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차투입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미군을 한 줌의 군대들로 나눠 쳤고 그 한 줌들은 차례로 스러졌습니다. 자기 손으로 지은 비행장이 어떻게 일본을 무너뜨렸는지 또 이 결말을 피할 방법은 없었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축차투입

개인적으로 세계대전사를 살펴보고 혹시 어떻게 하면 결과를 반대로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하며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습니다. 역사에 전문성이 있지는 않지만 그동안 이리저리 생각해본 사례에서 결과를 어떻게 하면 반대로 만들 수 있었을지 또 반대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을지를 다루는 글을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1942년 8월 21일 새벽 과달카날 섬 일루강 하구의 좁은 모래톱을 떠올려 봅시다. 어둠 속에서 일본군 한 무리가 함성을 지르며 모래톱을 건너 미군의 진지로 돌격합니다. 불과 몇 분 전 일본군에 붙잡혀 대검에 여러 차례 찔리고도 묶인 줄을 입으로 끊고 탈출해 온 솔로몬 원주민 해안감시병 제이콥 부자가 폴락 부대에 임박한 공격을 알린 참이었습니다[^Jacob C. Vouza]. 30미터 앞에 깔린 철조망, 캐니스터 샷을 토하는 37mm 대전차포, M1917 브라우닝 중기관총이 그들을 정면에서 받아냈습니다. 한 시간이 채 안 돼 첫 번째 중대가 거의 사라졌고 살아 돌아온 장교가 철수를 건의했지만 이치키 기요나오 대좌는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돌격이 같은 모래톱과 같은 바닷가로 이어졌고 결과도 같았습니다. 날이 밝자 미군은 경전차를 야자수 숲으로 몰아넣어 대전차 무기 없는 일본군을 깔고 지나갔고 밴더그리프트 사단장은 전차가 지나간 자리가 '고기를 갈아놓은 것 같았다'고 적었습니다. 상륙한 약 900명 가운데 살아 동쪽으로 도주한 자는 백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Battle of the Tenaru]. 미군이 테나루 전투라 부르고 일본이 일루강 도하전이라 부르는 이 하룻밤의 참극은 그러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오늘의 생각을 관통하는 말은 축차투입입니다. 차례로 쏟아붓는다는 뜻이고 전력을 한 번에 모아 결정적으로 던지는 대신 이길 수 없을 만큼 작은 덩어리로 나누어 차례차례 들이미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들어간 덩어리는 다음 덩어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하나씩 소진됩니다. 과달카날에서 일본은 정확히 이 일을 반복했습니다. 이치키의 선발대 900명이 8월에 스러지고, 그의 후속 제대가 뒤따르고, 9월에는 약 6,000명의 가와구치 지대가, 10월에는 사단 규모가 같은 비행장을 향해 차례로 밀려들었다가 차례로 부서졌습니다. 한 줌씩 보낸 부대가 한 줌씩 사라진 6개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피의 끝에 놓여 있던 전리품이 다름 아닌 일본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있던 비행장이었다는 점이 과달카날이라는 이야기의 가장 깊은 역설입니다.

반년 동안 지지 않은 군대

이 모래톱까지 오는 길을 먼저 살펴봅시다. 1941년 12월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은 이후 반년 동안 거의 한 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필리핀과 말레이, 싱가포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차례로 무너졌고 서태평양의 해도 대부분을 몇 달 사이 일본이 차지했습니다. 이 끊이지 않은 연승이 군 조직의 머릿속에 남긴 자국이 뒤이은 모든 오판의 토양이 되었습니다. 서양 사가들이 승리병이라 부르는 그 도취 곧 '우리는 아직 져본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이긴다'는 무언의 전제가 이때 뿌리를 내렸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점령선을 어디까지 확장하고 어디서 멈출 것인가. 일본이 고른 답의 하나가 호주를 전쟁에서 떼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태평양을 건너 반격하려면 호주를 거대한 전진기지로 삼아야 했으므로 미국과 호주를 잇는 보급, 통신선을 끊으면 반격의 발판 자체가 사라진다는 계산이었습니다. 피지와 사모아, 뉴칼레도니아를 점령해 그 선을 자르려던 것이 이른바 FS 작전입니다[^Operation FS]. 이 구상은 1942년 5월 산호해 해전에서 제동이 걸리고 6월 미드웨이에서 정규 항공모함 네 척을 잃으면서 끝내 취소됐습니다[^Operation FS].

항모를 한꺼번에 잃은 일본은 공세로 섬을 점령하는 대신 불침항모로 같은 목표를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이 전환이 과달카날이라는 낯선 지명을 전쟁사에 등장시켰습니다. 여기에 일본 내부의 균열이 하나 겹칩니다. 남태평양을 맡은 부대는 라바울에 본부를 둔 제17군이었는데 사령관 햐쿠타케 하루키치 중장은 같은 시기에 뉴기니의 포트모르즈비를 코코다 산길로 노리는 또 하나의 공세를 병행하고 있었습니다[^Guadalcanal campaign]. 그에게 과달카날은 본업인 포트모르즈비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빠르게 해치워야 할 부업이었습니다. 게다가 육군과 해군의 작전 합의는 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하고 5일이 지난 8월 12일에야 대본영에서 처음으로 맺어졌습니다[^Battle for Guadalcanal: As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ncentration of Forces]. 적을 함께 재고 함께 칠 첫 기회가 이미 5일 늦은 셈이었습니다. 뒤에서 보게 될 '한 줌씩'의 박자 늘 한 박자 늦고 한 치수 작게 도착하던 그 리듬은 곁가지라는 인식과 늦은 합의라는 이 두 출발선에서 이미 예고돼 있었습니다.

비행장은 왜 거기 있었는가

이제 그 비행장 자체를 살펴봅니다. 항모라는 움직이는 비행장을 잃은 일본은 솔로몬 제도 남단의 땅에 활주로 하나를 깔아 같은 목표를 노렸습니다. 거기서 뜬 장거리 폭격기가 미국 서해안에서 인구가 밀집한 호주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를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Guadalcanal campaign]. 일본 공병은 1942년 5월 초 룽가 곶 일대를 측량해 부지로 정하고 코드명 RXI를 붙였습니다[^Henderson Field (Guadalcanal)]. 산과 정글로 뒤덮인 섬에서 활주로를 놓을 만큼 평탄하고 물이 잘 빠지는 땅은 이 룽가 평원 말고는 흔치 않았습니다. 7월 초 원래 미드웨이를 점령한 뒤 작업할 예정이던 두 건설 부대가 도착해 공사를 시작했고 전투기 마흔다섯 기와 폭격기 예순 기를 둘 수 있는 제법 큰 비행장으로 설계됐습니다[^Henderson Field (Guadalcanal)]. 그런데 8월 시점 과달카날에 있던 일본 인원 약 2,800명 가운데 2,200명가량은 한국인 강제 노역자를 포함한 노무자였고 나머지가 일본인 건설 전문가였습니다[^Guadalcanal campaign]. 다시 말해 그곳에 모인 인력의 절대다수는 총을 든 군대가 아니라 삽을 든 건설대였습니다. 일본 계획자들은 연합군이 적어도 이듬해인 1943년까지는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지 못하리라 보았고 그래서 비행장을 요새로 다지는 대신 서둘러 활주로만 뽑아내는 데 매달렸습니다. 이 한가한 전제 그리고 삽을 든 인력이 절대다수였다는 사실 하나가 뒤이어 벌어질 일의 절반을 이미 설명합니다.

5일 만에 빼앗긴 비행장

거의 완성되어 가던 그 비행장이 미군의 표적이 된 것도 비행장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연합군 정찰기와 태평양 곳곳에 흩어져 적의 동향을 무전으로 알리던 민간 해안 감시원들이 건설 중인 활주로를 포착했고 미군은 그 비행장이 가동되기 전에 빼앗기로 결정했습니다. 위키백과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연합군 정찰이 과달카날의 일본 비행장 건설을 발견하자 그 점령이 작전 계획에 추가됐다'는 것입니다[^Guadalcanal campaign]. 1942년 8월 7일 미 해병 제1사단이 과달카날에 상륙했습니다. 비행장을 지키던 쪽은 무장하지 않은 노무자와 소규모 경비대뿐이었고 함포 사격과 공습이 시작되자 이들은 공황에 빠져 비행장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해병은 수적으로 열세인 수비대를 압도하고 8월 8일 오후에 거의 완성된 활주로를 손에 넣었습니다[^Guadalcanal campaign]. 점령은 사실상 5일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미 해병 공병은 일본이 두고 간 장비로 활주로를 가동 상태로 만들었고 이 비행장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사한 해병 항공장교 로프턴 헨더슨 소령의 이름을 붙여 헨더슨 필드라 불렀습니다[^Henderson Field (Guadalcanal)]. 일본의 미국과 호주 차단이라는 꿈을 담아 닦던 활주로가 완성 직전에 주인을 바꿔 정확히 그 일본을 겨누는 칼이 된 셈입니다.

사라진 수송선

문제는 일본이 이 사태를 한참 동안 사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상륙 다음 날인 8월 9일 새벽 일본 제8함대는 사보섬 앞바다에서 연합군 순양함 4척을 격침하는 야간 대승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미카와 군이치 중장은 미군 항공모함의 주간 반격을 우려해 정작 가장 중요한 표적인 수송선단은 건드리지 않고 물러났습니다[^Battle of Savo Island]. 공교롭게도 그 항모는 이미 전날 저녁 철수가 결정돼 있었고 항공 엄호를 잃은 미군 수송선들 역시 중장비와 보급품을 다 내리지도 못한 채 8월 9일 밤 과달카날 해역을 떠났습니다. 해안에 남겨진 해병대는 줄여 실어 온 보급마저 다 부리지 못해 식량은 5일치 남짓, 탄약은 10일치만 손에 쥔 빈약한 처지였습니다[^Guadalcanal campaign]. 그러니까 미군도 실제로 위태로웠던 것인데 다만 떠난 것은 배였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묘박지가 텅 비었습니다. 일본은 이 빈 바다를 강력한 신호로 읽었습니다. 사보섬에서 두들겨 맞은 미군이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다는 것입니다. 8월 12일 라바울의 한 고급 참모가 직접 정찰기에 올라 룽가 상공을 돌아보고는 '노출된 미군 병력은 소수, 인근에 큰 함선 없음'이라 보고했고 이 비행이 대본영에 연합군이 대부분 철수했다는 확신을 심었습니다. 위키백과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입니다. '실제로는 단 한 명의 연합군도 철수하지 않았다'[^Battle of the Tenaru].

이 상황 위에서 병력 추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치키 대좌는 트루크에서 과달카날의 미군이 2,000명에서 1만 명 사이라고 브리핑받았습니다[^Battle of the Tenaru]. 실제 룽가 방어선의 해병은 약 1만 1,000명이었으니 추정의 상한은 사실에 가까웠는데도 일본은 하한을 그것도 '사단 하나에도 못 미친다'는 쪽을 골라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이치키는 정찰하고 후속 부대를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음에도 자신의 선발대만으로 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일기에 적은 일정은 거의 소풍에 가까웠습니다. '8월 18일 상륙, 20일 야간 행군과 전투, 21일 승리의 과실 향유'[^Battle of the Tenaru]. 그는 미 해병을 '유약하고 비겁하다'고 평하며 적을 폄하했습니다[^Kiyonao Ichiki]. 서양 사가들이 승리병이라 부르는 이 과신 곧 연이은 초기 승리에서 비롯된 도취가 정보의 모든 공백을 가장 낙관적으로 채워 넣고 있었습니다. 정찰기 한 대가 우연히 가장 비어 보이는 순간의 해안을 포착했을 때 그 그림을 '적이 떠났다'로 읽을지 '적이 숨었다'로 볼지 나눈 것은 사진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기대였습니다.

이 전투를 다루는 한국어 서술 중에는 1942년 8월 17일 소련 주재 일본 무관을 통해 '미군이 비행장을 파괴하고 철수할 계획'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전달돼 오판을 키웠다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 대목을 사실로 받아들였는데 막상 살펴보니 접근 가능한 어떤 신뢰할 만한 공개 자료에서도 이 소련 무관 경로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지정학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소련은 당시 미국과 함께 독일에 맞선 동맹국이었고 일본과는 1941년 4월에 맺은 중립조약으로 묶여 서로 싸우지 않는 상태였습니다[^Soviet–Japanese Neutrality Pact]. 소련에게는 일본의 대미 공격을 도와줄 이유도, 일본을 자극할 역정보를 흘릴 이유도 없었습니다. 첩보의 실제 방향은 오히려 정반대여서 리하르트 조르게로 대표되듯 소련이 일본을 염탐하는 쪽이었습니다[^Richard Sorge]. 그러니 '소련이 거짓 정보를 흘렸다'는 가설은 동기에서부터 무너지고 검증되는 진짜 실패는 훨씬 더 평범하고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일본은 남의 거짓 정보에 속은 것이 아니라 자국 정찰기 한 대의 낙관적 오독을 윗선에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작전계획으로 흘려보낸 것입니다. 결함은 외부에서 들어온 거짓이 아니라 내부의 무비판이었습니다.

한 줌씩 보낸 부대

이 잘못된 그림이 축차투입의 시작입니다. 적이 2,000명뿐이고 그나마 도주 중이라고 믿으면 그들을 치는 데 사단을 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증강된 대대 하나면 충분해 보입니다. 게다가 일본 육군의 작전 중점은 여전히 뉴기니의 포트모르즈비 공략에 있었고 과달카날은 그 본업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신속하게 해치워야 할 곁가지로 취급됐습니다[^Battle for Guadalcanal: As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ncentration of Forces]. 그래서 1개 사단이 아니라 이치키의 선발대 900명이 먼저 갔습니다. 여기에는 더 구조적인 제약도 겹쳤습니다. 가용한 수송선이 9노트짜리 노후 선박뿐이라 부대를 한꺼번에 제때 실어 나를 수 없자 공격 제대만 고속 구축함에 태워 먼저 밀어넣고 화포와 대전차포를 실은 후속 제대는 느린 수송선으로 뒤따르게 한 것입니다[^Battle for Guadalcanal: As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ncentration of Forces]. 이치키가 모래톱에서 중화기 하나 없이 보병만으로 돌격해야 했던 것은 그의 만용이기 이전에 이 분할의 결과였습니다. 미 해병대 공간사는 이 임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1개 대대를 5개 대대에 맞붙인 이치키의 임무는 개념과 실행과 결과 모든 면에서 자살적이었다'[^The Guadalcanal Campaign].

그리고 한 번의 자살적 임무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 하룻밤에 상륙한 약 900명 가운데 일본 측 기록으로 777명이 죽거나 행방불명됐고 포로는 열다섯 명 남짓에 그나마 다치지 않은 자는 단 둘뿐이었습니다. 같은 전투에서 미군 전사자는 마흔 명 안팎이었습니다[^Battle of the Tenaru]. 이치키 대좌는 부대의 연대기를 적의 손에 넘기지 않으려 불사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지며 일본 육군은 뒷날 그를 소장으로 추서했습니다[^Kiyonao Ichiki]. 그런데 이토록 일방적인 결과 앞에서도 일본 육군 사령부는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같은 방식으로 다음 부대를 밀어넣었습니다[^Battle of the Tenaru]. 9월에는 약 6,000명의 가와구치 지대가 도착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가와구치는 이치키가 외면했던 방식 즉 비행장의 얇은 내륙 쪽으로 우회해 기습 야간공격을 거는 길을 택했고 그 에드슨 능선 전투에서 일본은 과달카날 전 기간을 통틀어 승리에 가장 근접했습니다. 그럼에도 끝내 능선을 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Battle of Edson's Ridge]. 더 큰 부대가 더 영리한 방법으로 쳤는데도 결과는 또 패배였습니다. 10월에는 사단 규모가 같은 비행장을 향해 들어갔다가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적을 계속 과소평가했기에 매번 다음 한 줌이 충분해 보였고 그 한 줌이 부서지고 나서야 비로소 부대를 키웠지만 그때는 이미 미군이 그만큼 더 보강된 뒤였습니다. 축차투입이라는 실패는 바로 이 박자의 어긋남입니다. 늘 한 박자 늦게, 늘 한 치수 작게 도착합니다.

다른 길은 없었는가

그렇다면 일본에게 다른 길은 없었을까요. 모래톱 위 이치키의 선택지만 놓고 보면 더 나은 수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후속 제대를 기다려 최소한의 화력이라도 갖추거나, 정면 모래톱 대신 미군이 실제로 약했던 내륙 측면으로 우회하거나, 첫 격퇴 뒤 병력을 보존해 물러나는 길입니다. 실제로 미군은 바로 그 열린 내륙 측면을 이용해 이치키를 포위했으니 우회는 공상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가능한 선택이었습니다[^The Guadalcanal Campaign]. 다만 이 대안들은 하나같이 패배의 양상을 덜 참혹하게 할 뿐 1만 1,000명을 상대하는 900명이라는 산술 자체를 뒤집지는 못합니다. 화포 두 문을 더 끌고 왔어도, 측면으로 돌았어도, 끝은 패배였습니다. 다만 그 패배가 조금 더 질서 있었을 따름입니다.

한 층 올라가 작전 수준에서 묻습니다. 축차투입을 멈추고 이치키와 가와구치를 합쳐 함포 지원 아래 한꺼번에 쳤다면 어땠을까요. 9월의 에드슨 능선 전투가 보여주듯 그렇게 했다면 돌파 확률은 분명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자료가 동시에 일러주는 사실은 더 큰 부대조차 그 방식으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Battle of Edson's Ridge]. 병력을 모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답을 공교롭게도 일본 자신이 두 달 뒤에 직접 내놓았습니다. 10월 일본은 센다이 사단을 주축으로 약 2만 명을 모아 같은 비행장을 향해 최대 규모로 집중 공격했지만 그 결과는 과달카날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결정적인 패배였습니다[^Battle for Henderson Field]. 대대로 실패하고, 여단으로 실패하고, 끝내 사단으로도 실패한 것입니다. 게다가 시간은 일본 편이 아니었습니다. 8월 20일 헨더슨 필드에 캑터스 항공대가 진입하고 90mm 대공포가 배치되면서 일본의 제공권은 기다릴수록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침식되고 있었습니다[^Battle for Guadalcanal: As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ncentration of Forces]. 정찰하며 시간을 벌어 병력을 모으자는 가장 신중한 선택조차 그 시간에 미국이 더 두꺼워졌기에 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보는 어땠을까요. 만약 일본이 그 텅 빈 해안 너머에 실제로는 1만 1,000명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요. 이 부분이 오늘의 이야기에서 가장 서늘합니다. 알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헨더슨 필드에서 뜬 항공기가 낮의 바다를 막고 있는 한 일본은 중포와 기갑과 넉넉한 보급을 실은 대부대를 그 섬에 내려놓을 물리적 수단 자체가 없었습니다[^Guadalcanal campaign]. 적이 1만 명을 넘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일본도 당연히 더 큰 부대를 보내려 했겠지만 그 큰 부대를 실어 나를 수송선은 낮의 하늘 아래로 다닐 수 없었고 밤에 구축함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것은 늘 한 줌의 경무장 보병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정보의 실패는 패배를 키운 증폭기였을 뿐 그 하나만 고쳤다면 이길 수 있었던 단독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적을 정확히 잴 수단도 부족했지만 설령 정확히 알았더라도 그 앎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미 좁게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막다른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이 정말 이길 수 있었던 기회는 모래톱이 아니라 훨씬 상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류의 가장 굵은 분기점이 바로 6월의 미드웨이였습니다. 앞서 보았듯 일본의 본래 구상은 항모라는 움직이는 비행장을 앞세워 남태평양 깊숙이 나아가 미국과 호주 사이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드웨이에서 정규 항공모함 네 척을 잃으면서 일본은 남태평양 상공에 자기 비행장을 띄워 보낼 수단을 잃었습니다[^Operation FS]. 움직이는 비행장을 잃었기에 땅에 붙박인 활주로 하나에 매달려야 했고 그 활주로마저 빼앗기자 이번에는 낮의 제공권 자체를 고스란히 미국에 넘겨주었습니다. 사보섬의 야간 승리를 수송선 격멸로 잇지 못한 것도, 동부솔로몬 해전에서 헨더슨을 끝내 침묵시키지 못한 것도, 모두 이 잃어버린 제공권 아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Battle of Savo Island][^Guadalcanal campaign]. 다시 말해 일본의 승리 가능성이 크게 꺾인 지점은 8월 21일 새벽 이치키가 돌격을 명령한 순간이 아니라 두 달 전 미드웨이의 바다에서 네 척의 항모가 불타 가라앉던 순간이었습니다. 모래톱 위에서 이치키 앞에 놓인 것은 승패를 가르는 선택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패배의 크기를 조절하는 선택지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일치된 평가는 이 작전이 개별 전술의 실수가 아니라 작전과 전략 수준에서 이미 패배가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 공식 전사인 전사총서는 과달카날의 패인으로 솔로몬 제공권 확보 실패, 자군 전투력에 대한 과신과 적 전력의 과소평가에서 비롯한 병력의 축차투입, 충분한 증원 수송의 실패, 그리고 육군과 해군 작전지도 사이의 큰 괴리를 듭니다[^Battle for Guadalcanal: As View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ncentration of Forces]. 다나카 라이조 제독은 전후에 화포 지원도 없이 보병만으로 요새화된 진지를 친 이 공격을 두고 죽창 전술의 가망 없음을 절감했다고 회고했습니다[^Reinforcements to Guadalcanal]. 느린 수송선이 강요한 분할, 그것을 정당화한 적에 대한 과소평가, 그 과소평가를 떠받친 승리병적 낙관이 한 덩어리로 맞물려 있었습니다. 한 줌씩 보낸 것은 이치키 한 사람의 만용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사고방식이었던 셈입니다.

스스로 만든 덫

그 사고방식의 대가는 비행장을 중심으로 청구됐습니다. 헨더슨 필드에서 뜬 캑터스 항공대가 낮의 하늘을 장악하자 일본은 주간 수송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일본 구축함은 주간 공습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슬롯이라 불린 좁은 해협을 하룻밤에 왕복해야 했고 이 야간 고속 수송으로는 중포와 기갑과 대량 보급을 실어나를 수 없었습니다[^Guadalcanal campaign]. 미군이 도쿄 익스프레스라 부른 이 한계가 이치키부터 사단 규모까지 모든 탈환 시도가 화포 없이 굶주린 채 싸워야 했던 이유입니다. 비행장 하나가 일본의 모든 증원을 한 줌으로 깎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캑터스 항공대는 전투 첫 5주에만 일본기 150여 기를 떨어뜨렸고 솔로몬 전역에서 일본은 병력 3만 1,000명과 함정 38척과 항공기 683기를 잃었습니다[^Battle of Guadalcanal][^Why Guadalcanal Was WWII's Turning Point in the Pacific]. 그중에서도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은 숙련된 항공 승무원의 손실입니다. 국립 2차대전 박물관의 표현으로는 일본이 항공기와 숙련 항공 승무원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렀고[^The Solomon Islands Campaign: Guadalcanal] 이 베테랑들은 미국과 달리 채워 넣을 수 없는 자원이었습니다.

그렇게 과달카날은 미드웨이와 더불어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브리태니커는 이 섬의 싸움이 연합국에 유리한 전환점이었고 헨더슨 필드가 곧 분쟁의 무게중심이 되었다고 적습니다[^Battle of Guadalcanal]. 일본 지휘부 스스로 과달카날이 전쟁의 결전이 될 수 있다고 보아 햐쿠타케 하루키치 중장은 포트모르즈비 코앞까지 진출한 부대에게 '과달카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물러서라고 명령했습니다[^Guadalcanal campaign]. 한 일본군 장교는 훗날 이 섬을 갈림길이라고 회고합니다[^The Solomon Islands Campaign: Guadalcanal]. 그 갈림길의 한가운데 놓여 있던 것이 일본이 미국과 호주를 갈라놓겠다는 꿈을 담아 자기 손으로 닦던 활주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패배시킬 덫을 자기 손으로 지었고, 완성 직전에 그 덫을 적에게 넘겨주었으며, 그다음에는 빼앗긴 자기 덫을 되찾겠다고 한 줌씩 병력을 던져 넣다가 함대와 항공대와 숙련 조종사를 다 소진했습니다. 비행장은 끝내 일본의 손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생각할수록 가장 많이 떠오르는 부분은 정작 큰 전투들이 아니라 8월 12일의 그 한 번의 정찰 비행입니다. 모든 것이 거기서 갈렸습니다. 텅 빈 해안을 찍은 한 장의 그림을 보고 싶은 결론에 맞춰 읽은 그 순간 말입니다. 결정적 병목은 정보를 얻을 수단의 부재가 아니라 손에 쥔 단서를 해석하는 머리의 편향이었습니다. 정보가 모호할 때 일본 지휘부는 언제나 가장 낙관적인 쪽으로 읽었고 그 편향이 어떤 단서든 무력화했습니다. 축차투입이라는 말은 흔히 병력 운용의 실패로만 쓰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거의 항상 이런 인지의 실패가 깔려 있습니다. 적을 작게 보면 보낼 부대도 작아지고 작은 부대가 깨지고 나서야 적을 다시 재는데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한 박자 늦게 한 치수 작게 도착하는 이 패턴은 1942년의 모래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키우기 두려워 자꾸 절반만 거는 모든 자리에서 모습을 바꿔 되풀이됩니다. 게임 하나를 만들든 조직 하나를 굴리든 적을 정직하게 재는 일을 건너뛴 낙관은 대개 가장 비싼 청구서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보낼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보내지 않는 편이 한 줌씩 흘려보내 다 잃는 쪽보다는 나은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