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할일관리에 지라 사용

개인 할일관리에 지라 사용

이전에 몇몇 할일 관리 앱을 전전했습니다. 한동안흔 OmniFocus를 써보기도 하고 애플 생태계에서는 거의 표준에 가까운 Things를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이 앱들은 GTD 기반의 앱들이었고 제 할일의 중요도와 시급성의 상당부분을 제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활용하기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앱들을 기웃거렸습니다. 또 한동안은 윈도우 머신에도 동기화되길 원했기 때문에 구글 제품이나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용해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이 각각의 방법에는 모두 장단점이 잇었고 제 요구사항을 잘 수용하는 앱을 찾기는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1년 전 어느날 문득 할일관리 앱들이 각자 이 앱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개인의 접근방식을 어느 정도 고정하도록 강제해 내 요구사항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이 계속해서 일어날 거라면 차라리 애초에 이런 다양한 요구사항을 반영하도록 만들어진 앱을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라는 애초에 개인 할일을 관리하라고 만든 도구는 아니지만 기업이나 프로젝트 별 다양한 요구사항을 반영하기 위해 강한 확장성을 고려해 만들어진 도구입니다. 덕분에 관리자가 상황에 맞게 옵션을 잘 설정하지 않은 채 사용하면 너무 많은 기능으로 인해 오히려 사용하기 불편해지기 일쑤입니다. 지라를 도입하면서도 지라의 설계철학을 이해하지 않고 그냥 이슈트래킹 소프트웨어 중 하나로만 접근하면 사용자들이 생각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 상황을 겪기 일쑤입니다.

반면 지라는 다양한 요구사항에 대응하기 위한 온갖 기능이 붙어있습니다. 일정관리 소프트웨어가 아니지만 일정을 입력해 비슷하게 사용할 수도 있고 사용하지 않는 필드를 모두 제거한 다음 포스트잇을 붙여놓는 메모판 형태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 할 일의 카테고리에 따라 예상 작업시간을 설정해놓으면 자동으로 내 업무 진행에 따른 작업시간을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어지간한 요구사항 범위 안에서는 옵션을 잘 수정해 내가 원하는대로 동작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런 특징에 기반해 아틀라시안 스스로도 지라를 아예 트렐로처럼 훨씬 단순한 모양에 칸반 보드로 편하게 전환할 수 있는 넥스트젠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어차피 지난 수 년에 걸쳐 완전히 정착할만한 할일관리 앱을 찾지 못한 마당에 과감하게 기업용 도구이기는 하지만 약간은 과감하게 지라를 개인할일관리에 사용해보기로 했습니다.

일단 지라는 무료버전이 있습니다. 동시애 10명보다 많은 사람이 동시에 사용해야 하거나 2기가바이트보다 많은 스토리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돈을 내야 하지만 개인 할일관리 도구는 사용자가 한 명일 뿐 아니라 많은 스토리지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지난 1년 동안 50메가바이트를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개인 수준의 사용으로는 사실상 무료라고 보시면 됩니다. 웹에서 완전하게 동작하고 지라 은 요즘 앱 스럽지 않은 촌스러움이 줄줄 흐르지만 기능이 없는건 아닙니다. 스마트폰에서 웹을 직접 사용하는 것 보다는 편리하게 제어할 수 있습니다.

저는 넥스트젠 프로젝트에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개인 할일 프로젝트와 회사 할일 프로젝트 두 개를 핵심으로 사용하는데 이 두 프로젝트 모두 넥스트젠 프로젝트로 생성했습니다. 넥스트젠 프로젝트는 지라를 트렐로 모양으로 커스텀해놨습니다. 지라를 쓰는 팀이라면 아마도 넥스트젠 프로젝트가 아닌 모양으로 사용하고 있을 겁니다. 팀 표준 대시보드나 개인이 만든 대시보드에서 시작해 업무를 진행하는데 넥스트젠 프로젝트는 딱 보면 지라를 트렐로 모양으로 튜닝해놨고 딱 써보면 트렐로와 똑같아 순식간에 적응할 수 있습니다. 보드 상의 칼럼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없앨 수 있고 칼럼 사이에 이슈를 마음대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원래 지라의 규칙대로라면 각 컬럼은 워크플로우 상의 상태이고 각 단계 사이를 이동할 때는 워크플로우 규칙에 따라서만 전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조직이 모여 일하거나 복잡한 절차가 필요할 때 실수 없이 동작하게 도와주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구조가 속도 중심으로 민첩하게 일하는 환경에서는 오히려 답답한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넥스트젠 프로젝트에서는 워크플로우가 각 상태에서 다른 모든 상태로 이동할 수 있도록 워크플로우 규칙이 설정돼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트렐로와 똑같이 동작합니다. 더이상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옮기기 위해 답글을 달고 승인을 받는 등의 절차를 강제하지 않아도 됩니다.

참고로 넥스트젠 프로젝트로 생성하지 않았더라도 칸반보드를 기본으로 사용하면 넥스트젠 프로젝트와 비슷한 모양으로 사용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워크플로우를 수정한다든자 잘 사용하지 않는 필드를 제거하는 커스터마이징은 해야 하겠지만요. 한번 넥스트젠 프로젝트로 프로젝트를 생성하면, 혹은 그 반대로 생성하면 반대 형태로 전환할 수는 없습니다. 전환하기를 원한다면 새 지라 프로젝트를 만든 다음 이슈를 프로젝트 간에 전송해야 해서 좀 귀찮습니다. 지라를 할일관리 도구로 사용하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넥스트젠 프로젝트로 시작하시는걸 추천합니다.

일단 지라를 할일관리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면 이제부터는 여태까지 알고있는 지라의 강력한 장점들을 거의 그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듀데이트를 설정하고 레이블을 설정하고 진행상황에 따라 답글을 달거나 다른 지라 이슈를 연결할 때 연결관계를 설정해 나중에 한 이슈가 다른 이슈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파악해 할일이 어떻게 발전해가는지, 또는 어떻게 다른 일과 연결되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슈의 상태를 여러 가지로 만들어놓을 수도 있고 지라에서 제공하는 백로그 대신 트렐로 스타일로 한 칼럼 (이슈 상태) 을 백로그 칼럼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또 로드맵 기능을 켜서 에픽 (스토리) 을 만들어놓고 여기 해당되는 이슈를 설정해놓으면 긴 맥락에 따라 진행해야 할 여러 이슈가 긴 맥락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파악할 수도 있고 로드맵에서 스토리와 스토리를 연결해놓으면 이들 사이의 의존성과 진행률, 완료예상일자를 파악하고 조정할 수도 있게 됩니다.

얼마 전에는 지라에 오토메이션 기능이 추가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시작됐습니다. IFTTT 방식으로 동작을 설정해놓을 수 있습니다. 이슈 제목에 특정 단어를 감지하면 레이블을 자동으로 붙여준다든지 레이블에 따라 답글에 진행방법이 나타난다든지 레이블을 보고 관계 있는 이슈들을 서로 자동으로 연결해주거나 어떤 이슈는 메일로 알려주거나 그렇지 않거나를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한달에 한 번 반복해서 수행해야 할 일인데 할일 관리 앱이라고 반복일정 설정을 할 수 없는 식의 이상한 제약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또 레이블이나 답글에 단어나 문장을 감지해 내가 실제 진행한 작업을 추측해 예상 작업시간을 자동으로 입력해 이 작업 전체를 진행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를 자동으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한 기능들은 제가 지난 1년 사이에 지라를 개인 할일관리에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서서히 확장시킨 사례입니다.

앞으로 제 마음이 조금씩 바뀌고 또 이렇게 할일을 관리하면서 조금씩 방법을 연구하고 개선해감에 따라 요구사항이 조금씩 달라질겁니다. 어떤 도구는 이렇게 달라지기 시작한 요구사항과 도구의 설계철학 사이에 차이가 커지면 어느 순간 더이상 요구사항을 반영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곤 해서 항상 도구를 선택할 때 이 점을 미리 걱정하곤 하는데 지라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지라는 심지어 커스텀 필드를 만들고 커스텀 필드 자체에도 워크플로우를 설정하고 워크플로우에 의한 상태전환에 커스텀 액션을 만들어놓을 수 있어 제 요구사항이 조금쯤 바뀌더라도 매번 지라를 거기에 맞춰 바꿔가며 내 요구사항에 맞출 수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꽤 만족하며 앞으로 계속해서 사용할 겁니다. 이러다가 스토리지가 2기가에 다다르면 비용을 지불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1년에 50메가를 썼을 뿐이라 2기가를 가득 채워 아틀라시안에 돈을 낼 시점은 생각보다 먼 미래일 것 같기는 합니다만.

자. 정리하면 지라는 기업용 도구이지만 개인 할일관리에 사용하기에도 충분합니다. 강력한 태스크 관리도구이고 커스텀 필드를 추가해 시간, 자원추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기간 단위 또는 목표단위로 태스크를 관리하고 이들의 자원을 추적할 수 있고 이 도구를 사용하며 얻은 시행착오는 업무용 지라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점은 체험할 때마다 신기하고 또 강력한 특징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 할일을 이렇게까지 관리할 필요가 있는가, 또는 요구사항에 맞춰 도구를 수정하기보다는 도구에 맞춰 자신의 관리스타일을 바꾸는 분들께는 적당하지 않은 도구입니다. 또 넥스트젠 프로젝트의 기능 거의 대부분은 트렐로와 똑같은데 그럼 트렐로를 쓰지 뭐하러 지라를 쓰나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요구사항이 조금씩 바뀌어감에 따라 앱에서 지원하는 사용 시나리오에서 벗어나 결국 앱을 포기하는 사이클을 벗어나 제 요구사항의 변화에 따라 도구를 조금씩 수정해나가는 과정이 의미있고 유효하다고 생각해 지라에 한동안 더 머물 작정입니다. 이런 스타일로 앱을 사용하실 분이라면 추천합니다. 강력하고 무료이고 내 시행착오에 의한 노하우가 업무용 지라에 그대로 적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