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고 싶은 것이 생김

평생에 걸쳐 뚜렷한 기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뭔가 하나 생겼습니다.

마시고 싶은 것이 생김

뭔가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부끄럽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떤 측면에는 취향이 굉장히 강한 것 같지만 또 다른 측면에는 취향이 거의 없다 시피 합니다. 가령 소리와 음악에 대한 취향은 꽤 강한 편이어서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즈처럼 연결되는 소리가 서로 맥락 없이 이어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고 심지어는 견디기 어려워 합니다. 가령 지하철 건너편에 앉은 노 이어폰 빌런이 유튜브 쇼츠를 보고 있다면 이 소리를 들으며 서로 연결되는 맥락 없는 소리 때문에 상당히 고통스럽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신경 쓸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를 서로 구분해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같은 상황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영향을 받는 것을 보면 이는 어쩌면 신체적 특징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악 취향도 꽤 고집스러운 편인데 락과 메탈 사이의 어딘가에 속하는 음악을 밴드가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긴 합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기에는 이 장르 구분 역시 특정할 수 있는 좀 더 다양한 온갖 장르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냥 이렇게만 말하고 지나가면 그냥 흔해 빠진 메탈 좋아하는 사람으로 끝날 수 있고 또 그게 그리 틀린 것도 아닙니다. 아주 조금만 더 특정해 보면 소위 프로그래시브 메탈 장르를 더 좋아하고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볼 때 유럽 지역, 그 중에서도 좀 더 추운 북유럽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는 밴드들의 음악을 더 좋아합니다. 그 동네는 유아 시절부터 동요로 메탈을 듣는 동네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음악을 만날 때마다 목록에 추가해서 듣다가 문득 이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를 하나하나 검색하다 보니 미국에서 출발해 캐나다를 지나 대서양을 건너 서유럽을 지나 결국 북유럽의 반도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약간 자신의 음악 정체성을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음악 취향은 다른 사람들과 음악을 들을 때 저를 굉장히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누군가 제게 최신 케이팝 음악에 대해 질문하거나 제 폰에 있는 좋아하는 음악을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동한 다음 재생해 보라고 하면 이 요구를 수용해야 할 지 아니면 슬그머니 뒤로 빠져야 할 지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제 이 상황에는 절대 제 폰에 있는 음악을 재생하려고 하지 말고 음악 안 듣는다거나 지금은 클래식 밖에 없다며 슬그머니 뒤로 빠져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양하지만 좀 더 대중적인 음악 취향을 가진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Flower KingsGarden of Dreams 같은 음악을 재생하기 시작하면 첫 4분이 지나가는데 아직 도입부가 시작되지도 않아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다가 누군가 ‘이 노래는 언제 끝나?’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앞으로 55분 남았다고 대답했다가는 좋아하는 음악을 재생해 보라는 권유는 커녕 영원히 이 모임에 초대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The Flower Kings - Garden of Dreams

반면 마시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그리고 가고 싶은 곳에는 거의 취향이 없습니다. 항상 가장 곤혹스러운 질문은 뭘 먹고 싶냐거나 가고 싶은 곳 없느냐 같은 것들인데 질문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아무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분명 즐거운 경험이지만 그 맛이 특별해서 또 그곳에 같은 것을 먹으러 가자고 말할 만큼은 아닙니다. 먹어본 적 없는 것을 먹고 또 가본 적 없는 곳에 가 보는 일은 분명 신나고 즐거운 경험입니다. 지난 10년의 밤 뒤쪽에 아침 일찍 일어나 난데없이 강원도에 있는 은행나무를 보러 갔다가 재빨리 돌아와 멀쩡한 시간에 출근하는 경험은 약간 부담스러울락말락 했는데 안 가본 곳을 가본다는데 집중해 부담보다는 신난 감정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 곳에서 경험이 즐거웠기 때문에 다시 가 보고 싶을까 생각해보면 아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 즐거운 경험이지만 좋아하는 음식, 음료, 가고 싶은 곳은 딱히 없습니다.

한동안은 소주 중에 검정 바탕에 용이 그려진 ‘화요’나 맥주 중에는 주로 IPA 계열을 더 즐겨 마시기는 했는데 둘 다 그 맛을 느낄 때 신나고 재미있기는 했지만 가끔 생각나고 또 다시 찾아 다닐 만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술 냄새는 스트레스에 쩔어 있는 어느 날 아침 출근하는데 난데없이 코끝을 스칠 때가 있는데 그럼 그 날은 하루 종일 술 생각이 나서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를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퇴근 길에는 아침부터 쩔어 있던 스트레스 때문에 편의점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지나쳐 바로 집에 들어가 쓰러져 자기 바쁜 나머지 하루 종일 했던 술 생각이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술 한 잔 하고 싶은 기분 때문인지 어떤 술을 마시고 싶은 취향 때문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커피도 마찬가지인데 에스프레소가 널리 퍼지기 전 커피는 강렬한 입냄새를 만드는 단 맛이 나는 따뜻한 액체일 뿐이었고 에스프레소가 널리 퍼진 다음에는 이름을 기억하기도 어려운 세계 곳곳의 산지 이름 대신 대강 신 맛이 나는 커피와 진한 숭늉 맛이 나는 커피로 구분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한 쪽이 더 취향 이라기 보다는 신 맛 나는 커피를 더 잘 하는 가게가 있고 그 반대도 있다는 정도를 알게 된 정도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는 대충 커피에 물을 탄 따뜻한 아메리카노라면 그냥 아무 생각 않고 마셨는데 어느 날 ‘아니 이건 해도해도 너무 맛대가리 없는 거 아닌가?’ 싶어 함께 마시는 사람들 표정을 살펴보니 다들 표정으로 소리 없이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맛있는 커피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맛 없는 커피가 뭔지는 알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흐리멍텅하고 아무 취향 없이 살아가던 어느 날 구독하던 뉴스레터로부터 02 마심의 미학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마실 것에 대한 취향과 이를 구성하는 종류, 각각에 대한 감각을 따라가다가 문득 저 자신의 텅 빈 취향이 생각나서 정말 저는 좋아하는 마실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에 커피 이야기도 하고 술 이야기도 했지만 그냥 조금 더 좋아하는 정도일 뿐 그 맛을 찾아다니거나 비슷한 종류의 조금씩 다른 다양함을 원하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주문할 때 그게 있으면 주문하고 아니면 마는 수준입니다. 왜 이렇게 세상에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나 싶은 생각을 한 적이 있고 또 좋아하는 뭔가를 찾으려고 노력해본 적도 있지만 딱히 취미도 없고 딱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고 또 딱히 좋아하는 음료도 없으며 딱히 지구 상에 가 보고 싶은 곳도 없는 마당에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버킷 리스트에는 아무 것도 추가할 필요 없이 마지막 순간에 미련 없이 버킷을 걷어 차고 접속을 종료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2023년 올해 은하수를 보러 멀리 갔다가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또 우연히 같은 동네에 여러 번 갈 일이 있었는데 문득 동네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치 연말에 두어 주 쯤 휴가를 내고 제주에 아파트를 빌려 짱박혀 느즈막히 일어나 동네 사람처럼 어슬렁 거리며 동네 밥집에 가서 밥을 먹고 다시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하다가 갑자기 충동적으로 근처 관광지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다가 문득 동네에 조금 익숙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그런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평상시 생활은 그저 집과 회사를 반복해서 오갈 뿐 그 밖으로 생활권이 넓어지지는 않았는데 문득 집에서 멀리 떨어진 마음에 드는 동네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하면 가끔 이 동네에 올 핑계를 억지로 만들 수도 있고 생활권이 이런 식으로 조금 더 넓어지면 삶의 지평이 조금 더 넓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침 그 동네에 작은 완전관리되는 숙소 회원에 등록합니다.

그렇게 한 해 동안 몇 번이나 같은 동네에 가서 아무 것도 안하고 빈둥거렸는데 그러다가 문득 그 동네 카페에서 마음에 드는 커피 메뉴를 발견했습니다. 아무 기대 없이 주문해서 마셨는데 이런 스타일의 음료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뿐 아니라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뭔가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같은 메뉴를 스타벅스에 가서 주문해보니 메뉴 이름은 같았지만 에스프레소 위에 휘핑크림을 얹어 질감도 맛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실 크림과 커피의 조합 까지는 같았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맛은 서로 완전히 달라 이 메뉴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정확히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주문한 그 메뉴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생각 안하기, 생각만 하기 때도 그렇고 이제 이 동네에 가면 하루에 한 잔 정도는 항상 마시는 음료가 됩니다. 아니, 어느 날은 연속으로 두 잔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맛있는 커피를 구분하는 대신 맛 없는 커피를 구분하고 딱히 무슨 맛있는 술을 찾아다니지도 않으며 안 먹어본 것을 먹는 것은 신나고 또 맛있는 것을 먹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그런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지도 않으며 무슨 히키코모리 마냥 조용히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음악을 혼자 들을 뿐이지만 살다가 처음으로 그 음료를 마시러 집에서 몇 시간이나 이동해야 하는 동네 카페를 떠올릴 수 있게 되어 나름 처음 생각한 대로 ‘삶의 지평이 넓어지는’ 의미에서 흥미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살다가 처음으로 마시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