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룩템을 PvP 보상에만 넣나요?
원하지 않는 게임 모드에 원하는 보상이 걸려 있을 때 무척 실망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흘러가는 타임라인을 지켜보면 고객 분들이 게임 업계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행동에 의문을 가지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문은 제 스스로도 비슷하게 행동하면서도 이유를 정확히 모른 체 그냥 하던 대로 할 뿐인 일이 있는 반면 어떤 의문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게임디자이너는 업계의 다른 직군에 비해 자신이 하는 일, 자신이 내리는 결정의 이유를 프로젝트 전체의 큰 맥락에서부터 지금 마주한 작은 주제에 이르는 전체적인 맥락에 따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모든 주제를 그렇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타임라인에 지나가는 고객분들의 의문을 보고 왜 우리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을지 생각해보면 비슷한 행동을 할 때, 비슷한 행동을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 찾아왔을 때 지금보다 더 나은 행동을 하거나 적어도 이유를 알고 있는 채로 행동할 수는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가령 몇 달 전에 제가 생각하는 게임 퍼블리셔가 직접 카페를 운영하는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도 분명 업계에서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퍼블리셔가 직접 커뮤니티를 운영하지 않았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누군가 처음 직접 커뮤니티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정신 차려 보니 거의 모든 퍼블리셔가 스스로 서비스하는 게임의 커뮤니티를 직접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게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당연하게 느껴 와서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지만 문득 타임라인에 지나가는 어느 고객분의 의문을 보고 우리들은 왜 퍼블리셔가 직접 대 고객 커뮤니티를 운영하는데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커뮤니티가 자생하게 놔 두던 시대에 겪던 문제들, 커뮤니티를 구축한 다음 퍼블리셔에게 판매하려 하는 게임 웹사이트들, 빅 마우스들을 대거 영입해 회사에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례들을 떠올리며 단점이 있지만 결국 퍼블리셔가 직접 커뮤니티를 운영해 이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오늘은 타임라인에서 ‘룩템을 왜 PvP 보상에 넣어 PvP를 전혀 하고 싶지 않은 고객들을 실망 시키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보고 이유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모두가 이런 의식의 흐름에 의해 이런 결정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제 관점에서 룩템을 PvP 보상에 넣어 이를 원하는 PvP를 플레이 하지 않는 고객들을 실망 시킬 수밖에 없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잠깐 용어 설명을 하고 시작하면 ‘룩템’은 온라인 게임에서 캐릭터의 외형을 꾸미는데 사용하는 아이템으로 주로 의복이나 액세서리 형태입니다. 온라인 게임 중에서도 MMO 장르는 캐릭터의 외형이 캐릭터의 아이덴티티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여러 경로를 통해 룩템을 입수해 이를 착용하고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과시하는 행동이 게임을 플레이 하는 목적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목표로 삼은 룩템을 입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게임을 구성한 다양한 컨텐츠를 플레이 하며 시간을 보내고 때로는 유료 서비스를 결제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PvP는 플레이어 대 플레이어를 말하는데 경쟁 요소가 있는 게임은 플레이어와 컴퓨터가 대결하거나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대결할 수 있는데 이들 중 후자인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직접 대결하는 게임 모드를 말합니다. PvP의 반대 의미로는 PvE가 있는데 이는 플레이어와 컴퓨터, 정확히는 개발자가 의도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진 컴퓨터와 경쟁하는 형태로 싱글플레이 게임 거의 모두가 이런 형태이며 과거에는 이런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고 현대에도 싱글플레이 게임 대부분이 이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PvP는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그리고 온라인 게임일수록 회사에 의해 더 선호되는데 PvE 플레이를 만들면 개발자가 고객과 직접 대결하는 형국이 되어 결코 고객을 이길 수 없어 무엇을 만들든 항상, 그리고 영원히 컨텐츠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PvP 모양으로 게임을 만들면 고객들 사이에 경쟁 구도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고객들은 자신들 끼리 경쟁하고 그 사이에 개발자들은 다음 컨텐츠를 개발할 수 있으며 컨텐츠가 부족하다는 말이 상대적으로 덜 나오게 됩니다.
외국 대형 개발사의 퍼스트 파티 개발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온라인 게임은 개발 비용이 높기 때문에 어떤 한 가지 취향을 가진 고객들을 목표로 삼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사장님께 이런 사실을 브리핑 하는 순간 아무 곳에도 부상을 입지 않은 채 회의실을 빠져나오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게 공격적인 사장님이 아니더라도 온라인 게임을 주로 개발하는 회사는 기왕 큰 비용을 들여 회사의 존망을 걸고 개발하는 김에 최대한 다양한 취향의 고객들을 대상으로 개발하기를 원합니다. 사실상 그런 게임을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대대로 모든 고객들을 만족 시키기 위한 시도는 그 누구도 만족 시키지 못하는 결과로 돌아오곤 했지만 회사는 종종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게임에는 다양한 취향을 반영한 컨텐츠가 들어가는데 대략 성장구간에는 PvE 위주의 퀘스트를 통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장비 파밍에 높은 수준의 PvE를 요구함과 동시에 다른 취향의 고객들을 위해 PvP도 함께 제공하며 현대에는 이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PvPvE 같은 좀 더 느슨한 형태의 경쟁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게임에만 집중해도 이를 훌륭하게 만들기 어려운데 한 가지 게임 모드를 목표로 개발하지도 않은 환경에서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게임 모드를 만들다 보면 하나 같이 이 모드를 한 가지 게임을 통해 전문적으로 개발한 게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현대의 온라인 게임, 주로 MMO 장르에는 이 게임 모드를 전문으로 플레이 할 수 있는 게임 보다는 못하지만 대강 익숙하게 하던 그 게임에 다른 게임에서 플레이 하던 게임 모드가 그럭저럭 봐 줄 만한 수준으로 들어간 상태를 만들게 됩니다.
특히 이들 중 PvP, PvPvE 처럼 고객들이 서로 직접 경쟁하게 만드는 컨텐츠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고객과 개발자가 PvE를 통해 직접 경쟁하는 구도를 만들지 않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고객은 개발자들이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속도로 컨텐츠를 소비하기 때문에 개발자는 결코 이 행동에 직접 경쟁해서는 안됩니다. 개발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고객이 소모하는 속도보다 빨리 게임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게 성공한 사례가 전혀 없지는 않은데 적어도 대한민국 안에서는 그런 위업을 달성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현대에는 게임의 주요 고객이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든 게임에는 PvP 기반의 직접 경쟁 요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플레이어 간 직접 경쟁 요소는 컨텐츠를 개발할 시간을 버는 훌륭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이런 요소야말로 고객들의 취향을 심하게 타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PvE는 대강 원래 게임이 이렇게 생겨 먹었으니 취향이 조금 다른 고객들이라도 이를 인정하고 플레이 하곤 하지만 PvP는 고객들에게 최소한의 경쟁심, 공격성, 신체적 능력 등을 요구하며 패배할 때 상대적으로 더 깊은 상처를 남기고 또 실제 플레이를 통해서만 실력을 개선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인간으로 인한 패배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은 상처를 받는 분들은 PvP에 익숙해지기 어렵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서 게임에 PvP 요소를 전혀 플레이 하지 않고 그 나머지 요소들을 통해 게임을 플레이 하고 다른 고객들과 상호작용 하는 수준에 머무릅니다. 사실 이런 고객분들 역시 게임의 다양한 고객들의 일부이고 이 분들이 PvP를 플레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직접적인 PvP가 아닌 게임의 다른 요소로부터 이분들을 배제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부터 설명할 두 가지 곤란한 이유 때문에 룩템을 PvP 보상으로만 제공하는 의사결정이 일어납니다. 먼저 왜 현대 게임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재화를 사용하나요?에서 설명한 ‘보상에 의한 동작’ 때문입니다. 한 게임에 여러 가지 게임 모드를 만들면 모든 게임 모드가 이들 각각을 하나의 게임으로 만든 다른 게임에 비해 잘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한 가지 게임 모드는 모든 고객들의 취향에 맞을 수도 없기 때문에 이 게임 모드를 정말 좋아서 플레이 하는 고객들은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높은 비용을 들여 만든 새로운 게임 모드가 한정된 고객들에 의해서만 플레이 되면 회사 입장에서는 손해 나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새 게임 모드는 최대한 많은 고객들이 플레이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게임 모드를 그렇게 만들기는 어렵지만 보상만은 최대한 많은 고객들이 반응할 만 하도록 설정합니다. 그래서 PvP를 원하지 않는 고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룩템을 PvP 보상으로만 설정하게 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조금 슬픈데 어쩌면 PvP에 반응하지 않는 고객은 이 게임의 핵심 고객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PvE에 주로 반응하는 덜 경쟁적이고 덜 공격적인 고객들은 그렇지 않은 고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게임 내 과금 체계에 덜 민감하게 반응하곤 합니다. 덜 경쟁적이기 때문에 더 강한 성장 동기, 더 많은 재화 보유 욕구를 가지기 어려우며 이에 따라 회사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과금 요소에 잘 반응하지 않는 집단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반면 PvP에 주로 반응하는 고객들은 상대적으로 경쟁적이며 공격적인 경우가 있는데 이 분들은 성장 동기가 명확하고 이 동기가 다른 고객들과 경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과금 요소에 더 잘 반응하는 편입니다.
회사는 한정된 자원으로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개발에 집중하게 되어 PvE나 비 전투 플레이에 의한 과금 요소를 연구하기 보다는 당장 이익을 낼 수 있는 고객 간 직접 경쟁 요소 개발에 집중하게 되며 이 결과로 좋아 보이는 룩템은 PvP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만듭니다. 같은 룩템을 PvE 보상으로 설정하면 모든 고객들이 룩템을 얻어 행복해지겠지만 룩템에 의한 수익은 낮아지고 PvP 보상으로 설정하면 PvP에 반응하는 고객들만이 룩템을 얻고 나머지 고객들은 행복할 수 없겠지만 회사는 상대적으로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룩템을 PvP 전용 보상으로 설정해 PvP를 원하지 않는 고객들을 행복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높은 비용을 들여 개발한 게임 모드가 보상을 통해 동작해 더 많이 플레이 되도록 하기 위해, 둘째. 지금 당장은 PvP 고객들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수익을 가져오므로 이들을 핵심 고객으로 설정하고 이들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