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업계 출신의 커리어 고민

리세션 국면을 맞은 지금 새로운 업계에 남아 있어야 할 지 아니면 전통적인 업계에 있어야 할 지 고민입니다.

전통적인 업계 출신의 커리어 고민

돌이켜보면 게임 만드는 일 말고 다른 일을 할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마지막 아르바이트의 유산에서 소개한 웹 백엔드를 개발하는 일을 할 뻔 했습니다. 지방에 있는 학교 출신으로 큰 회사에 지원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 지 전혀 감이 없었습니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가끔 취미로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던 웹 스크립트 작성하는 일이었는데 나름 이 일을 할 신입을 구인하는 곳들이 있었고 대안이 없으면 이렇게 첫 회사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첫 회사를 게임 만드는 곳으로 선택하면서 지금까지 같은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요.

한번은 한참 회사에 다니던 도중 그때 블로그를 만드는데 사용하던 도구에 글을 PDF로 익스포트 하는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실은 당시에 유명하던 어느 블로그 서비스에서 글을 PDF 모양으로 만들어 인쇄해 책으로 만들어 주는 이벤트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쌓은 글이 그런 예쁜 모양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데 깊이 감명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때부터 이미 다른 서비스 대신 직접 운영할 수 있는 설치형 서비스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상황이어서 다른 설치형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 PDF 출력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제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 범위 안에서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는지 알아봤는데 이미 누군가가 PDF 파일을 만들 수 있는 구현체를 만들어 공개해 놨고 원하는 레이아웃을 PDF에서 사용하는 인쇄 쪽에서 주로 통용되는 것 같은 문법으로 바꿔 주는 도구 역시 누군가 만들어 공개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이리 저리 짜 맞추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한 끝에 적어도 제가 설치한 블로그 환경에서는 봐줄 만한 PDF 결과물을 뽑는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환경에서 잘 동작할지 자신이 없었지만 사용한 라이브러리가 모두 블로그 본체와 같은 스크립트를 사용해 구현되어 의존성이 거의 없어 어지간하면 동작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배포 후에는 이전에 겪어본 적 없는 문제들이 일어났지만 다행히 자잘한 예외처리 수준의 문제였고 개인적인 요구사항을 추가하면서 나름 페이지 크기, 마진을 설정하고 또 페이지 번호를 포함할지 말지, 목차를 포함할지 말지, 미리 만들어 놓은 레이아웃 중 하나를 선택하는 기능 등을 추가해 그럭저럭 서비스형 블로그에서 제공하던 PDF 익스포트 기능과 비슷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이 즈음에 설치형 블로그는 사용자가 많아져 누군가 이를 개인이 개발하는 대신 회사 단위로 개발할 생각을 한 것 같고 당시에 회사에 참여할 사람들을 찾아 다니던 분이 계셨는데 어쩌다 이 분과 식사를 하게 됐는데 설치형 블로그 도구를 개발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들었고 순진하게도 지금은 게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이 일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나중에 이 회사는 다른 굉장히 큰 회사에 인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간이 좀 흐른 다음 이제 대략 주임에서 대리 사이 쯤 됐을 때 여전히 낮은 연봉으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먼저 다른 업계로 떠나신 이전에 함께 일했던 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쪽은 주로 유럽 지역에 서비스하는 소셜 카지노를 개발하는 곳이었는데 산수를 잘 하는 사람, 그리고 시스템을 잘 설계하는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저는 산수를 잘 못했지만 시스템을 그럭저럭 설계할 수 있는 주니어였고 조건 중 하나를 충족했으며 이전에 함께 일했던 분이 제가 일하는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업계는 전통적인 게임 업계와는 완전히 다른 고객을 대상으로 완전히 다른 제품을 개발하는 대신 매출이 아주 높아 직원들에게 높은 보상을 하고 있으며 매년 제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업계의 총 본산쯤 되는 미국의 어느 도시에 출장을 가서 여러 게임을 체험해 보기도 한다는 모양입니다. 이 때 낮은 연봉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상당히 솔깃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다시 이 업계로 돌아오기는 어려울 거라는 점에 고민하다가 다시 순진하게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겠다며 제안을 거절했고 지금까지도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또 한번은 블로그에 글을 잔뜩 써 둔 덕분에 이를 읽어 보신 분으로부터 교육 관련된 일을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뉴스레터 소개에 밝힌 대로 이 글들은 생각의 멱살에 소개한 대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성된 글을 별다른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대강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읽어낼 수 있는 수준으로 정리한 다음 공개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인터넷 세계에 이런 생각을 이런 주제로 만들어 글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드문 것은 사실이었고 이런 주제를 다듬으면 교육용 자료로 만들거나 글을 쓴 사람이 직접 교육을 담당할 가능성 역시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업계에서 교육 쪽으로 커리어를 바꾼 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업계에서 아주 끝장을 본 전설들이 그 명성에 기반해 교육 쪽으로 옮긴 경우, 다른 하나는 업계에서 경쟁에 밀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되어 교육 쪽으로 옮긴 경우입니다. 저는 업계에서 아무 것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자에 해당했는데 언젠가 게임을 다시 만들려면 그런 시선으로 바라 보이는 행동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순진하게 업계에서 아직 이룬 것이 전혀 없으니 좀 더 업계에서 경력을 쌓겠다며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가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으신 분들의 신입 이력서를 받을 때 만약 그때 다른 결정을 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보곤 합니다.

이런 일을 겪으며 세월이 흐르는 사이 세계가 바뀌어 블록체인이라는 개념이 널리 알려지고 가상화폐가 시장에서 의미를 가지게 됐으며 초기에 이 업계에 진입한 분들이 큰 경제적 성과를 거두고 있을 무렵 저 역시 전통적인 게임 업계가 저 새로운 영역을 받아들인 제품을 개발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는 게임에 받아들여야 할 기술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어쩌면 남들이 이룩한 놀라운 경제적 성과를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몰랐고 또 인게임 경제를 블록체인을 통해 외부에 연동하거나 NFT를 통해 다른 게임과 상호운용성을 가진다는 개념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이런 개발을 하는 곳들을 찾아봤는데 구인 공고 상으로는 그럴싸해 보였지만 이리 저리 연락해 내부 사정을 들어 보니 다들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구인 공고만 보고 자리를 옮겼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개발을 한다고 알려진 회사에 아는 분이 조인하신 것을 봤고 당장 연락해 상황을 파악해 보니 앞서 주변에 있던 전통적인 개발사들이 구인 공고를 걸었지만 내부 상황이 상당히 좋지 않았던데 비해 이쪽은 꽤 괜찮아 보였습니다. 이번에도 전통적인 업계에서 일하다가 이렇게 상당히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나중에 이력서에 이 일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좀 걱정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에 변화가 일어날 때 그 중심에 서서 변화를 이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변화가 일어나는 곳 근처에라도 서 있지 않으면 업계로부터 쉽게 도태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가령 PC 게임을 개발하다가 어느 순간 모바일 개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즉시 실행했는데 만약 그 때 모바일 개발로 옮기지 않았다면 오랜 기간에 걸쳐 고통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물론 PC 개발에 남아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끝에 최근의 PC 개발 열풍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앞서 순진하게 여러 기회를 거절하는 대신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개발을 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2022년 직업생활 회고에서 한 적 있습니다. 자리를 옮기며 이전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주제를 고민해야만 했는데 대표적으로 이전에는 인게임 순환과 경제시스템을 설계하면 됐지만 이번에는 인게임 경제시스템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먼저 토크노믹스라는 전혀 다른 관점의 경제시스템을 고안할 것을 요구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니 인게임 경제시스템이 갖춰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외부 경제와 연동을 설계할지, 또 왜 이런 요구가 처음부터 발생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아무런 인게임 상의 근거도 없이 외부 연동을 고안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업계는 이전처럼 게임에서 시작해 바깥으로 확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먼저 블록체인과 토큰에서 시작해 게임으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개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요구사항을 수행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NFT블록체인에 대해 이 일을 시작하기 전보다는 조금 더 이해하게 됐고 어떤 특징은 상당히 과장되었고 또 어떤 점들은 그 난이도를 과소평가 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또 이 업계에 관심을 가지는 고객들이 전통적인 게임의 고객과는 제품을 바라보는 관점이 상당히 다르며 제품에 요구하는 것 역시 다를 뿐 아니라 제품에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방식 역시 이전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적어도 제 스스로는 과장된 특징에 기반한 요구사항에 확실히 선을 긋고 우리들에게 더 익숙한 방법인 일단 제품인 게임 자체의 기반을 다진 다음 외부로 확장해 가는 방식으로 개발하기로 합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런 접근이 블록체인에 경제시스템이 연동되어 있다 하더라도 결국 ‘게임’을 개발하는 관점에서는 크게 틀리지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한편 이런 제 행동을 바라보는 주변에서는 감사하게도 제 행동을 걱정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일단 전통적인 업계로부터 심하게 과장된 키워드에 기반한 업계로 옮기는 행동이 장기적으로 커리어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는 의견을 주신 분도 계셨고 대한민국 법률 상 합법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요소들을 지적하며 제품의 일부 기능이 위험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또 당시에 함께 일하던 분들 중에는 이 때 우리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영향으로 제가 잘못된 의사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 분도 계셨는데 후에 이 분과 이야기하다가 “저는 그때 ‘아 우진님 이제 맛 갔나보다’ 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런 애정 어린 걱정과 의견을 들으며 이 일을 하는 세월 동안 뭔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완전 헛발질만 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미소 짓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지금 이러고 있어도 괜찮은지 고민하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코비드 국면을 지나며 실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며 게임 업계는 높은 목표를 달성했고 동시에 시장에 풀린 유동성은 지금 일하고 있는 이 업계를 하늘 높이 밀어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감염자가 널려 있음에도 코비드 국면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고 선언되자 시중에 풀린 유동성을 흡수하는 정책이 실행되며 강한 리세션 국면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사람들을 다시 밖으로 내보내 이전에 비해 게임에 투자하는 시간을 줄일 뿐 아니라 모든 면에 걸쳐 시중에 풀린 유동성을 흡수해 필요할 때 돈이 잘 돌지 않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돈이 좀 더 위험을 감수할 만한 상황이었다면 이제는 같은 돈이 이전 만큼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업계 뿐 아니라 지금 일하는 업계 양쪽 모두 이전처럼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돈에 기반해 제품을 개발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전통적인 업계는 이런 리세션 국면 뿐 아니라 국내를 타겟으로 한 전통적인 개발을 반복하면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중이었고 리세션이 시작되자 이전보다 더 가파른 내리막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게임 업계 중 상당수는 이전에 구축한 포트폴리오에 기반해 여전히 성장 국면에 있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돈 대신 스스로 이 국면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경기 상황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있으며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돈의 움직임에 영향을 훨씬 덜 받으며 제품을 개발해 나가고 있고 이런 행동은 리세션 구간을 지난 다음 돈의 움직임에 영향을 덜 받은 좀 더 멀쩡한 제품을 내 놓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리세션 국면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돈으로부터 나온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다 보면 고객 관점의 제품 대신 투자자 관점의 제품을 완성해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경제적 성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공황이 10여년에 걸쳐 계속되며 전 세계 경제에 뚜렷한 상처를 남긴 것처럼 이번 리세션 역시 업계를 포함한 경제 전체에 뚜렷한 흔적을 남길 것은 분명한데 이 상황에서 고민은 이 리세션 구간을 어떤 상태로 통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하는 업계에서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 돈에 기반해 제품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의한 결정은 대부분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올바르며 이 사실이 틀린 적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경제상황이 바뀌고 고객들의 요구사항이 이전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 때 우리들의 제품이 그런 새로운 요구사항을 만족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혹은 리세션 구간 동안 제품을 개발하더라도 이 제품이 리세션 종료 시점까지 살아 남아 있을지 역시 의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기존의 포트폴리오에 기반해 리세션 구간에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이 구간을 돌파하는 전통적인 개발사에 소속되어 이 구간을 지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리세션 종료 시점에 돌아올 완전히 달라진 고객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걱정스럽지만 적어도 리세션 종료 이전에 제품을 출시한다면 현 시대 기준 고객들의 요구사항에 맞춘 제품을 만들어 나쁘지 않은 수준의 경제적 성과를 달성할 수는 있을 겁니다. 대신 완전히 다른 고객들의 요구가 이전 시대처럼 충분한 유동성과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는 모양으로 나타난다면 이 선택은 미래의 기회를 완전히 포기하는 결과로 돌아올 겁니다.

인생은 싱글플레이 게임처럼 저장했다가 불러올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한편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처럼 과금할 수 있지만 가난한 입장에서 과금을 선택할 여지 또한 저에게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리세션 구간은 지난 대공황에 못지 않은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이후 커리어를 어떻게 유지해 나가야 할 지 고민입니다. 사실 한참 일하면 이런 고민을 덜 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할 수록 고민은 깊어지고 고민이 깊어질 수록 실행 가능한 결론에 다다르기는 더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