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뭐 만드는지 아는 기획자가 있어요?
스스로 뭘 만드는지 자조적으로 모른다고 말해 왔지만 그러면 안 되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해 큰 실패를 겪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이전에 함께 일한 적 있는 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이 분과 함께 일하며 사실 몸은 좀 힘들었고 정신적으로도 썩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개발 경험 자체는 도전적이었고 또 흥미로웠으며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잘 표현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이전의 자신과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음의 자신은 여러 모로 꽤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지난 저희 신입 시스템디자이너 채용합니다와 작은 회사와 신입 사이 관계에서 우리 같은 작은 듣보가 시장에서 적당한 인력을 채용할 수 있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어쨌든 이 게임을 계속해서 개발해 나갈 거고 개발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지금 소속된 우리들 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분야에 걸쳐 채용을 진행하고 있지만 아예 콜드 컨텍으로 시작한 채용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아는 분들을 정말 영혼까지 끌어 모은 덕분에 이직 의사가 있는 분들은 전부 다 연락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은 회사가 가진 위험성, 평판이 좋지 않은 키워드 등의 원인으로 인해 채용까지 간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락을 받았으니 버선발이 문제가 아니고 화장실에 앉아있다가라도 뛰어 나갈 판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해 보니 최근 인생의 진로에 대해 생각해 보고 계신 것 같았는데 그저 정신 없이 눈 앞에 일어난 일을 해결하며 살아온 입장에서 그런 고민을 들으니 큰 사람은 이래서 크구나 싶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내가 이래서 이 정도 수준에 머무르고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저 게임을 포함한 엔터테인먼트 업계 뿐 아니라 그 주변을 둘러싼 다른 산업과 이들을 떠받치는 여러 또 다른 산업들에 걸친 고민의 넓이는 이전 까지는 그저 게임 좀 하고 개발을 진행하기 위해 스탭들을 설득하고 또 고객들이 우리에게 과금을 하실 생각을 하도록 설득하는데 집중하던 입장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한편 저는 우리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 앞으로 만들어 나갈 제품에 대해서 제가 이해한 대로 설명했는데 그런 질문과 대답 중에는 지금 왜 이 곳을 골랐느냐는 것도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 이 직장과 프로젝트를 선택한 이유는 첫 홀더 테스트를 마쳤습니다 (1)의 앞부분에 설명한 우리들이 계속해서 엔터테인먼트를 개발한다고 할 때 이를 어떤 고객을 대상으로 개발해 어떤 고객에게 판매해야 할 지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전통의 업계는 삼평동 668번지에서 개발한 비즈니스 모델을 다양한 방법으로 복제했고 2014년 도탑전기를 시작으로 수집형 장르로 거의 끝을 봤으며 이 과정에서 큰 경제적 성공을 거뒀지만 동시에 고객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고객들에게 팔 제품을 만들 수 있을지 스스로를 납득 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 즈음에 한참 게임에 외부 경제시스템을 연동해 효과를 보려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여기에 아주 빨리 대응한 몇몇 회사들 역시 초반에 큰 경제적 성공을 거뒀지만 단순히 게임에 외부 경제시스템을 연동하고 외부 경제시스템에 호환되는 재화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알아서 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물론 초반에는 제품보다 연동 자체에 집중해 경제적 성과를 달성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제품 자체로 초점이 서서히 옮겨 가고 엔터테인먼트로써 큰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 체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됩니다.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점에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던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여러 사고가 일어났고 또 감염병 국면이 마무리되는 가운데 여러 나라가 출구 전략을 실행해 시장에서 유동성이 사라져 더 이상 이해하기도 어렵고 사용하기도 복잡하며 실상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게임에 외부 경제시스템을 연동한 사례는 거의 자취를 감춥니다.
한편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사이에 앞선 고민에 따라 회사를 옮겼는데 처음엔 비슷한 시점에 이런 온갖 사건이 일어나 망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여태까지 시장에서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플레이어들이 실은 딱히 제품을 만들 수 있지도 않았고 또 시장을 깊이 이해하고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가령 NFT를 구입하면 그 돈으로 제품을 만들겠다는 여러 시도는 제품 개발에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잘 모르는 개발자와 고객들이 얽혀 처참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수준의 제품을 만드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는 우리들은 생각보다 잘 하고 있다에서 대략 설명했는데 NFT 좀 팔아서는 비용을 충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들은 여전히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경쟁력이 있었는데 일단 시장을 잘 이해한 분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NFT를 팔아 개발 비용을 충당할 필요가 없었으며 우리들 스스로가 평생 이 시장에서 제품을 만들어 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뭔가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먼저 이전까지 개발에 참여하며 느낀 염증 중 하나는 회사가 더 이상 기술적으로 모험 하기를 완전히 거부하는 현상으로 인해 현대적인 개발 환경을 학습하고 구축하며 이를 기반으로 생산성을 개선할 기회가 완전히 차단된 것이었습니다. MMO 게임을 만드는 팀 상당수는 이전 프로젝트에서 이미 구축한 서버에 기반해 개발했고 클라이언트는 계속해서 현대적인 최신 엔진으로 바뀌었지만 서버는 실행 위치가 온프레미스에서 클라우드로 변경되었을 뿐 이전 시대에 서버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제약과 현대적이지 않은 개발 환경에 기반해 개발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언리얼 엔진 최신 버전에 기반해 개발하면서도 막상 조립할 때는 오류를 찾기도 어렵고 실시간으로 결과를 볼 수도 없으며 디버깅 환경이라곤 오직 로그만 제공하는 답답한 환경에서 개발하고 또 오래 전에 구축한 서버용 데이터를 별도로 내보내 적용하는 상황이 딱히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은 조립을 담당할 기획팀만 수 십 명을 넘기는 큰 팀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빌드 하나를 만드는 과정은 대단하긴 하지만 그리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모두가 사실 올바른 도구만 가지고 있다면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결함도 이 커다란 팀 전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정된 기술과 오래된 인프라에 호환되는 개발 환경 덕분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비용을 투입해야만 했습니다. 성공할지 아닐지 전혀 장담할 수 없었지만 모험을 감행해 더 적은 인원이 개발하고 인원이 적기 때문에 어떻게든 비용을 줄여야 하며 비용을 줄이기 위해 미들웨어 제작사가 주장하는 현대적인 개발 환경을 적극적으로 학습하고 적극적으로 도입, 활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은 시도해볼 만 하다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게임에 연동된 외부 경제 시스템은 이전까지는 터부시 되어 온 시도였지만 고객들이 게임에 투입한 시간이 약관에 의해 오롯이 제작사의 자산으로 남아 고객 입장에서는 자산으로 인식되는 데이터가 개발사 입장에서는 법률에 따라 사전에 공지하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현실이 썩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보여주듯 서로 다른 게임으로부터 외부화 된 데이터가 예쁘게 호환되어 동작하는 세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런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서로 다른 세계에 투입한 시간의 결과로 인해 발생한 데이터는 그 세계를 떠나서는 원래 역할과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렵겠지만 데이터가 외부화 되면서 다른 세계에서 다른 역할과 다른 모습을 부여 받아 고객이 이전에 다른 세계에 투입한 시간의 결과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개발을 완수해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는 버즈워드로 자주 사용되지만 실제로는 평판이 좋지 않은 이른바 상호운용성에 기반한 메타버스가 거의 처음으로 실제로 동작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 이전에 받은 질문은 ‘지금 뭐 만드냐’는 질문이었는데 이 질문은 기획자들 사이에 일종의 밈 같은 질문입니다. 우리들은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가고 경영진에게 우리들을 당장 해고하지 않아야 하는 50가지 이유를 만들어 항상 그들을 설득해야 하며 갑자기 오피스에 나타난 스폰서에게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예쁜 말로 포장해 아름답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품을 개발하는 우리들의 시야에서 요구사항은 마지막 순간에 가서 C레벨 패닉에 의해 항상 바뀌고 여기는 네덜란드 선적 KONO호입니다에서 이야기한 것 처럼 이유를 모른 체로 일단 배 밖으로 내려가 이름을 지우기 시작해야 하며 우리들이 소위 ‘기획자’들이기 때문에 팀으로부터 끊임 없이 이 새로운 요구사항에 대응해야 하는 이유와 제 스스로도 아직 납득하지 못한 이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실시간으로 머릿속에서 그럴싸한 스토리를 지어내 말하고 제 스스로가 결국 그 스토리를 믿어 버리는 상황에 이르곤 합니다.
모두가 이런 상황을 늘 겪고 산 나머지 우리들이 모여 맥주라도 마시며 이야기할 때 ‘뭐 만들어?’라는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으로는 이런 상황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겠지만 입으로는 반사적으로 ‘몰라요’라고 말합니다. 뭘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것은 우리들이 겪는 온갖 만만하지 않은 상황을 짧은 대답으로 설명하고 대화를 마무리한 다음 술이나 마시고 다른 이야기나 하자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화 스타일은 게임디자인 직군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잘 납득하지 못한 상태의 요구사항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팀의 자원을 사용해야만 하고 이 과정에서 우리들이 아무리 뱀의 혓바닥을 놀려 설득한다 하더라도 그 말 뒤의 공허함마저 숨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화는 썩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다른 경로로부터 이 대화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한 이유를 한 다리 건너 전해 듣게 됩니다. 이전에 나눈 그 대화에서 기획자들이 대대로 밈처럼 사용하는 바로 그 질문에 반사적으로 준비된 답변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그 말 한 마디를 잘못 해서 이전의 좋은 경험을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함께 할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생각해 한동안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이제 나이도 먹고 책임 있는 역할도 하고 있으니 언행에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아는 것을 안다고 대답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대답하는 자세는 지금까지 일하며 결국에 팀 전체의 힘을 빌어 제품을 완성하는데 장점으로 작용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못 하는 것을 못 한다고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을 받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한 다음 그때부터 배운 덕분에 아직 까지 월급 끊기지 않고 살아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 제가 했어야 할 올바른 답변은 아마도 지금 이 글을 타이핑하며 생각한 이전의 제 고민과 그로부터 나온 결론, 그 결론을 실행한 과정, 실행 이후 발생한 사건과 우리들의 대응, 그리고 그 뒤로 우직하게 이어지고 있는 우리들의 개발과 그 목표에 대해 마치 당장 다음 월요일에 우리들 모두를 해고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경영진에게 설명하는 고위 의사결정자들의 그것이어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상대를 마치 제 자신과 같은 개발팀 일선에서 실제 제품을 만드는 분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했고 저를 제외한 모든 상황은 저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고위 의사결정자에 가까운 행동을 하고 있었음을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늦게서야 깨달았습니다.
이번 기회는 처참하게 사라졌지만 근미래에 비슷한 상황을 맞이한다면 스스로는 매일 같이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일단 배 밖에 나가 배 이름을 지우기 시작하는 나날을 살고 있지만 상대를 동료라고 착각한 나머지 그 행동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대신 상대를 고위 의사결정자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설명한 이 생각의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야겠습니다. 아쉽고 스스로에게 실망스럽고 다른 한 편으로는 억울하면서도 제 스스로와 상대를 같은 높이에 놓고 생각한 제 생각의 얕음 때문에 시간이 지나 괴롭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괴로움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