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코 똥 참기 게임
최근에 F1 레이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본능의 질주를 감명 깊게 봤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첫 시즌이 이제 또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게임 규칙이나 자동차, 서킷 소개 이전에 이 게임을 플레이 하고 있는 여러 팀과 각 팀에 소속된 선수들, 스탭들, 그리고 팀의 의사결정자들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의 인간적인 측면을 보여주는데서 시작한 것 같은데 세계에서 오직 스무 명이 참여할 수 있는 게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선수들 각각이 받는 압박과 이로 인한 여러 가지 고민을 따라가며 아직 F1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기 참여하는 여러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에 공감했던 기억입니다.
F1이라는 경기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다큐멘터리 첫 시즌을 보고 나서도 시간이 한참 지나서 였는데 다큐멘터리는 처음과 달리 시즌을 거듭할 수록 촬영을 허가하는 팀이 늘어나 게임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됐고 게임 전체에 어떤 팀들이 있고 어떤 주요 등장인물들이 있으며 어떤 조직들이 영향을 끼치고 또 어떤 이벤트들이 있는지 파악해 감에 따라 경기 자체에 관심이 서서히 생겼습니다. 2023년 초여름 현재 다큐멘터리는 작년인 2022년 그랑프리를 다룬 시즌 5까지 공개되었고 지금은 내년에 시즌 6으로 공개될 가능성이 높은 2023년 시즌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경기 자체를 챙겨서 보진 않았고 경기 일정이 지나고 한국 시간으로 다음 날 즈음에 게으르게 유튜브로 하이라이트 영상을 찾아봤는데 다큐멘터리를 통해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팀, 거의 모든 선수, 팀 라디오를 통해 대화하는 사람들, 카메라에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관계자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알아볼 수 있게 되면서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정도로도 꽤 재미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한국 시간과 완전히 어긋난 시간에 진행되는 그랑프리는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퀄리파잉 세션과 메인 레이싱 이벤트는 한국 시간과 맞으면 실시간으로,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결과를 알고 있는 상태로라도 경기 전체를 웬만하면 챙겨 보게 됐습니다. 아직 까지는 결과를 모른 채 실시간으로 게임을 볼 정도의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미래에는 어떻게 될 지 모를 일입니다.
유튜브에서 F1 뿐만 아니라 다른 레이싱 이벤트 영상을 살펴보며 여러 레이싱 이벤트 중 취향에 가까운 이벤트와 그렇지 않은 이벤트를 조금씩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F1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게임에 참여하는 선수들 개개인과 이들의 팀, 스탭들, 감독들의 게임 자체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여러 측면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된 상태에서 게임을 보니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인 취향에 아주 잘 맞는 게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령 지난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맥라렌 팀의 랜도 노리스가 오랜만에 퀄리파잉에서 좋은 성적을 가둬 앞쪽에서 출발하길래 정말 오랜만에 맥라렌 팀이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기대했지만 메인 레이스가 시작되자마자 앞 차와 접촉해 프론트윙이 손상됐고 바로 피트인 해 프론트윙을 교체하면서 첫 랩이 끝나기도 전에 순식간에 최하위로 떨어집니다.
단 한 순간의 실수가 같은 그랑프리 안에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결과로 돌아온다는 점이 취향과 어긋났는데 특히 차량 사이에 작은 접촉이 아주 큰 결과로 돌아온다는 점을 모두가 알기 때문에 접촉을 최대한 피하려는 움직임이 게임 전체를 소극적으로 만들어 재미있는 장면이 잘 나오지 않게 만드는 원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더 취향에 가까운 레이싱 이벤트는 랠리나 미국 스타일의 경기인데 사실 미국 스타일의 경기는 나쁘지 않지만 좀 너무 많이 간 것 같고 랠리는 주행 자체에도 드라이버 두 명이 협업해야 하고 또 작은 실수 정도는 같은 주행 안에서 만회할 여지가 있으며 섬세하면서도 동시에 투박한 주행이 일어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기서 투박한 부분을 강조하면 미국 스타일의 레이싱이 되고 섬세한 부분을 최대한 강조하면 맨섬 TT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지난 5월 말에 열린 F1 모나코 그랑프리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다큐멘터리 상에서 여러 팀과 선수들이 기대하는 중요한 이벤트라고 합니다. 도심지 서킷으로 동아시아에 사는 외국인 관점에서 경기 배경으로 이국적인 모나코 도심을 배경으로 볼 수 있고 또 요트가 즐비한 풍경을 보는 것도 나름 흥미롭긴 합니다. 하지만 게임 자체를 생각해 보면 과거에는 자동차 좌우 폭이 더 좁았기 때문에 이 서킷에서의 게임이 의미가 있었을 것 같은데 현대에는 자동차 좌우 폭이 훨씬 넓어 안전한 추월이 어려워 메인 레이싱 자체는 퀄리파잉 결과에 따라 미리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퀄리파잉 결과만으로 메인 레이싱 결과를 예상하는 것이 올바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사실상 퀄리파잉 결과가 그대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메인 레이싱 이벤트를 뭐하러 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차라리 일요일날 경기 하지 말고 그냥 다 같이 모나코 관광이나 하며 하루 쉬는 편이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모나코 그랑프리를 보며 받은 느낌을 투박한 언어로 표현하면 ‘모나코 똥 참기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수들 스무 명이 화장실 앞에서 똥을 참다가 못 참고 먼저 화장실로 달려가면 최하위로 떨어지고 끝까지 똥을 안 싸고 버티면 승리하는 게임처럼 보였습니다. 세부 규칙으로는 똥을 참다가 못 참으면 자유롭게 화장실에 갈 수 있지만 똥을 조금 지리는 정도는 똥을 쌌다고 판정하지 않아 승리할 수 있고 만약 화장실에 안 갔는데 똥을 싸버리면 그대로 게임에서 지는 겁니다.
어차피 좁아 터진 서킷 특성 상 추월은 거의 불가능하니 누군가 벽을 들이받아 사고를 내 레드플래그를 발동 시키거나 날씨가 나빠져 비가 내려 예상과 계획을 망가뜨리지 않는 이상은 이변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고 그저 시작할 때 장착한 수명이 짧은 타이어를 가지고 얼마나 오랫동안 주행 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결정되기 때문에 같은 타이어를 사용해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가도록 버티는 모습은 그 속성이 똥 참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종종 이런 모나코에서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우승자가 뒤바뀌는 이벤트의 여러 측면을 다뤄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경기 바깥의 여러 측면을 함께 고려하지 않고 레이싱 이벤트 자체에 집중한다면 모나코 서킷은 그리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어내는 환경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니 다들 모나코 서킷의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있고 이를 개선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심을 관통하는 서킷 특성 상 길을 넓힐 수는 없겠지만 코스를 바꿔 추월을 시도해볼 만한 시점을 더 늘릴 계획을 검토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당장 내년에 어떻게 될 지는 정해지지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F1에 관심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분명 되게 지루하고 재미 없어 보이는 게임인데 다큐멘터리 상에서는 모든 팀과 사람들이 기대하고 또 이곳의 우승자에게 큰 명예를 부여하는 모습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또 게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모나코 그랑프리는 게임이 처한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규칙을 약간 비하하는 의미를 담아 똥 오래 참기 경쟁과 비슷한 그리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게임 뒤에 드러나지 않은 또 어떤 이야기를 엮어 이 게임을 돋보이게 만들어 줄 지 모르겠지만 내년에는 메인 이벤트 자체 만으로도 게임이 돋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근데 중간에 인용한 'Drive To Survive: Guenther Steiner misheard in the paddock' 영상은 다큐멘터리 시즌 5에 나왔는데 자세히 보니 이 영상을 올린 계정이 하스 공식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