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의 시대와 나의 시대
책 둠의 창조자들을 읽으며 이들의 전성기와 현대 사이의 연결과 변화를 돌아봤습니다. 그들의 업적 위에 현대의 가상 세계가 서 있습니다.

지난 존에게 진 빚과 왜 존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를 통해 책 둠의 창조자들을 읽고 든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한 존에게는 그 시대에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여러 게임을 플레이 했으면서도 정작 그 시대에는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아 이를 금전적인 빚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스팀을 통해 이드소프트가 개발한 모든 게임을 구입했지만 이 돈이 결코 존에게 가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고 어떤 방법으로도 이 빚을 갚을 수 없을 겁니다. 존 덕분에 삼차원 일인칭 슈터 장르의 레벨디자인에 감을 잡을 수 있게 됐고 또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게임 엔진을 접하면서도 바로 익숙해질 수 있는 기반을 준비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일인칭 슈터 장르가 그들의 회사 이름 만큼이나 인간의 근본적인 자극과 반응 모델에 가까운 장르라는 점을 게임을 설계할 때 잊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존에게는 이전에도 실망스러운 점이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책을 통해 실상은 그보다 더 실망스러우며 제가 이 존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해 온 퀘이크 레벨이 실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는 현실 앞에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은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드를 나온 다음에 한 행동들은 현대에도 종종 프로젝트에 일어나 모두들 최선을 다 해 개발했지만 결국 런칭과 라이브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성공적으로 런칭하더라도 거기에 든 고생을 생각하면 그렇게 까지 고생하지는 않아도 됐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오늘은 둠의 창조자들을 읽고 든 생각을 소개하는 글의 마지막으로 두 존이 게임을 개발하며 산업에 거대한 영향을 주고 이를 플레이 한 사람들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주던 그 시대와 현대 한국에서 겪는 개발 환경을 함께 생각해 보며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또 그 장르와 우리들이 주로 만드는 장르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만약 그들이 조금 더 이 산업에 남아 있었다면 그들이 지금 우리가 주로 만드는 장르에도 영향을 혹시 줄 수 있지 않았을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왜 존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에서 그 시대에도 결코 적지 않은 엄청난 개발비와 현대 기준으로는 그리 크다고 말하기 쉽지 않지만 당시로는 아주 많은 인원으로 개발했음에도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한 원인을 살펴봤습니다. 근본적으로 회사의 고위 의사결정자로써 그 위치에 있을 만한 역량과 산업의 변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 오직 유명세를 이용해 펀딩을 받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프로젝트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이야기하면 고위 의사결정자로써 게임에 올바른 요구사항을 정의하지 않았고 전형적인 잘못된 요구사항을 말했습니다. 또 스스로 시작부터 허리가 없는 개발팀을 만들어 고위 의사결정자와 경험이 거의 없는 주니어들이 직접 이야기하며 개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핵심 기술을 보유하지 않았으면서도 기술에 대한 의존성과 기술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는데 이는 그가 이 시점에 더 이상 이 산업에서 고위 의사결정자로써 갖춰야 할 근본적인 능력이 부족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최초는 아니었지만 두 존은 비디오 게임 산업에 삼차원 일인칭 슈터 장르가 대중적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고객들은 이 장르가 처음부터 하프라이프나 콜오브듀티 같은 게임으로 시작했다면 그토록 강렬하게 반응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또 같은 형식에 성장 요소를 도입한 롤 플레잉 게임을 만들었더라도 썩 성공적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반면 존은 네트워크를 통해 실행되는 멀티플레이를 만들었고 비록 레벨디자인과 무기는 이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 퀘이크에 이르도록 데스매치 플레이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게임에서 괴물이나 나치 대신 실제 다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을 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을 극도로 흥분하게 만들었습니다. 세 가지 신화에서 어쎄신크리드 발할라를 플레이 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게임에는 중간에 그들이 생각하는 발할라에서 더 이상 죽지도 늙지도 않는 환경에서 그들이 가장 즐거워하던 전투를 끝없이 반복하는 세계가 등장합니다. 이전에는 잉글랜드에 처음 발을 디딘 바이킹들이 눈앞의 적들을 도끼로 두 동강 내며 세력을 넓혀 가며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즐겼지만 막상 이들은 적을 상대할 뿐 같은 편 끼리 싸워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스토리 상 가상의 발할라에 들어가 드디어 서로 죽지 않고 또 고통을 느끼지 않는 환경에서 비로소 같은 편 끼리 도끼를 휘두르며 싸워 볼 기회를 얻습니다.
네트워크를 통한 데스매치는 마치 이런 환경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더블 배럴 샷건을 실제 세계에서 사람을 향해 쏘려면 이에 따르는 엄청난 책임을 각오해야 합니다. 아주 드물게 이런 행동이 용인 되는 특수한 상황이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자기 자신의 부상, 이로 인한 고통과 죽음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반면 게임 상에서는 더블 배럴 샷건을 들고 사람을 쏘고 상대가 피를 흘리며 죽더라도 실제로는 아무도 죽지 않고 또 아무도 다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상대가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거나 분노한 나머지 키보드를 내리 치며 신체적 고통을 느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실제 더블 배럴 샷건을 들고 서로에게 쏘는데 비해 훨씬 적은 비용과 훨씬 적은 위험 만으로 게임 속 가상 공간을 달리며 상대에게 총알을 날려 댔고 이 쾌락, 그리고 이 쾌락에 대한 댓가는 마치 어쎄신크리드 발할라에 묘사된 발할라와 같지 않은가 싶습니다. 데스매치는 좀 더 발전해 실제 세계의 전투와도 비슷한 TDM, 실제 세계의 깃발뺏기와 비슷하지만 한 손에는 깃발, 다른 한 손에는 로켓을 들고 플레이하는 CTF, 그저 눈 앞의 상대를 반사적으로 쏘는데서 발전해 좀 더 넓은 공간에서 전략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언리얼 토너먼트의 Onslaught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전합니다. 이는 좀 더 본능에 가까운 영역에 집중하느냐, 아니면 좀 더 전략적인 영역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수준의 욕구를 수용하는 다양한 게임모드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둠의 창조자들 끝부분에 언급되는 삼차원 공간에서 본능에 가까운 플레이를 만들어내고 네트워크를 통해 이를 동기화 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아직 무엇을 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온라인에 삼차원의 영속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이때까지 사이버스페이스나 메타버스 같은 이름으로 언급되던 그 존재를 실제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퀘이크 3과 언리얼 토너먼트가 나오던 그 시점으로부터 훨씬 이전에 전통의 이차원 그래픽에 기반한 영속적인 세계를 제공하고 이 곳에서 자기 자신을 대변하는 캐릭터를 움직이고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성장 시켜 나가는 게임이 출시 되어 있었습니다. 삼차원 일인칭 슈터 관점에서 이들은 그리 신경 쓸 만한 게임이 아니었을 수 있지만 온라인에 영속적인 세계를 만든다는 아이디어 측면에서는 이미 영속성이 있는 온라인 세계에 사람들이 접속해 생활하고 성장해 가며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와 이미 맞닥뜨려 이들 각각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영속성이 있는 삼차원 온라인 공간은 삼차원 기술을 적용하는 관점에서는 책에 나타난 시대에서 미래의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영속성이 있는 이차원 온라인 공간은 이미 이 시점에 수 년에 걸쳐 서비스 되고 있어 기술적인 도전 뿐 아니라 사회적인 도전, 그리고 공간의 영속성 유지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움직임은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진행되어 온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삼차원 온라인 게임에서 마주쳤고 2천년대를 수놓은 수많은 ‘온라인’ 접미사를 붙인 온갖 양산형 게임의 출시로 이어집니다. 이 시대에는 과거 이차원 MMO 장르의 상대적으로 단순한 규칙에 기반해 삼차원 그래픽을 사용하면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경험을 줄 수 있으리라고 봤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이전에 연속된 스프라이트로 나타나며 이를 내 머릿속에서 재구성한 세계를 통해 현실감을 느낄 수 있었던데 비해 삼차원 MMO 장르는 본격적으로 내 캐릭터가 공간 상에 나타나고 세계와 상호작용 할 수 있으며 비록 더블 배럴 샷건을 쏘던 삼차원 공간에서 익숙한 방식과는 조금 달랐지만 다른 플레이어와 상호작용 할 수도 있었는데 이 경험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고객의 머리 속에서 현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반드시 요구하던 이전과 달리 삼차원으로 구성된 새로운 세계는 현실의 재구성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 하는 사람에 따라 좀 더 깊은 몰입을 위해 삼차원으로 나타난 가상 현실을 머리 속에서 재구성하기도 했지만 화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굳이 머리 속에서 이를 재구성하지 않아도 세계는 여전히 그럴싸했고 그 안의 상호작용을 통한 생활 역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변합니다.
데스매치가 아무런 설정이나 이를 대비한 무기 설계, 레벨디자인 없이 그저 상대를 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동작했던 것과 같이 초기 MMO 게임 역시 세계가 있고 그저 그 세계,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상호작용 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동작했습니다. 그저 세계의 시각적인 측면을 보고 각자가 더 깊은 스토리를 생각하고 이를 기반으로 다른 플레이어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간단한 구조만으로도 세계의 영속성이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은 다른 플레이어, 그리고 세계와 좀 더 다양한 규칙을 통한 상호작용을 원했고 또 이 시대에 오직 세계만이 가지던 영속성을 플레이어 하나하나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의 영속성은 그들 각각의 성장과 성장에 대응하는 세계를 통해, 그리고 다양한 상호작용은 플레이어, 몬스터, 채집물, 건물, NPC 같은 다양한 방식의 상호작용 대상과 확장되는 세계를 통해 달성합니다. 이제 플레이어들은 삼차원 MMO 게임을 통해 괴물, 다른 플레이어들과 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NPC와 대화하고 채집물을 획득하고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재화를 축적할 수도 있게 됐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흘러 영속적인 세계가 지겨워질 무렵 세계의 확장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모험에 도전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영속성을 가지는 주체는 기존 세계에서 플레이어로 확장됐고 상호작용 가능한 대상이 늘어났으며 플레이어의 성장과 이에 대응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MMO 장르의 규칙은 이전에 비해 훨씬 복잡해집니다.
삼차원 일인칭 슈터 장르로부터 시작된 삼차원 MMO 게임을 극적으로 복잡하게 만든 두 가지 사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게임에 본격적으로 퀘스트가 도입된 것입니다. 롤플레잉 게임에 퀘스트는 당연하지만 삼차원 MMO 장르 초기에는 그저 상호작용할 세계와 다른 플레이어들 만으로 세계에 영속성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세계와 상호작용 할 다양한 방법을 원했고 세계 곳곳에서 세계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알고 싶어 했으며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기를 원합니다. 이전에도 같은 게임을 플레이 하더라도 머리 속에서 재구성 과정을 거치며 세계를 좀 더 현실적으로 인식해 몰입하는 고객들이 있었지만 모든 고객들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후자들은 게임이 좀 더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현실을 구성해 주기를 바랬고 퀘스트는 이런 요구사항에 대응할 적당한 방법입니다. 다만 싱글플레이 게임에서 퀘스트를 개발할 때와 달리 멀티플레이 환경의 퀘스트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도전거리였습니다. 퀘스트는 세계와 플레이어가 상호작용 하는 한 가지 방법인데 싱글플레이 환경에서는 상호작용 요소를 독점 사용할 수 있었지만 멀티플레이 환경에서는 세계의 거의 모든 요소를 독점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령 대장장이 NPC와 대화하려고 할 때 대장장이가 다른 플레이어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야 했고 또 마을 바깥에 몬스터를 처치하러 나갔지만 이미 누군가 몬스터를 모두 쓸고 지나가 몬스터가 하나도 없는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멀티플레이 환경에서 퀘스트를 제공하며 이 장르는 이전에 비해 복잡도가 높아집니다.
다른 하나는 닫힌 세계에서 아주 빠르게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에 의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플레이어 사이에 직접 거래 기능을 제거하고 모든 거래를 중앙 통제 기반의 시스템으로 바꾸고 게임의 각 부분에 통용되는 화폐를 서로 달리 설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임의 여러 부분에 서로 다른 화폐가 통용되도록 한 이유는 왜 현대 게임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재화를 사용하나요?와 수많은 재화를 지탱하는 보조 장치를 통해 소개한 적 있으니 넘어가고 플레이어 사이의 직접 거래를 없애고 중앙 통제된 일종의 거래소를 통한 방식으로 제한한 이유와 효과를 설명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플레이어 간에 직접 아이템과 골드를 거래하는 기능은 실제 세계의 규칙과 비슷해 게임에 도입하는데 별 의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래된 MMO 게임에서 게임을 처음 시작한 플레이어가 처음부터 강한 장비를 얻어 던전을 쓸고 다닐 수 없기에 처음에는 돈을 모아야 했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가령 숲 속 깊은 곳에 들어가면 나타나는 좀비를 쓰러뜨리면 이들이 가지고 있던 골드를 조금씩 획득할 수 있습니다. 또 좀비는 금에 이끌리게 되어 있어 시간이 지나면 금광 가까운 곳에 좀비들이 모여 있어 이들을 효율적으로 쓰러뜨릴 수도 있기도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사람들이 원하는 자원을 직접 채집한 다음 판매하는 것인데 가령 게임 상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려면 목재가 필요합니다. 게임을 좀 플레이 한 사람들이 목재를 원했지만 목재를 얻으려면 직접 숲 속에 들어가 오랜 시간을 들여 나무에 직접 도끼를 휘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에 소지할 수 있는 물건의 무게에 제한이 있어 적당한 시점마다 나무를 들고 마을에 돌아와야 했고 덕분에 마을에서 가까운 숲은 남아나질 않습니다. 또 직접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하기에 다른 플레이를 하면서도 목재를 획득할 방법이 필요해졌는데 개인 간 거래는 서로의 필요를 해결하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게임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딱히 할 만한 플레이가 아직 없는 상태여서 숲 속에서 시간을 들여 나무를 베고 이를 판매하면 꽤 빠르게 골드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던전 안에 있는 철이나 구리 같은 자원에 비해 나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필드에 널려 있어 마을을 오가는 귀찮음과 끝없이 도끼를 휘둘러야 하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면 꽤 일정한 골드를 예측 가능하게 획득할 수 있어 게임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에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 개인 간 거래 기능이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는데 게임 개발자는 게임을 처음 사용한 사람들을 위해 아무 것도 개발하지 않았지만 이들의 문제는 시장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하지만 이 규칙의 문제는 닫힌 게임 세계에서 인플레이션이 게임 전체로 너무 쉽게 퍼지고 이를 제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영속적인 가상 세계는 실제 세계와 같이 닫힌 세계여서 인구가 늘어나고 이들이 여러 자원의 부가가치를 높이면서 경제가 더 빨리 확장됩니다. 실제 세계 역시 근본적으로 닫힌 세계이지만 화폐와 생산물이 이동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세계 어느 한 곳에서 발생한 경제 문제가 세계 전체로 퍼지는데 시간이 걸리며 때때로 이 시간이 아주 길어져 한 곳에서 문제였던 현상이 다른 곳에서는 문제가 아닌 모양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또 세계 전체가 균등하게 발전하고 있지 않아 한 곳에서 생산한 부가가치를 그 곳에서 모두 소모할 수 없더라도 발전 상태가 서로 다른 곳으로 가치가 이동하며 인플레이션을 제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실제 세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화폐와 생산물이 점점 더 빨리 흐르며 어느 한 곳에 발생한 경제적 사건이 전 세계로 순식간에 퍼지게 됐는데 게임 속 가상 세계는 플레이어 간의 직접 거래를 허용한 처음부터 이런 문제를 겪었습니다. 고객들은 게임 상에서 시간 당 효율이 좋은 활동을 귀신 같이 찾아냈고 이를 반복하며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골드를 생산해 냅니다. 골드는 개인 간 거래를 통해 게임 전체에 퍼지고 게임 전체에 걸쳐 물가가 상승합니다. 가령 이전에는 목재 한 다발을 500골드에 살 수 있었다면 이 가격이 조금씩 오르다가 어느 시점에는 550골드가 되는 식입니다.
문제는 게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한 번 인플레이션이 게임 전체에 퍼지기 시작하면 이를 막을 방법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그나마 수직 성장 요소를 투입하고 이를 이전의 게임 규칙 및 세계와 경제적으로 격리 시켜 상황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수직 성장 요소와 경제적으로 격리된 같은 세계에서 동작하는 사실상 경제적으로 다른 게임 레이어를 얹는 테크닉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되기 이전에 게임 내 인플레이션은 한 번 시작되면 막을 수가 없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인플레이션을 막아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하수구 메커닉에 대해 논의하고 온갖 실험을 거쳤습니다. 골드가 예상보다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 대비해 게임의 온갖 행동에 골드를 소모하게 만들었는데 가령 이전보다 장비를 수리하는데 더 많은 골드를 요구하고 이벤트에 의해 장비의 가치를 비가역적으로 낮춰 고객들을 열 받게 만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나중에는 하수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거의 게임 상에서 숨만 쉬어도 골드가 필요해 플레이어들이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강력한 디플레이션 상태에 빠지는 사례도 나타납니다. 이 사례를 만든 분과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며 이 상태에 도달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개인 간 거래 기능을 제거하고 중앙에서 통제하는 거래소를 거치도록 만드는 순간 가장 근본적으로 아주 탄탄하고 근본적인 하수구를 확보합니다. 바로 거래 수수료입니다. 현대에 구글과 애플이 하는 것처럼 거래소를 통해 거래가 일어날 때 거래 비용의 30%를 부과하면 어떤 재화라도 거래소를 통과할 때마다 가치가 감소해 숨만 쉬어도 골드가 나가는 고객을 열 받게 만드는 지독한 하수구를 설계할 이유가 이전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또 게임 상에 인플레이션 압력이 생길 때 아주 급한 상황이라면 거래소를 일단 닫은 다음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벌 수도 있고 거래소에서 수수료율, 거래량을 조절해 압력을 낮출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접 거래에 개입해 화폐가치를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할 여지도 있습니다. 이는 현실 세계의 경험과 동떨어진 방법이어서 초기에는 잘 받아 들여지지 않았지만 현대에 일어나는 어지간한 거래는 거래소를 통하는 거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령 당근을 통해 거래하면 실제 화폐와 물건의 거래는 실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지만 이 과정에서 화폐는 대부분 계좌이체, 당근페이를 통해 일어나 추적 및 개입할 수 있는 형태로 이동합니다. 또 신용카드 시스템을 통해 단일 쇼핑몰을 통해 물건을 주문하는 과정은 거래소의 동작과 아주 비슷합니다. 때문에 현대에 거래소는 이전과 달리 실제 세계의 규칙과 비슷해졌습니다.
멀티플레이 환경에 퀘스트 도입, 그리고 거래소를 통한 통제된 거래는 이전에 비해 게임의 복잡도를 극적으로 높힙니다. 이 시점이 지나며 이전의 훨씬 단순한 형태였던 삼차원 MMO 게임은 이제 퀘스트와 이를 보조하는 영속적인 세계 관점에서 일관되지 않은 온갖 개인화 규칙, 그리고 인플레이션 압력을 제어하기 위해 거래를 통제하고 게임의 여러 시스템에서 서로 호환되지 않는 화폐단위를 사용하게 하며 이전에 비해 훨씬 자잘한 온갖 기능이 필요해집니다. 특히 수직 성장 요소를 지속적으로 도입해 컨텐츠 소모와 인플레이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서로 다른 화폐단위와 성장 규칙을 통해 같은 영속적인 세계를 공유하는 같은 게임 상에 서로 호환되지 않는 상당히 다른 경제 레이어를 올려 이들이 같은 게임 안에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동시에 동작하게 만들면서 이를 한 번에 설계하기조차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현대 MMO 게임을 만드는 일은 개인적으로 이를 직업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마치 같은 삼차원 세계에 서로 거의 상호작용 하지 않는 두 가지 다른 차원을 설계하고 이들이 각각 온전히 동작하며 제한적인 상호작용 규칙에 따라 이들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세계를 설계하는 것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책 끝부분에 시작될 것 같았던 존의 기술에 기반한 삼차원으로 만들어진 영속적인 세계는 삼차원을 제외하면 이미 존이 한참 산업에 엄청난 영향을 행사하던 시대에도 현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단순한 형태로 이미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존이 이 산업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가 저물고 본격적인 영속적인 세계들로부터 실제 세계에 일어난 것과 똑같은 온갖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규칙, 그리고 머리 속에서 세계를 재구성하기를 원하지 않는 고객들을 위한 영속적인 세계 관점에서 일관적이지 않은 온갖 규칙을 추가하며 이전 시대에 비해 존이 생각한 삼차원 기반의 영속적인 세계의 복잡도는 훨씬 높아집니다. 종종 천재적인 엔지니어 한 명과 소수의 스탭이 극도로 효율적으로 일하며 개발한 결과가 산업 전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가능성이 있던 낭만적인 세계를 생각하면 현대는 조금 삭막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만든 영속적인 세계는 시스템 관점에서 이전에 비해 훨씬 영속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모든 고객들이 더 이상 세계를 재구성할 필요가 없고 또 화폐단위의 격리를 통해 이전에 비해 플레이어들 사이에 상호작용 할 방법이 훨씬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며 먼 옛날 저 자신, 그리고 제 인생의 일부에 큰 흔적을 남긴 바로 그 경험을 창조해낸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들이 삼차원 그래픽 기술의 기반을 정립하며 미래에 영속적인 세계의 가능성을 부여한 채 무대에서 내려온 다음 시간 상 바로 그 뒤를 이어 그들이 상상한 영속적인 세계를 설계하고 개발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며 그들이 상상했을 세계에 비해 훨씬 더 복잡도 높은 세계와 씨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한 존은 현대 삼차원 그래픽의 기반을 만들어냈고 다른 존은 그 끝이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제가 하고 있는 업무를 포함한 직군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은 영속적인 세계가 시작되는 바로 문 앞까지 도달했지만 그 문을 넘지는 않은 채 무대를 떠났고 그 다음에 우리들이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습니다.
둠의 창조자들을 읽으며 이들의 전설이 그저 전설이라고만 이야기할 만큼 먼 과거에 있지 않으며 의외로 그들의 시간과 우리들의 시간, 그리고 그들의 비전과 우리들의 비전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존들은 무대를 떠났지만 그들이 상상한 삼차원의 영속적인 세계는 우리들이 지금까지도 여러 변화를 거치며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