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왜 그렇게 길게 써?

블로그에 글을 즐겨 쓰지만 그렇게 쓰는 글과 실제 일하며 쓰는 글 사이에는 목적과 방법, 결과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글을 왜 그렇게 길게 써?

저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분과 커피를 마시다가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진아. 너는 왜 블로그에 글을 쓸 때 정리된 모양으로 쓰지 않고 그렇게 긴 글을 써?” 제 직업은 게임디자이너이고 이는 근본적으로 문서를 작성하는 업무입니다. 회사에서는 필요한 모든 내용을 포함하되 중복되지 않도록 하고 읽는 사람이 빠르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된 모양으로 문서를 작성하곤 합니다. 종종 작성된 지 30년이 지나 보안 연한이 끝난 기밀 문서가 공개되는 모습을 보면 줄글 모양으로 작성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현대에 작성되는 문서도 비슷한 형식이라고 합니다. 비디오 게임 업계를 창조한 전설들이 오래 전에 작성한 문서들 역시 플레이시나리오를 줄글 모양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우리들이 현대에 작성하곤 하는 기획서 모양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우리들이 회사에서 작성하는 기획서는 그런 줄글 모양보다는 주제를 나타내는 제목과 주제를 설명하는 블릿포인트의 나열로 구성됩니다. 이런 문서 형태가 어디서 왔을지 생각해봤는데 제가 본 문서 중 이런 형식과 가장 가까운 것은 공무원님들이 작성하는 보고서였습니다. 크기가 더 큰 글꼴로 제목을 적고 그 아래에 듬성듬성 블릿포인트와 짧은 글이 반복되는 형태였는데 이런 문서에 밀도를 조금 올리면 우리들이 작성하는 기획서나 보고서 모양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 한국의 여러 문화가 일제시대를 거치며 일본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혹시 이런 보고서 스타일이 일본으로부터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일본의 비디오 게임 초창기 시대에 작성되었던 기획서를 살펴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아 우리가 작성하는 문서 스타일 대부분은 한국의 공무원 사회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블릿포인트로 구성된 문서는 핵심 단어, 숫자 따위를 빠르게 파악하기는 좋지만 플레이 시나리오나 이 문서가 설명하는 기능을 구현해 달성하려는 목표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문서는 그저 핵심 목표를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 간결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적용 시나리오나 큰 그림에서 이 기능이 차지하는 역할, 목적 따위를 전달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서에 이런 내용을 전부 포함하면 문서가 길어지고 또 현대에 아무도 읽고 싶어하지 않는 줄글 모양의 문서가 되기 때문에 문서는 계속해서 블릿포인트의 나열 모양으로 작성하되 문서를 브리핑 하면서 원래 줄글로 작성했어야 할 플레이시나리오를 구술을 통해 전달하는 자리를 가집니다. 그래서 기획서만 전달할 때 진행되지 않던 개발이 브리핑을 거쳐 줄글 모양으로 표현할 내용을 구술을 통해 전달하면 그때서야 협업 부서들이 이 문서의 스토리를 이해하고 개발을 시작합니다. 즉 업무에 의해 작성하는 기획서에는 줄글을 통해 설명해야 하는 내용이 분명히 있지만 이를 직접 문서에 포함하면 여러 문제가 생겨 이를 생략하고 브리핑을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회사에서는 제목과 블릿포인트 나열 모양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회사 밖에서 글을 작성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작년(2023년)에 처음 혹시 거기 계시면 제게 알려주세요를 통해 뉴스레터를 처음 시작하기 이전에도 업무 이외에 작성하는 글은 블릿포인트 모양으로 작성하는 대신 줄글 모양으로 작성했고 이런 글은 핵심을 빠르게 파악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지만 상황과 맥락을 설명한 다음 이에 기반해 제 생각을 따라갈 수 있도록 마치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 같은 형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은 일단 줄글 모양으로 표현되고 문장은 상대에게 제 생각을 설명하는 형식을 사용하는데 이렇다 보니 종종 분량이 길어지고 한 문단 길이가 길어져 큰 모니터로 볼 때도 압박스러운 모양이 되곤 합니다. 그나마 큰 모니터로 볼 때는 긴 문단에 맞서 읽어볼 생각이라도 들었지만 모바일 환경에서는 아무리 스크롤 해도 끝나지 않는 문단은 읽을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저를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로부터 블로그와 뉴스레터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때 글이 너무 길어 읽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저 역시 깊이 공감합니다. 저 자신 역시 다른 블로그 글을 읽을 때 이 식으로 긴 글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면 이를 별로 읽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정작 제 직업은 블릿포인트로 구성된 짧은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어서 제 직업을 알고 있고 저와 비슷한 일을 하며 제 일을 예상할 수 있는 분들 입장에서는 분명히 빠르고 쉽게 핵심을 이해할 수 있는 모양의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이 이런 읽기도 힘들고 읽을 의지를 가지기도 힘들며 보기에도 너절한 글을 마구 써 대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저는 현대에 가장 활발하게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분들보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나 현대 인터넷의 변화를 조금 더 관찰할 수 있었는데 텍스트 위주로 구성된 인터넷 시대에서 이미지와 영상 위주로 구성된 시대로 변해 왔으며 현대에는 텍스트보다는 영상, 그리고 구술 위주로 구성된 컨텐츠가 훨씬 더 널리 유통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회사에서 기획서를 블릿포인트 모양으로 작성한 다음 줄글 모양으로 표현했어야 할 내용을 별도로 설명하기 위한 브리핑 회의를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브리핑 회의는 근미래에 블릿포인트 모양으로 작성한 기획서와 여기 포함되지 않은 줄글을 구술 형태로 전달하는 기획서 브리핑 영상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브리핑을 실시간으로 진행하며 채팅으로 질문을 받아 답하고 이 실황을 팀에 배포하면 현대 인터넷에 더 익숙한 분들과 더 잘 일할 수 있을른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직업적으로 업무용 문서를 작성할 때는 블릿포인트를 통해 정리된 모양으로 작성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의 정신적 특징 때문에 한 가지 생각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의 멱살에 설명한 생각을 함과 동시에 이를 글씨로 옮기거나 타이핑을 해 텍스트로 남겨 놓는 방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이제는 이런 개인적인 대응을 넘어 적극적인 대응을 통해 이전에 비해 한 가지 생각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게 됐지만 과거에 타이핑을 통해 생각을 하던 습관을 없앨 필요는 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머릿속에 생각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좀 더 시각적인 형태로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런 분들은 삼차원 상의 물체를 머리 속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회전하거나 변형한 결과를 쉽게 생각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 저는 시각적인 생각에는 그리 강하지 않은 편인데 대신 생각이 언어가 연속된 모양으로 나타나 이를 그대로 타이핑하면 설명하는 줄글 모양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에 나타난 생각 자체를 거의 덤프하다시피 타이핑 해 놓으면 일단 중간에 방해를 받아 생각하는 상태가 깨지더라도 나중에 다시 돌아와 그때까지 작성한 글을 읽으며 이전에 하던 생각 상태로 돌아가 이전 생각을 계속할 수 있어 방해에 취약한 상태를 크게 개선할 수 있습니다. 또 생각을 하며 줄글 모양으로 기록해 놓은 덕분에 지금 이 생각을 통한 어떤 결정을 한 다음 이 결정을 한 이유, 이 결정에 도달한 생각의 과정을 잊은 채 오직 결정사항만을 가진 미래의 제가 결정의 이유를 몰라 곤란해질 때 과거의 제가 생각하며 남긴 텍스트를 찾아내 생각의 과정, 결정의 이유를 미래의 저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업무에 의해 문서를 작성한다 하더라도 완성된 문서는 블릿포인트 모양이지만 이 문서에 도달하기 위해 생각을 할 때는 여전히 줄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직업에 의해 블릿포인트 모양으로 된 핵심을 빨리 파악할 수 있는 문서를 작성하기는 하지만 오직 이 때를 제외한 나머지 거의 모든 상황에는 줄글 모양의 문서를 만들고 있습니다. 블로그와 뉴스레터 역시 회사 업무에 의해 작성하고 있지 않으므로 굳이 블릿포인트 모양으로 작성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을 위해 줄글 모양으로 글을 작성할 때 언어 위주의 생각을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모양으로 하면 이를 덤프하다시피 타이핑 해 만든 문장 역시 설명문에 가까운 모양이 됩니다. 한동안은 생각을 계속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릴 때 여느 공개된 글 대부분이 그렇듯 높임말을 생략한 모양으로 작성했는데 이런 문장을 만들어내는 생각을 하다 보니 생각이 여느 소설에서 주인공의 독백 같은 모양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런 독백 같은 문장은 미래의 제가 다시 읽을 때 이 글을 쓴 과거의 저 자신에게 이입하기 어려운 느낌을 받도록 만들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독백 역시 주인공의 행동을 지금까지 따라오며 이입한 상태일 때 독백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지만 만약 주인공에 이입하지 못했거나 이입할 수 없었다면 독백으로 된 문장을 읽을 수는 있겠지만 이를 납득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문장이 조금 더 길어지더라도 머릿속에서 언어 모양으로 한 생각에 존칭을 사용해 설명하는 모양으로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릿속 생각은 타이핑 하는 것보다 조금 더 빨리 동작했는데 이를 따라가기 위해 2벌식 키보드를 사용해 타이핑 하는 것 치고는 상당히 빠르게 타이핑 하게 됐고 또 2벌식 범위 안에서 손을 최대한 덜 움직일 수 있는 키보드를 사용해 생각하는 속도와 손이 움직이는 속도를 비슷하게 맞췄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며 만들어진 글은 누군가에게 제 생각을 설명하는 모양으로 작성되었고 이 문장에는 존칭을 포함하고 있어 이 생각을 완전히 잊은 미래의 제가 글을 다시 읽더라도 과거의 제가 마치 그 시점의 자기 자신,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인 미래의 저에게 그 때의 생각을 설명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글쓴이에 공감하지 않고서는 글을 읽어도 이를 납득하고 또 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좀 더 어려웠다면 글이 존칭을 포함한 설명문 모양이 되자 미래의 제가 글의 내용에 납득하고 이어서 생각하기 훨씬 편해졌습니다. 블릿포인트 모양으로 된 짧은 글은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핵심을 빠르게 전달하고 여기 포함되지 못한 줄글에 해당하는 내용을 브리핑을 통해 구술로 전달했다면 블로그와 뉴스레터에 공유하는 긴 글은 기본적으로 제 생각을 그대로 타이핑하며 생각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에 기반하며 이 기억을 잊은 미래의 제가 다시 이 글을 읽을 때 글쓴이의 설명을 통해 훨씬 쉽게 글에 공감하고 글의 생각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글을 블릿포인트 모양으로 정리하는 대신 설명문 모양을 그대로 놔 뒀습니다.

일할 때와 달리 긴 글을 쓰는 이유로 돌아가면 처음부터 긴 글을 쓸 의도로 쓰기 보다는 생각을 미래의 저 자신을 주 독자로 가정한 설명문 모양으로 작성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은 생각의 과정과 결과를 기록해 이 기억을 완전히 잊은 미래의 저 자신에게 정보를 전달하는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저는 생각을 하며 글을 쓰는 현재의 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는 미래의 저 자신 뿐 아니라 제 구술을 통한 설명이 없는 상태로 글을 접하게 될 불특정 다수 역시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래의 저 자신, 그리고 불특정 다수에게 브리핑을 통한 구술 전달 없이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가 생각을 이어간 결과를 가감 없이 노출하기 때문에 긴 텍스트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업무와 달리 긴 글을 작성해 읽는 분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