나 아무도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는 육아실 안을 들여다보는 경험들이 처음에 비해 점점 편안해졌습니다. 반면 그에 따라 주변 사람들은 점점 더 서로를 불신하고 주변을 경계해 가는데 이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분위기를 무서운 영화를 볼 때 마음을 풀어 해친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이런 무서운 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던 넬리가 비로소 힐 하우스에 속해 가고 이로부터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절정을 지나 결말에 이를 때 힐 하우스를 떠나는 넬리의 마지막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힐 하우스의 나머지 방문객들이 넬리의 행동을 알아차릴 때와 비슷한 시점에 저 자신도 그 행동을 알아차렸고 놀랄 준비를 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마지막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힐 하우스가 넬리에게 이야기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준 힌트를 넬리는 이미 이해하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는데 저는 이를 완전히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넬리의 감정을 따라가며 넬리가 힐 하우스에 어떻게 속해 가는지, 그에 따라 넬리가 얼마나 편안해지고 또 비로소 자신을 찾아 가게 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인데 이를 영상으로 잘 표현할 수 있었을지 걱정입니다. 그저 무서운 장면을 나열해 흔한 무서운 집 이야기로 끝나게 될 것 같은 걱정이 들었습니다. 여튼 긴 여운이 남는 재미있고 무서운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