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벚꽃길

구례 벚꽃길

섬진강 자전거길은 애증의 코스입니다. 다른 많은 분들께서 경험이 좋다고 평하신 곳이지만 작년에 갔을 때 보급에 실패하는 바람에 중간에 강력한 봉크를 맞이했습니다. 이른 시각에 숙소를 잡아 쉬기 시작했지만 다음 날에도 컨디션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강진터미널에 도착한 다음날에는 풍경이고 뭐고 다 잊고 빨리 집에 가 쉬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섬진강 코스의 도장을 다 찍기는 찍었지만 기분 좋게 다시 한 번 달려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올해도 어김 없이 시즌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토요일에 정읍으로 가는 고속열차를 탔습니다.

정읍부터 강진까지

섬진강을 달리시는 분들은 보통 강진터미널에서 시작하곤 합니다. 작년에는 광양에서 시작해 남쪽 끝부터 북쪽 끝까지 달렸고 이번에는 그 반대로 달릴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진부터 가기에는 섬진강댐 근처에 있는 옥정호의 벚꽃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옥정호를 지나갈 생각으로 정읍부터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정읍역에서 강진까지는 약 40킬로미터 정도였고 교통량이 많지 않은 곳이라 국도를 달리기에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이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았습니다.

정읍역에서 정읍 경계까지는 북동쪽으로 이동하는데 여기에는 ‘구절재’라는 언덕이 있습니다. 경험 상 ‘령’으로 끝나는 오르막은 예상보다 오르기에 수월합니다. 고도가 높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길이가 길기 때문에 평균 경사도가 높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재’로 끝나는 언덕은 고도가 아주 높지는 않지만 길이가 짧아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오르기 더 힘들었습니다.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만났기에 망정이지 하루가 끝나갈 무렵에 만났다면 꽤나 고생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절재를 넘어 강진 방향으로 좀 더 진행하면 옥정호가 나타납니다.

옥정호는 그게 호수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도 상에는 분명 물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가 안 와서 꽤나 가문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곳은 아직 북쪽이기도 하고 또 지대가 높기도 해서인지 벚꽂치 ‘전혀’ 피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곳을 보려고 정읍부터 40킬로미터를 달려왔건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습니다. 물론 출발하기 전부터 ‘전체 200킬로미터 구간 중에서 어느 한 곳 정도는 꽃이 피었겠지!’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주’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구례 벚꽃길

그렇게 하염없이 섬진강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향가터널 근처 대가리에도 벚꽃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향가터널에 들어가기 전에 방향을 돌려 대가약수터 방향으로 갔습니다. 벚꽃이 피기 시작했지만 활짝 피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약수터 주변 길은 하얗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체력을 고려해서 대가리 방향으로 더 깊히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 정도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약수터 너머 길은 분명 종주 코스가 아님에도 멀리까지 갔다 오는 것이 분명한 다른 자전거 탄 분들을 보며 상상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오륙십 킬로미터를 더 진행해서 해가 슬슬 기울어질 무렵 구례 경계를 넘었습니다. 구례 경계에는 커다란 캠핑장이 있어 자동차와 사람이 길 위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어 썩 신나는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선 채로 사람을 이리 저리 피하는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구례군 경계 표지판을 딱 넘는 순간 갑자기 완전히 활짝 핀 벚꽃이 길 양쪽에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서 있는 겁니다. 그것도 잠깐 나타났다가 끝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여기부터 구례구역 근처까지 거의 십 몇 킬로미터 구간에 벚꽃이 어마어마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아침에 한 생각은 틀렸습니다. 커다란 언덕 하나쯤 여기 있었다고 해도 끝없이 늘어선 하얀 꽃잎이 무지막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며 힘을 얻어 거뜬하게 넘었을 겁니다.

순천 신성치킨

구례구역이 있는 순천시와 구례군은 섬진강을 가운데 두고 구례교를 건너 오갈 수 있습니다. 동네가 온통 벚꽃을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해 숙소를 잡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례구역이 있는 순천시 경계를 넘지 않고 구례군 안에서 가까스로 숙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먼저 이 동네를 자전거로 지나간 분들의 전설에 따르면 순천시 경계를 넘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신성치킨이라는 가게에서 파는 치킨이 엄청나게 맛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숙소에서 다리를 건너 순천시에 다녀오는 수고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정말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서 치킨을 팔았을 것 같은 가게입니다. 아주머니 혼자서 장사를 하고 계신데 가게 분위기가 딱 그 뭐랄까, 프렌차이즈의 마수가 닿지 않았을 것 같은 뭐 그런. 치킨을 주문하자 그 때부터 채소를 썰고 튀김옷을 새로 만들고 있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배고픔에 슬슬 현기증이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치킨이 나왔습니다. 그걸 들고 다시 구례군으로 돌아가는 다리 위에서 자신이 한없이 외롭게 느껴졌지만 결국 길바닥에서 치킨을 먹는 추함을 피해 숙소가 있는 구례군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했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치킨, 맛있습니다. 올해 이화령에 갔다가 동네 프렌차이즈 치킨집에 절망했던 자신이 한없이 우스워질만한 그런 맛이었습니다. 그딴 치킨에 내가 돈을 냈다니! 구례군에 오시면, 순천시에 오시면 신성치킨을 찾아가 보세요. 참고로 배달은 안합니다. 오후 아홉시 까지입니다.

결론

사실은 다음 날 널럴하게 광양까지 가려던 계획은 준비 없이 갑작스레 맞이한 비 덕분에 화개에서 마무리했습니다. 주륵주륵 내리는 비를 뚫고 어깨에 벚꽃을 하나 가득 얹은 채로 화개 터미널에 가서 여섯 시간 뒤에 출발하는 버스 표를 끊고 월급 밀린 표정을 지어봤지만 끝없이 펼쳐진 벚꽃길과 인생급 치킨 한 마리에 이번 섬진강 종주는 때를 맞춰 또 오고 말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