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는 악마가 만들지 않는다

평소에 키오스크를 사용하며 짜증나고 분노할 때마다 이걸 만드는 사람들을 악마적으로 상상하곤 했는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대체 왜죠?

키오스크는 악마가 만들지 않는다

어느새 키오스크에 많이 익숙해져서 오히려 키오스크가 없는 주문을 할 때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키오스크 앞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살펴보고 결정할 수 있지만 제가 주문하기만을 기다리며 저와 눈을 마주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 가장 간단한 주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력을 받곤 합니다. 전화주문 시대로 돌아가기는 아주 어렵다에서 소개한 상황과도 비슷한데 사람이 주문을 받는 메뉴판에서 메뉴 하나를 선택하면 그 다음에야 그 메뉴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하위 메뉴를 사람이 불러주는데 따라 파악하고 그 중에 결정해야 하는 상황과 비교해 키오스크를 통하면 처음부터 각 메뉴에 적용할 수 있는 하위 메뉴를 확인할 수 있어 주문 자체를 좀 더 자신 있는 상태로 할 수도 있습니다. 또 특이한 결제 수단이나 조작 방법이 모호한 포인트 적립 같은 걸 하는 것도 사람에게는 쉽지 않지만 키오스크에게는 마음 놓고 할 수 있어 좋습니다.

0:00
/0:59

출처: https://www.youtube.com/shorts/pBdlAOa9MRk

사람과 키오스크 중 선택할 수 있다면 키오스크를 선택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키오스크에 장점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키오스크를 사용하면 사용할 수록 과연 이걸 개발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제품이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같은 소프트웨어 개발업에 종사하는 사람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실에서 그림을 그려 주문 과정을 살펴볼 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별 것 아닌 인터페이스가 실제 상황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이를 사무실 안에서 눈치 채기는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같은 기계를 사무실 안에서 직접 사용해 본다 하더라도 실제 상황과 다르기 때문에 문제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왜 그 개발자는 던전에 누웠을까에서 소개한 모든 개발팀 구성원이 게임을 잘 하지는 못한다는 사실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초반에는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할 때 이 단계가 전체 주문 단계 중 어느 부분인지 잘 알 수 없어 답답했습니다. 답답한 것은 둘째 치고 지금 이전 단계로 돌아가 메뉴를 수정하거나 추가할 수 있는지, 또 지금 이 화면이 결제 전 마지막 화면이어서 슬슬 신용카드를 꺼내야 하는지 알기 어려웠고요. 어떤 주문 시스템은 주문 화면에서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더니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 메뉴 선택부터 다시 해야 했고 또 어떤 시스템은 메뉴에 옵션을 추가할 때 이 옵션이 어느 메뉴에 해당하는 것인지 주문 화면에 확실히 보여주지 않아 결제로 넘어가기 전에 메뉴 각각을 눌러 올바른 옵션이 입력 되었는지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또 다른 주문 시스템은 결제수단을 선택하라며 신용카드부터 시작해 거의 스무가지에 달하는 버튼을 보여주며 그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는데 버튼 색상과 아이콘의 시인성이 나빠 신용카드 버튼을 찾는데 거의 5초를 소모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주문 시스템은 조잡한 인터페이스도 인터페이스지만 항상 화면 오른쪽 아래에 윈도우 정품인증 메시지가 떠 있어 신경이 쓰였고 심지어 그 근처를 손가락으로 잘 누르면 윈도우 바탕화면으로 넘어갈 수 있기도 했고요.

이런 키오스크 시스템들은 하나 같이 엉망 진창이었고 쓸 때마다 종종 헤매야 했고 또 쓸 때마다 실수에 대비해야 했으며 피곤할 때는 가끔 도대체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시스템을 돈 받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답답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왜 이런 상태가 되는지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이 조잡한 인터페이스는 아마도 아주 낮은 임금을 받고 심지어 회사에 소속되지도 않아 이 작업을 거의 처음 해보는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눈으로 보기에만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납품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 디자인에 따라 개발하는 사람들 역시 별로 높지 않은 임금을 받으며 그저 시스템이 동작하게 만드는데까지만 하면 그 다음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고요.

이 시스템을 테스트 하는 사람 역시 제한된 공간 안에서 키오스크 기계를 조작하며 어쨌든 주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검증하면 될 뿐 그 과정이 얼마나 편리한지, 효율적인지, 사용자를 헛갈리게 하지는 않는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겁니다. 만약 이들 중 누군가가 이런데 관심을 가진다 하더라도 일정은 빠듯하고 누구에게 말해야 문제를 개선해야 할 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게임을 만들 때도 종종 일어나며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 이상 쉽게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조잡함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점차 늘어나는 악의에 기반한 디자인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가령 햄버거 가게에 있는 키오스크는 주문을 시작하면 바코드를 통한 로그인을 요구했는데 이 화면에서 로그인을 선택하지 않고 주문을 하면 주문 맨 마지막 단계에서 주문서를 출력하기 전에 또 한번 로그인을 반복해서 요구했습니다. 분명 맨 처음에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도 맨 뒤에 똑같이 다시 한 번 의사를 물으며 여기에 답하기 전에는 이미 결제가 끝났지만 주문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또 평소에 햄버거 단품을 주로 주문하는데 분명한 의도로 단품을 선택하면 바로 이어 세트 주문을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했고 ‘이런 메뉴는 어떠세요?’ 하고 지금 하는 주문과 아무 상관 없는 쓰레기 - 주문하지 않을 거니까 제 입장에서는 돈 내고 쓰레기를 사라는 제안 - 를 표시하기도 하는데 이 팝업을 닫으려면 레이블이 ‘취소’인 버튼을 눌러야만 했고요. 또 결제수단을 선택할 때는 결제수단 선택 화면을 띄운 다음 그 위에 다시 영수증을 출력할지 아니면 주문서만 출력할지 묻는 팝업을 띄우는데 이런 팝업을 띄울 거면 결제수단 선택 화면을 띄우기 전에 이 질문을 독립된 화면에서 해야 합니다.

여러 키오스크에서 이런 경험을 하며 점점 더 짜증이 나 어느 순간 키오스크를 만드는 것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머리에 뿔이 나 있거나 한 손에 삼지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코드를 타이핑하고 이들이 일하는 사무실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여러 지옥과 비슷한 모습이고 이들은 사용자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사용자들이 실수하게 하고 또 사용자들이 분노하고 짜증 낼 때마다 이를 바탕으로 KPI를 달성하는 지옥의 악마들이 개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윈도우 정품인증 메시지가 구석에 항상 떠 있는 키오스크를 조작하며 매일 기계를 재시작 할 때 운영체제를 초기화 하면 돈을 안 내고 윈도우를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돈을 아끼려는 꼼수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름 귀여운 꼼수는 아무리 사용해봐도 악의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다크 패턴과 마주하며 인간이, 제정신인 인간이 개발하는 물건이 이렇게 만들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도대체 이런 물건을 만드는 존재들은 어디에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혹시 가끔 싱크홀 밑에서 들려온다는 무서운 소리야말로 이들이 일하는 소리가 아닐까요? 혹시 소설 돌이킬 수 있는에 나오는 배경이야말로 키오스크 개발자들의 사투를 그린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의심은 키오스크를 사용함에 따라 점점 더 깊어져 갔는데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건물의 다른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실은 출근하는 길이라 지하철 출구에서 나올 때 음악을 멈추고 노이즈캔슬링만 켜져 있었는데 이들이 대화를 시작하자 짐짓 놀라 표 나지 않게 노이즈캔슬링 모드를 외부 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모드로 전환했습니다. 이들은 지금 개발 중인 수도권의 한 지역에 있는 가게에 납품할 전용 주문 시스템 개발 진척 상황에 대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키오스크인 것 같았습니다. 인터페이스는 다 붙였고 오늘 결제만 붙이면 테스트 들어갈 수 있다는 대화가 오가기도 하고 또 그들 중 한 명은 매장에 출장을 나가야 하는데 기기가 설치된 배선이 마음에 안 들어 이를 수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 저는 제가 탄 것이 회사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인지 아니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출근하다가 차에 치어 죽어 주마등을 거친 다음 지옥으로 가는 중인지 헛갈리기 시작헙니다. 이날 저는 회사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대신 인디애나존스 운명의 다이얼에 나오는 시간의 틈을 지나 지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탄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제 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곳에서는 렉터 박사가 파치 형사에게 선물한 유다와 같은 탐욕에 의한 또 다른 형벌을 받게 될 지도 몰랐고 어쩌면 배가 갈린 채 영원히 고통 받는 바로 그 유다를 만나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헤드폰을 낀 채 이들의 대화를 듣다가 어느 층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이들 모두가 내렸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엘리베이터 안에는 저 혼자 남았습니다. 5초 전까지 이 엘리베이터는 단테가 묘사한 지옥과도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들이 내리고 나자 평범한 어느 평일 오전의 강남 어딘가에 있는 오피스 빌딩의 평범한 엘리베이터 안일 뿐이었습니다. 이 때 처음으로 키오스크를 사용하며 짜증과 분노를 느낄 때마다 머릿속에 그리며 욕하던 가상의 키오스크 개발자들을 바로 옆에서 마주친 것이었습니다. 햄버거 가게에서 ‘이런 메뉴는 어떠세요?’ 라며 쓰레기를 사라고 요구하는 팝업을 닫기 위해 ‘취소’ 버튼을 터치하거나 맨 처음에 거절한 회원 등록과 로그인을 맨 마지막 단계에서 또 물어보는 경험을 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점점 더 악마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해 가던 키오스크 개발자들은 그저 회사 뒤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출근하거나 어제 저녁때 퇴근하며 들린 가게에서 수거한 키오스크 장비를 들고 출근하는 그냥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괴물도 악마도 아니었고 그냥 저와 비슷한 회사원일 뿐이었습니다. 그들도 저와 똑같이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각자의 삶이 있고 매월 같은 날에 가상화폐로 급여를 받고 나빠진 경기에 영향을 받고 또 대출을 갚아 나가는 그냥 사람들일 겁니다. 그들이 한 층에서 모두 내린 다음 한숨을 쉬며 헤드폰을 벗어 목에 걸고 제가 일할 사무실에 도착한 다음에 생각해봤습니다. 지금까지 키오스크를 사용할 때마다 점점 더 악마처럼 변해 가던 그 지옥 같은 기계를 만든 사람들이 그냥 보통 사람들일 뿐 아니라 그들의 대화에는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보통의 회사원이 먼 거리에 출장을 나가기 귀찮아 하며 ‘배선 정도는 직접 바꿔도 되는 거 아냐?’ 라고 투덜거리는 그냥 보통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이날 아침 이후 여전히 키오스크를 사용하며 여전히 사람을 직접 대할 때와 비교해 장점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토스가 가장 잘 하는 집요한 다크 패턴을 마주하며 강한 악의를 느끼고 또 여기에 분노하곤 하지만 이전처럼 덮어놓고 이걸 만든 누군가가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와 같은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왜 그 개발자는 던전에 누웠을까에서 소개한 개발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어 보이지만 영상을 보는 팬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운 그런 상황처럼 하루하루 마주하는 조잡할 뿐 아니라 악의적인 키오스크들 역시 이를 직접 만들고 설치하는 사람들 차원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좀 더 거대한 뭔가가 이런 기괴한 장치들을 만들고 있지 않을까 하고 좀 더 멀리서 바라보며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의외로 키오스크는 악마가 만들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참에 엘리베이터에서 언급한 주마등을 언급한 곡인 'In the Presence of Enemies, Pt. 1'을 듣고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