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잘 계획하면 나중에 큰 수정을 피할 수 있을까?
외부에서 볼 때 영화 업계는 탄탄한 계획과 실행을 통해 많은 비용을 절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게임 개발의 속성은 약간 달라 보입니다.
2024년 초 현재 지난 해고 이후 계속해서 구직하고 있습니다. 회사에 소속되어 한 프로젝트에 집중하다 보면 업계 전체를 보는 시야가 줄어들 뿐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의 폭도 줄어들어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게 됩니다. 또 지금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역시 잘 모르게 되곤 합니다. 그런데 면접을 다니다 보니 한 다리 정도를 건너면 연결되는 분들과 만나기도 하지만 때때로 완전히 모르는, 그리고 도통 연결점을 찾을 수 없는 분들과 만나 이야기 할 기회가 생깁니다. 면접은 주로 제가 질문을 받아 답하는 자리여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는데 종종 지금까지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어느 정도 순발력을 발휘하곤 하지만 종종 일단 어떻게든 답변을 한 다음 질문을 머릿속에 잘 갈무리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지난 39호 커버스토리 지원 동기: 현대 MMO 디자인에 대한 갈증 끝부분에 소개한 내용이 이런 면접에서 들은 질문을 돌아오는 길에 고민하는 과정입니다.
이전의 한 망한 면접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가요?라는 질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설명하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때 한 답변은 좀 더 큰 역할을 맡기기 위한 사람을 뽑기 위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물론 좀 더 예쁘고 거창한 성취를 목표로 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목표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게임을 개발하고 출시하는데 큰 욕심이 있지만 궁극적이라고 말할 만한 반짝이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더 높은 사람이 되어 의사결정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곤 하며 여전히 팀에 속해 제가 해 온 삽질을 팀이 반복하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만약 가성비가 너무 나빠져 더 이상 개발팀에 속하지 못하거나 아예 게임 회사에 속하지 못하게 되는 때가 온다면 여전히 제가 해 온 삽질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 경험을 알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솔직한 답변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 역할을 했을 거라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편 같은 바로 그 망한 면접에서 들은 질문 중 하나는 '미리 잘 계획하면 나중에 큰 수정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질문을 듣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제가 초반에 만들었던 여러 요소가 뒤에 가서 크게 수정될 수 있고 이에 따라 제한된 기간 안에 개발을 마무리 해야 하는 상황일 때 거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으로 만약 프로젝트 초반에 미리 잘 계획하면 흔히 겪곤 하는 막판의 거대한 수정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이 질문을 받고 순발력을 발휘해 답변을 한 다음 시간이 꽤 지난 다음 다시 생각해 보는 상황이지만 답변의 핵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답변의 핵심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상업 프로젝트에 천재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모여 개발하는 이상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반에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막판의 거대한 수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계를 거꾸로 좀 많이 돌려 첫 회사의 첫 프로젝트로 돌아가 지금 시대 기준으로 말하면 디렉터, 당시 기준으로 말하면 기획팀장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데 정확히 어떤 상황에 나왔는지는 잘 기억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발을 진행하며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고 이에 따라 기획팀은 급하게 기획서를 통해 사양을 재 정의 해야 했으며 이를 받은 협업 부서들은 왜 이제 와서 이런 변경이 일어나야 하는지 기획팀에 큰 불만을 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회사 역시 서비스 시점이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이런 큰 수정 때문에 출시 까지 관리해야 할 위험이 증가하는 상황에 대해 그리 좋은 눈초리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기획팀장님은 뭔가 이야기 끝에 ‘지난번에도 이랬는데 이번에 또 이렇게 됐다’면서 - 우리가 만들던 게임은 전작의 후속작이었음 - 다음에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 처음 수 개월 동안은 오직 기획서를 작성하는데 집중하며 탄탄한 계획을 수립한 다음 진행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 온갖 요구사항 변경에 대응해 급하게 문서를 만드는데 지쳐 나가 떨어지기 직전이던 저 역시 그런 말씀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여러 경험을 하며 이 생각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게임 만드는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사례를 보며 변변한 계획 없이 시작한 프로젝트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간접적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기억에 의존해 설명하면 이 프로젝트를 완료하는데 큰 돈이 들었지만 이 돈의 상당 부분은 기약 없이 스탭들을 현장에서 먹이고 재우는데 들어갔다고 합니다. 영화는 어처구니 없는 완성도로 이를 본 사람들을 좌절시켰다고 하는데 당시 군대 갔다가 휴가 나온 아는 분이 이 영화를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 심각하게 바로 복귀할지 고민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한국 영화의 증흥기가 찾아왔고 이 때 널리 알려진 몇몇 감독님들은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극본을 완성하고 스토리보드로 전체 제작 계획을 완전히 준비한 다음에야 촬영을 시작해 제작 기간을 크게 단축하고 이에 소요되는 비용 역시 크게 낮췄다고 알려집니다. 또 게임을 만들다 보니 여러 가지 이유로 제작 비용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을 자주 만납니다. 팀과 프로젝트에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게 만든 10년의 밤에 소개한 상황 역시 이런 제작 비용이 크게 낭비되는 상황 중 하나입니다. 이후 영화가 끝날 때 스탭롤을 자세히 살펴보며 어떤 파이프라인을 통해 제작되는지 파악해 보려고 노력했고 상당히 많은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비슷한 스탭롤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보고 이들은 분명 어느 정도 잘 수립된 계획과 파이프라인을 통해 제작되고 있으리라는 환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게임 프로젝트 역시 여느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와 별로 다르지 않지만 게임 프로젝트가 나머지와 조금 다른 점은 개발을 시작할 때 소프트웨어에 대한 요구사항이 불분명하다는 점입니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촬영을 진행하며 그 다음 계획을 그때그때 수립하고 이에 따른 촬영이 마음에 들지 않은 상태로 끝나면 또 다시 이를 보강한 계획과 촬영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 엄청난 비용을 낭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게임 역시 처음에는 경영진을 설득할 수 있는 수준의 계획으로부터 시작해 코어 메커닉의 프로토타입을 개발해 아이디어 실증 단계를 거칩니다. 그 다음 프리프로덕션 단계를 거치며 코어 메커닉을 온전한 게임 체계 안에서 플레이 할 때 의미 있는지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프로덕션 단계에서 버티컬 슬라이스를 완성해 완결된 경험을 검증합니다. 이 단계를 거치면 버티컬 슬라이스를 기반으로 컨텐츠를 늘리는 매스 프로덕션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 과정 중 시장 상황이 변하고 고객들의 주요 취향도 변하며 완성된 빌드의 상태에 따라 타겟 고객을 바꿔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변경된 시장 상황, 고객들의 취향이나 상태, 회사 상황 등이 빌드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이 때 계획이 변경되어 이전에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요구사항이 튀어나와 개발 비용을 크게 증가 시키기도 합니다.
첫 프로젝트의 기획팀장님께서 하셨던 말씀으로 돌아가 만약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숙고 기간을 거친 단단한 계획을 준비해 기획서 모양으로 만들어 두면 프로덕션에 들어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까요?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고 또 현대의 온라인 게임처럼 좀 더 복잡한 상황을 상상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업계 태동기에 업계 전체를 이끌며 이 산업을 만들어낸 천재들이라면 몰라도 그들이 떠나고 이제 보통 사람들만이 남은 상황에서 눈앞의 문서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이를 대비한 또 다른 계획을 온전히 수립할 수 있는 사람은 없거나 거의 없을 겁니다. 미래를 충분히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이상 이들이 모두 동의하는 계획과 실행을 위해서는 결국 큰 맥락은 일치하겠지만 확실하지 않은 계획 하에 실제 개발을 진행해 만들어진 결과를 직접 만져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결과가 옳다면 그 다음 단계 계획을 수립해 진행하고 결과가 예상과 다르다면 다른 이유를 찾아내거나 다시 이 단계를 반복해야 합니다.
시스템디자인을 업으로 삼는 입장에서 계획이 변하는 상황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설계 자체를 좀 더 유연하게 만들고 또 의도를 정확히 반영하는 가장 간결한 설계를 제안해 협업 부서에서 이를 개발했다가 이 결과가 옳지 않음이 밝혀지더라도 서로 최소한의 비용을 사용하게 만드는데 집중하려고 합니다. 업계 태동기의 천재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제 자신을 포함한 보통 사람들의 보통 머리를 모아 고객들께 의도한 경험을 주는 제품을 만들려면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이 과정에 필요한 비용을 줄이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지난 망한 면접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와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업계에서 짧지는 않은 경력을 쌓은 사람으로부터 기대한 답변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시스템디자이너 말고 게임디자이너로써 평생에 만들고 싶은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든지 좀 더 형이상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편이 옳았을지도 모흡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저는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팀에서 모호한 요구사항을 실행 가능한 계획과 설계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시스템디자이너입니다. 경력의 거의 거의 대부분을 이 역할을 하며 보내다 보니 이 역할의 범위 안에서 장기적으로 프로젝트를 성공 시킬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지금의 관점에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다시 강남구 어딘가의 되게 유명한 오프라인 서점 근처에 있는 건물의 면접이 진행 중인 한 회의실로 돌아가 “미리 잘 계획하면 나중에 큰 수정을 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해 보겠습니다. 아니요. 우리들의 상상력은 제한적이고 업계 태동기에 종종 팀에서 볼 수 있었던 천재들은 이제 모두 떠나고 지금은 보통 사람들만 남은 상황에서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예상한 결과를 직접 만들어 만져보기 전에는 올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개발을 통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고 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을 최소화 하기 위해 확장성 있고 의도를 만족하되 최대한 간결한 설계를 반복해 시행착오 비용을 최소화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번외로 이 글을 타이핑 하다가 든 생각은 어쩌면 이런 관점의 게임 개발은 항공기를 개발하는 과정과 비슷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항공기를 개발할 때 한번에 모든 부분을 개발하지 않고 이 항공기에 도입하는 기술을 실증하는 단계를 거칩니다. 가령 새로운 날개 모양을 작게 만들어 풍동 시험을 거쳐 특징을 이해하고 또 스케일이 큰 다른 부분 역시 작게 만들어 가능성을 확인한 다음에야 시제기를 생산하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현대에 시뮬레이션 기술이 발전해 이런 단계에 들어가는 비용은 감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개념 실증 단계가 필요하며 이 때 실증에 실패하면 이 단계에 이르는 과정을 반복해야 합니다. 한 번에 온전히 동작하는 항공기를 개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항공 업계에서 일하는 천재들조차 상상하거나 예측하지 않고 실험을 통해 아이디어를 증명하고 있는데 고작 우리들이 과연 개발해 직접 만져보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