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우리가 걸작에 손 댈 수 있을까?

이전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레벨을 사용해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레벨을 수정해야만 할 상황에 처했고 걸작에 손을 대는 것이 올바른지 고민입니다.

감히 우리가 걸작에 손 댈 수 있을까?

벌써 4주가 지났습니다. 4주 전 이야기를 지난 첫 홀더 테스트를 마쳤습니다 (1), 첫 홀더 테스트를 마쳤습니다 (2)에서 소개하고 그 다음에도 여러 글에서 이를 인용해 다른 자잘한 에피소드를 설명하는데 여러 번 활용해 왔는데요, 그래서 우리들이 과거의 천재적인 업적에 손을 대는 행동이 과연 올바른지 고민한 이야기를 다시 여기서 시작하는 행동이 과연 올바른지 잠깐 고민했지만 과거의 천재들과 현대의 그리 똑똑하지 않은 우리들 사이를 비교하는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여기 만큼 적당한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현대에 게임 개발을 업으로 삼아 생계를 꾸려 가는 우리들이 과연 이 산업의 성장기에 그들의 천재성을 한껏 뽐낸 결과물에 손을 댈 생각을 하는 것이 올바른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그 시작은 지난 마일스톤 개발로 돌아갑니다. 처음 수립한 목표는 지금까지 (거의) 아무도 제대로 해 내지 못한 인게임 아바타에 기반해 만든 NFT를 구입한 홀더들이 실제 그들의 기계에서 동작하는 게임으로부터 NFT에 보이던 그 캐릭터가 그대로 게임에 뛰어다니는 경험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게이밍 NFT가 시장에 수없이 선보였지만 온전히 동작하는 게임에 연동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시도들이 NFT 시장에는 정통하지만 게임 개발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시도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생각보다 잘 하고 있다에서 현대에 쉽게 접하는 꽤 그럴싸한 게임을 만드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돈이 든다는 설명을 했는데 이미 확보한 자본, 투자처 없이 오직 NFT 판매만으로 얻은 수익으로는 그런 게임 비슷한 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평생 게임을 만들어 왔지만 새로운 시장에는 상대적으로 덜 익숙했는데 이 위험을 줄여 줄 단단한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스스로가 익숙한 제품 개발에 집중하면 되는 비교적 유리한 상황입니다.

게이밍 NFT가 직접 인게임에 살아 움직이고 이 빌드가 고객들의 기계에서 직접 동작하는 모양을 만드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NFT를 인게임에 연동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게 만들기는 했지만 결국 궤도에 오른 다음부터는 익숙하게 해 오던 개발을 계속하는 일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NFT 시장에서 유명한 아티스트의 NFT에 기반한 몬스터가 인게임에 나타나고 이 몬스터와 플레이어들이 전투하는 PvE 모드를 개발해 마일스톤을 마무리하고 홀더 테스트를 수행할 계획이었습니다. 근데 전투를 만들기 시작해 보니 익숙하게도 PvE를 만들고 있었지만 따로 제한하지 않은 이상 게임은 PvP로도 동작하고 있었습니다. PvE를 개발하며 팀 전체가 들어가 몬스터를 두들겨 패 클리어 하고 난 다음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슬슬 보다가 서로에게 무기를 난사하곤 했는데 멍석을 깔면 재미가 없어진다에 이 현상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한창 목숨 걸고 강력한 몬스터와 전투하는 도중에도 누군가 몰래 사람들 뒤에 나타나 뒤통수를 때리는 바람에 이유도 모른 채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웃긴 상황을 겪다 보니 이럴 바에는 비용 차이가 크지 않으니 PvE 뿐 아니라 PvP를 함께 넣어 빌드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는데 실은 비용이 그리 낮지는 않았습니다. 레벨은 과거에 유명한 레벨을 가져와 사용하면 우리가 직접 테스트를 반복하며 레벨디자인을 하는 비용을 극적으로 줄일 수 있었지만 PvE와 PvP는 플레이어들의 요구사항이 완전히 달라 서로 완전히 다른 무기 체계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담당자님들이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적극적으로 응해 주셔서 감사하게도 PvP를 별도로 넣어 보자는 의견이 마일스톤 목표로 설정되어 본격적으로 비용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첫 PvP 레벨을 뭘로 만들까 하다가 머릿속에 맨 처음 떠오른 레벨을 반사적으로 말했는데 그게 바로 Q3DM17입니다. 일단 과거에 퀘이크 하며 가장 오래 플레이 한 레벨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엄청나게 유명한 레벨이기도 해서 우리가 20년 넘게 지난 현대에 이 레벨을 빌려다 사용한다 하더라도 나쁘게 인식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팀에 몇몇 분들 역시 이 레벨을 적어도 수 백 시간 이상 플레이 했고 현대에 우리가 구축한 플레이가 이 레벨에서 동작하도록 하면 레벨디자인은 그대로 두고 우리 플레이를 구축하는데 집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레벨에서 오래 플레이 한 사람들은 이미 이 레벨의 전략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 플레이 구축에 훨씬 유리할 거라고 판단합니다.

한편 이 레벨을 모르는 분들로부터 딱히 시각적으로 좋아 보이지 않는 레벨을 사용하는 이유를 알려달라는 요구를 받으며 차라리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더 그럴싸해 보이는 레벨 에셋에 기반하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 레벨의 유명함과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고 그 역사적인 기반 위에 우리가 구축한 플레이를 올려 놓음으로써 우리가 얻게 될 개발 상의 이득, 그리고 고객들과의 의사소통에 유리하다는 점을 설명하자 모두가 이 레벨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잘 알게 됩니다.

Xociety-PvP

그렇게 이 PvP 레벨은 홀더 테스트에서 PvE 게임모드에 비해 훨씬 더 많이 플레이 됐습니다. 가장 걱정한 점은 애초에 이 레벨은 FPS 장르를 플레이 하는 레벨이었기 때문에 과연 TPS에서 잘 동작할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FPS를 더 좋아하는 입장에서 카메라 앞에 그게 나라고 할 지라도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이 있다는 점이 썩 익숙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이런 차이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플레이 하기 시작했고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객들도 비슷하게 테스트 기간 중 꽤 긴 시간을 PvP 플레이에 할애합니다. 물론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가령 시간이 없어 스폰킬을 막지 않아 어떤 고객들은 연속으로 스폰킬을 당하는 경험을 해야 했고 무기들이 PvP에 맞춰 충분히 튜닝 되지 않아 무기 사이에 유불리가 좀 있었습니다. 고객들 역시 귀신 같이 이런 문제점들을 눈치 챘지만 우리들이 처음으로 내는 빌드라는 점에 납득하고 전통적인 고객들처럼 우리들을 심하게 대하지는 않아 기뻤고 또 미안했습니다.

그렇게 첫 테스트를 마치고 다음 테스트를 준비하는 마일스톤을 시작하면서 다른 게임모드, 다른 필드를 도입하고 앞으로 게임의 순환구조를 정립하는 여러 구성요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와 동시에 이전에 PvP 레벨 하나를 제공한 것에 이어 다른 PvP 레벨을 제공하는 것도 목표 중 하나입니다. 고객들이 지난 테스트에서 해 주신 요청에는 FFA 외에 TDM 모드를 넣어 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 현대 멀티플레이 밀리터리 장르 상당수는 CTF에 기반한 TDM 스타일인 경우가 꽤 많고 지난 테스트의 Q3DM17에서 펼쳐진 FFA는 어떤 고객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경험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숨을 곳이 있는 레벨디자인, 그리고 실력차가 조금은 희석되는 TDM 모드를 주로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다른 개발과 함께 이번에는 어떤 다른 유명한 PvP 레벨 하나를 넣으면 좋을지 고민했는데 고객들의 요구사항에 맞춰 TDM 모드를 넣으려면 레벨 역시 이에 맞는 레벨이어야만 했습니다. Q3DM17만큼 유명한 멀티플레이 레벨은 여럿 있었지만 TDM에 맞는 레벨을 한번 걸러내고 나면 어떤 레벨을 사용해야 할지 상당히 고민되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레벨을 후보에 넣고 검토하기 시작했고 이 글을 타이핑하는 현재 레벨 하나를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각 레벨들을 검토하고 이들의 역사를 조사하다가 문득 우리가 하는 이런 행동이 과연 올바른지 잠깐 고민해 보게 됩니다.

The simple genius of Unreal Tournament map Facing Worlds

TDM을 위한 새로운 PvP 레벨 목록에는 언리얼 토너먼트에서 가장 유명한 레벨 중 하나인 ‘Facing Worlds'와 이로부터 파생된 ‘Face’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들은 CTF 레벨이어서 양쪽이 대칭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특징은 TDM에도 유용합니다. 개인적으로 퀘이크 멀티플레이에 DM17이 있다면 당시에 퀘이크의 나름 쌍벽을 이루던 언리얼 토너먼트에는 바로 이 레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상에서도 설명하지만 이 레벨은 작고 단순해서 빨리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번 익숙해지면 수 백 시간에 걸쳐 질리지 않고 플레이 할 수 있는 레벨입니다.

위키피디아에서 Facing Worlds 항목을 찾아 보면 레벨디자인이 이토록 단순해진 이유는 당시 언리얼 엔진에 멀티플레이어 레벨은 최대 160폴리곤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적 제한이 있었는데 가용 폴리곤 대부분을 타워에 집중하고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지형에는 최소한의 폴리곤 만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소한의 폴리곤만 사용해서 만든 타워 사이 지형은 중앙 부분을 향한 오르막으로 만들어져 있어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에는 상대 타워 꼭대기가 잘 보이지 않아 다른 아무 장치 없이도 상대 스나이퍼로부터 손쉽게 죽을 위험이 적습니다. 또 동시에 레벨 중앙까지 오르기 전에는 레벨의 나머지 절반을 볼 수가 없어 갈림길을 선택할 때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고 한 번 내린 선택에 따라 근접 전투와 원거리 전투가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달리 일어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레벨은 근본적으로 CTF 레벨입니다. 이 레벨이 동작하는 이유는 게임에 승리하려면 반드시 반대쪽에 있는 상대 타워까지 가서 깃발을 들고 산 채로 다시 아군 타워까지 돌아오기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레벨 규칙이 CTF가 아니라 일반적인 TDM이었다면 사람들은 그저 타워에 머물며 장거리 무기로 상대 타워를 공격하기만 하고 서로 레벨 사이 공간으로는 전혀 이동하지 않는 하품 나는 플레이만을 반복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레벨의 규칙은 CTF이기 때문에 스나이퍼는 단순히 탑 꼭대기에 캠핑 하며 느긋하게 다른 사람들을 죽여 분노를 받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상대 타워로 달려가는 아군을 엄호하는 동시에 상대 스나이퍼와 일대일 싸움을 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입니다. 단순한 구조이지만 양쪽에 같은 오르막 구조를 만들어 시야를 차단해 다양한 플레이를 유도하고 반드시 이 지형을 반복해서 이동해야만 하는 CTF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훌륭한 플레이를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장 CTF 모드를 만들 계획이 없고 일단 고객들의 요구에 맞춰 TDM을 만들 작정인데 레벨 구성은 TDM에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저 상대를 죽이기만 해도 승리할 수 있다면 위에서 설명한 대로 모두가 타워를 떠나지 않고 먼 거리에서 상대를 죽이기만 반복하는 하품 나는 플레이 밖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만약 이 레벨의 의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우리는 CTF를 만들어야 하고 또 만약 우리가 CTF를 만들지 않는다면 이 레벨에서 TDM이 동작하게 만들기 위해 TDM에 어울리는 플레이를 유도하도록 레벨을 수정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아니면 아예 다른 레벨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물론 ‘Facing Worlds’를 사용한다면 TDM이 일어나도록 레벨을 수정할 수 있을 겁니다. 가령 타워를 그대로 두되 최적의 자리에서 스나이핑을 하고 싶으면 위험을 감수하도록 장거리 무기의 위치를 타워 꼭대기에서 레벨 중간 어딘가로 수정해 타워에서 압도적인 플레이를 원한다면 반드시 레벨 중간에서 일어나는 지옥의 개싸움을 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또 폴리곤을 절약하기 위해 그저 오르막으로만 이루어진 양쪽의 지형에 아주 조금은 시야를 더 차단해 숨을 장소를 만들어 주고 직접 지형을 손대지 않더라도 퀘이크 스타일의 장거리 이동 경로를 추가해 TDM에서 공격 방향이 빠르게 전환 되도록 유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비용이 크지는 않지만 아마 이 레벨에서 TDM이 동작하도록 하는 수준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이 멀티플레이 장르의 태동기에 현대의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경험하는 이 플레이를 창조한 천재들이 만들어낸 이 결과물에 손을 대는 행동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에는 FPS에서 TPS로 바뀌기는 했지만 레벨에 손 대지 않았습니다. 레벨을 그대로 사용하고 다만 아직 만들지 않아 헬스, 아머, 메가헬스 같은 요소를 넣지는 못했지만요. 근본적으로 레벨 자체에 손대지는 않아 이전에 수 백 시간에 걸쳐 경험하던 플레이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이번에는 만약 이 레벨을 선택한다면 CTF 레벨에서 TDM이 일어나게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레벨에 손을 안 대고 개발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분명 방법을 찾아낼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고작 우리들이 천재들의 단순하고 완벽한 창조물을 더럽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아직 레벨을 확정하지 않았고 검토 중인 목록은 그리 짧지 않습니다. 아직 다른 가능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끼어 있는 천재들의 레벨은 감히 우리들이 이 아름다운 창조물에 손 댈 생각을 함부로 해도 될 지 고민하고 또 과거의 걸작을 보며 숙연한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또 걸작 앞에 고개를 숙이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