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구
나치 독일의 메포어음은 라이히스마르크와 분리된 레이어에서 5년 동안 화폐 노릇을 하다가 끝내 상환되지 않았습니다. 크립토커런시도 게임 안의 골드도 같은 구조의 약속입니다. 셋의 운명을 나눈 것은 믿음이 아니라 위층 화폐로 바꿔 줄 창구가 열려 있었는지였습니다.
1933년 베를린에 금속연구회사가 설립됩니다. 자본금은 100만 라이히스마르크였고 제품도 서비스도 없었으며 금속을 연구한 적도 없습니다. 등기부와 장부만 있는 회사였습니다. 5년 뒤인 1938년 4월 1일 이 회사가 인수한 어음의 미상환 잔액은 120억 라이히스마르크에 이릅니다[^Nazi Conspiracy and Aggression - Volume 2 Chapter XVI Part 12]. 자본금의 1만 2천 배입니다.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자본금은 지금 한화로 약 90억 원이고 잔액은 약 100조 원입니다. 분데스방크의 환산표가 잡은 1933년의 1라이히스마르크 5.6유로와 1938년의 5.2유로에[^Purchasing power equivalents of historical amounts in German currencies] 유럽중앙은행이 고시한 2026년 8월 21일 기준환율 1유로당 1,619.41원을 곱한 값입니다[^Euro foreign exchange reference rates: Korean won]. 뉘른베르크 검찰은 이 회사를 두고 "그저 유령 조직이었고, 명목 자본금은 겨우 100만 라이히스마르크였다"고 말했습니다. 회사 이름의 앞 글자를 딴 약칭이 메포였고 그래서 이 어음을 메포어음이라고 부릅니다. 독일 군수업체가 어음을 발행하면 메포가 그것을 인수했고 발행한 업체는 아무 독일 은행에나 가서 그 어음을 할인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행은 다시 라이히스방크로 가서 재할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이 글에서 다루려는 전부입니다.
메포어음을 소개하는 글은 대체로 유령회사와 재무장 자금과 120억까지만 설명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어음이 5년 동안 사실상 화폐 노릇을 한 이유는 유령회사에도 국가가 뒤에 있다는 믿음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라이히스방크의 재할인 창구가 열려 있었다는 사실 하나였습니다. 언제든 그 창구에 가져가면 진짜 라이히스마르크로 바꿔 준다는 것이 그 어음을 화폐로 만들었습니다. 이 글에서 다루려는 것은 그 창구입니다. 1930년대의 어음에서 시작해 오늘의 스테이블코인을 지나 매일 만드는 게임 속 골드까지 화폐처럼 유통되는 약속이 셋 있고 그 셋의 운명은 위층 화폐로 바꿔 줄 창구가 열려 있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창구는 결국 전부 사라집니다. 어떻게 사라지는지 끝에 설명하겠습니다.
어음은 만기가 되어야 액면 금액을 받는 증서입니다. 만기 전에 현금이 필요하면 은행에 가져가 남은 기간만큼의 이자를 떼고 팔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할인입니다. 100을 받을 권리를 지금 97에 넘기는 식입니다. 어음을 사들인 은행도 만기까지 기다리는 대신 중앙은행에 같은 방식으로 다시 넘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재할인입니다. 그래서 재할인 창구가 열려 있다는 말은 은행이 보유한 어음을 언제든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로 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만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어지고 그 어음은 만기 전에도 사실상 현금처럼 유통됩니다.
만기는 6개월이었고 3개월 단위로 계속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유통 기간은 4년을 넘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흔히 메포어음을 90일 어음이라고 소개하지만 90일은 만기가 아니라 연장 단위입니다. 이 만기 구조는 어음의 목적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재할인 규정에 따라 은행은 그 어음의 최초 만기일 직전 3개월 안에는 언제든 라이히스방크에서 재할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6개월 만기에 마지막 3개월이 재할인 적격이라면 어음의 후반부는 항상 재할인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여기에 3개월 연장이 반복되면 이 어음은 사실상 상시 재할인 적격 상태를 유지합니다. 6개월이라는 만기는 재할인 창구가 늘 열려 있도록 계산해서 정한 숫자였습니다. 메포어음은 민간 회사가 인수한 상업어음이었고 국가 채무가 아니었지만 그 어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든 중앙은행 창구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음은 라이히스마르크와 분리된 레이어에서 유통되면서도 라이히스마르크의 값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구조가 필요했던 이유는 법 때문이었습니다. 1924년 은행법은 라이히스방크가 정부에 직접 빌려줄 수 있는 돈을 1억 라이히스마르크로 제한했습니다. 재무장에 필요한 금액과는 자릿수가 다릅니다. 메포어음 하나로 조달한 잔액 120억은 이 한도의 120배이고 자릿수로는 두 자리 위입니다. 한도의 성격까지 따지면 차이는 더 큽니다. 연방준비제도 회보는 1924년 11월 새 은행법을 해설하면서 정부에 줄 수 있는 이 1억이 90일짜리 운영자금 신용이고 회계연도 말에는 정부의 채무가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정리했습니다[^The New Reichsbank Law, Federal Reserve Bulletin, November 1924]. 해마다 청산하는 단기 융통이었지 몇 해에 걸친 지출을 대는 재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샤흐트는 정부가 직접 빌리는 대신 민간 업체가 어음을 발행하고 유령회사가 인수하고 중앙은행이 그 상업어음을 재할인하는 경로를 만들었습니다. 1946년 5월 2일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잭슨 검사가 이 구조를 두고 샤흐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찾아낸 방법이란 결국 라이히스방크가 편법으로 정부에 돈을 빌려주도록 하는 장치였고 그것은 정상적으로도 법적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 않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샤흐트는 "그렇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Nuremberg Trial Proceedings Volume 12]. 다만 그는 곧바로 반박을 덧붙였습니다. 라이히스방크의 법률 전문가들이 모두 이 문제를 검토했고 당신 말대로의 편법을 통해 법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편법'은 검사가 쓴 것이고 샤흐트는 거기에 동의만 했습니다. 그는 불법을 자백한 것이 아니라 법의 빈틈을 찾아냈다고 말했습니다.
이 어음의 목적을 두고는 지금도 논쟁이 있습니다. 케인스식 유효수요 창출로 해석하는 오래된 견해가 있고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리치슬은 라이히스방크와 노동부 문서고의 원자료로 회계연도별 순발행액을 복원한 뒤 일자리창출어음과 군비어음의 발행이 경기 부양이 아니라 장기 자본시장이 마비된 동안 정부의 신용 수요를 이어 준 가교였다고 결론지었습니다[^Deficit Spending in the Nazi Recovery, 1933-1938: A Critical Reassessment]. 그가 복원한 메포어음 순발행액은 1933회계연도 1억 6,600만 라이히스마르크에서 시작해 1936회계연도에 46억 4,600만으로 정점에 이른 뒤 1937회계연도에 24억 9,400만으로 줄어듭니다. 1937회계연도 말 누적이 정확히 120억이고 이듬해의 순상환을 반영한 6년 합계는 119억 3,300만입니다. 120억은 6년 동안의 순발행 누계이자 발행을 멈춘 시점의 정점 잔액입니다. 롤오버가 반복됐으므로 총 발행액은 이보다 훨씬 큽니다.
여기서 이론을 잠깐 살펴봅시다. 메포어음이 화폐 노릇을 한 이유를 "사람들이 국가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편하지만 그 설명은 틀렸다기보다 너무 헐겁습니다. 스테파니 벨은 1998년의 논문을 민스키의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누구나 화폐를 만들 수 있고 문제는 그것이 수용되게 하는 것이라는 문장입니다[^The Hierarchy of Money]. 이 논문은 화폐를 화폐냐 아니냐로 구분하는 대신 수용 가능성의 정도가 다른 약속들이 쌓인 여러 층의 피라미드로 나타냅니다. 꼭대기에는 가장 수용성이 높은 궁극의 약속이 있고 그 아래로 은행의 요구불예금, 기업의 약속, 가계의 약속까지 내려옵니다. 벨이 국정화폐론을 인용한 대목이 핵심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발행이 아니라 우리가 수용이라고 부르는 과정입니다.
이 논문은 무엇이 수용을 만드는지를 두고 막연한 신뢰를 정답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약속이 수용되는 이유는 국가 수납창구에서 그것을 받아 주기 때문이고 그 아래 층의 약속들이 수용되는 이유는 위층의 약속으로 바꿀 수 있다고 선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을 메포어음에 그대로 적용해 봅니다. 메포어음이 피라미드의 높은 곳에 있었던 이유는 국가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라이히스방크 창구라는 구체적인 전환 통로였습니다. 믿음으로 뭉뚱그리면 이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뒤에서 크립토커런시와 게임 화폐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때 이 구별이 계속 필요합니다.
메포어음을 처음 알았을 때는 법정화폐와 분리된 레이어에서 사실상의 화폐를 찍어 냈으니 라이히스마르크 쪽의 인플레이션이 그만큼 뒤로 밀렸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통화를 더 찍는 대신 어음을 찍었으므로 인플레이션이 즉시 오지 않았고 만기를 미루는 방식으로 그것을 뒤로 미뤘다는 이야기는 메포어음을 소개할 때 자주 나옵니다. 이 글도 그렇게 쓰려 했지만 자료를 찾아보니 생각과 달랐습니다. 리치슬의 같은 논문이 개인적인 생각을 반박합니다. 화폐량과 국민소득의 비율은 1930년부터 떨어지기 시작해 회복기 대부분에 걸쳐 계속 떨어졌고 라이히스방크가 재할인 창구에서 일자리창출어음과 메포어음을 실제로 화폐화했지만 화폐량은 국민총생산에 맞춰 관리되었습니다. 리치슬은 이어서 나치 회복기가 억압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는 통설은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하고 화폐/국민총생산 비율의 하락 추세가 뒤집히는 것은 1938년에 이르러서라고 결론짓습니다. 1936년의 가격통제 도입이 억압된 인플레이션의 시작이라는 통설도 같은 논문이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이 반론에 반격할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리치슬이 측정한 통화량에는 메포어음 자체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메포어음이 준화폐였다면 그 지표는 정의상 화폐성 총량의 부분 측정치입니다. 다만 이것은 증거가 아니라 논증입니다. 1948년에 실제로 폭발한 억압된 인플레이션을 메포어음과 곧장 연결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분데스방크는 1948년 회고에서 통제가격이 1933년 이후 나치 정부와 라이히스방크가 재무장과 전쟁 자금조달을 위해 만든 막대한 화폐 과잉에서 비롯한 인플레이션을 가렸다고 말했지만[^The economic and currency reform of 1948: the basis for stable money] 그 과잉은 압도적으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금융이 만든 것이고 1938년에 멈춘 120억은 수천억 규모의 제국 채무 가운데 작은 일부입니다. 메포어음은 1948년 과잉의 원인이라기보다 같은 기법의 초기 사례에 가깝습니다.
1938년 3월 31일 샤흐트는 메포어음 발행을 중단합니다. 뉘른베르크 판결문은 이 어음을 "라이히스방크가 보증했고 사실상 발권은행이라는 그 지위 외에는 아무것도 뒷받침하지 않은 5년짜리 증서"라고 기술합니다[^Judgment : Schacht]. 이듬해 1월 2일 샤흐트는 히틀러와 만나 군비 지출을 줄이라고 요구했고 1월 7일에는 라이히스방크 이사진이 서명한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인플레이션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군비 지출의 대폭 삭감과 균형재정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1월 19일 히틀러는 샤흐트를 라이히스방크 총재직에서 해임합니다. 판결문에 기록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판결문은 이 각서가 메포어음의 상환을 명시적으로 요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120억은 어떻게 됐을까요. 만기가 오면 상환됐을까요. 경제사 쪽 답은 지금도 자료가 부족합니다. 미공개 워킹페이퍼 한 편이 이 어음들이 결국 라이히스방크의 대차대조표로 들어가 1945년 5월 독일 국가 구조가 붕괴할 때까지 그 상태로 자금조달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OBFA-TRANSFORM Working Paper No. 2: The Mefo Operation. A Macro-Financial Analysis of Camouflaged Sovereign Borrowing through Off-Balance-Sheet Fiscal Agencies, 1933-1945]. 다만 피어리뷰를 거치지 않은 문서 하나에 결론을 의존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법령 쪽에는 답이 있습니다.
1948년 6월 20일의 통화개혁법은 라이히스마르크 채권을 도이치마르크로 전환하는 비율을 정했습니다. 제16조 제1항은 원칙적으로 10 라이히스마르크당 1 도이치마르크로 전환한다고 규정했습니다[^Drittes Gesetz zur Neuordnung des Geldwesens (Umstellungsgesetz) § 16 Umstellung der Reichsmarkverbindlichkeiten auf Deutsche Mark]. 명목가치의 10분의 1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두 조문 앞인 제14조는 이 전환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 채무를 열거했고 그 첫 번째 항목이 제국의 채무였습니다[^Drittes Gesetz zur Neuordnung des Geldwesens (Umstellungsgesetz) § 14 Verbindlichkeiten des Reichs und gleichgestellte Verbindlichkeiten]. 일반 채권자가 10분의 1을 받는 동안 제국이 보증한 채무에는 전환 비율 자체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메포어음'이 조문에 명시된 것은 아닙니다. 어음의 1차 채무자는 어디까지나 그 유령회사였고 제14조 제1호에 해당하는 것은 그 뒤에 있던 제국의 보증채무입니다.
그리고 9년 뒤인 1957년의 전쟁결과일반처리법 제1조가 마무리짓습니다. 조문 제목이 "청구권의 소멸"이고 본문은 독일제국과 구 프로이센주와 제국아우토반에 대한 청구권이 이 법에서 달리 정하지 않는 한 소멸한다고 선언했습니다[^Gesetz zur allgemeinen Regelung durch den Krieg und den Zusammenbruch des Deutschen Reiches entstandener Schäden (Allgemeines Kriegsfolgengesetz) § 1 Erlöschen von Ansprüchen]. 같은 법 제3조는 소멸하는 것들을 열거하면서 독일제국의 보증채무를 명시합니다. 부도 선언도 없었고 채무 재조정 협상도 없었습니다. 1948년에는 전환 대상 목록에서 빠졌고 1957년에는 법률 한 조문으로 소멸했습니다. 만기를 5년 미루는 데 성공했던 어음은 상환되지도 부도가 나지도 않고 도이치마르크로 전환할 채무의 목록에서 제외됐습니다.
여기까지가 1930년대 이야기이고 이제 오늘로 옮겨 옵니다. 국제결제은행 워킹페이퍼 한 편에 따르면 유로달러가 역외의 사적 달러예금이라면 스테이블코인은 온체인의 사적 달러예금입니다. 여기서 예금이란 신용의 한 형태로서 가까이는 달러를 궁극적으로는 연방준비제도의 부채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냥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1이라는 고정 가격인 액면가로 지급하겠다는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괄호 안에 한 문장을 덧붙였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은 일반적으로 예금계좌보다 화폐 위계상 아래에 있고 예금계좌는 다시 중앙은행 부채보다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On par: A Money View of stablecoins]. 메포어음이 라이히스마르크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이었던 것과 위계상 형태가 같습니다. 이 논문이 메포어음이나 라이히스방크를 언급하지는 않으므로 둘을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형태가 같다면 다음 질문은 창구입니다. 같은 논문이 그 대목을 다룹니다. 액면가 결제가 마주하는 문제는 지급능력이 아니라 유동성이라고 진단한 뒤 크립토커런시에서 조달유동성이 실무상으로도 원리상으로도 매우 제한적인 이유는 신용을 배제하는 무신뢰 시스템에 대한 깊은 신념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스테이블코인은 시장유동성에 의존하고 조달유동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역외 시스템과 비교하면 온체인은 훨씬 덜 탄력적이고 훨씬 취약합니다. 결론부의 문장이 이 글의 논점과 만납니다. 위기 때는 모두가 화폐를 원하고 아무도 신용을 원하지 않고 화폐를 지급하겠다는 약속들이 시험받습니다. 방어는 시스템에서 바로 위 층위가 제공한다고 말한 다음 앞서 말했듯 크립토커런시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형태는 같고 창구는 없다는 진단입니다.
창구가 없을 때 그 약속이 어떻게 되는지는 2022년 5월 사건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논문의 상자 글이 테라USD의 붕괴를 다룹니다. 며칠 사이에 그때까지 화폐처럼 통용되던 크립토커런시 토큰의 가치 약 200억 달러가 사라졌습니다. 5월 9일 테라USD가 90센트에 거래되기 시작했고 알고리즘은 테라USD 하나를 소각하면 루나 가격이 p달러일 때 1/p개의 루나를 내주었습니다. 루나가 50달러일 때는 0.02개였습니다. 그 뒤 3일에 걸쳐 루나 가격이 0으로 수렴하는 동안 루나 유통량이 폭증했습니다. 설계자들은 루나에 언제나 0보다 큰 시장청산 가격이 존재하리라고 잘못 가정했지만 실제로는 어떤 양의 가격에서도 루나를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고 논문은 말했습니다. 다만 이 상자 글이 제시한 유통량 수치는 앞뒤가 맞지 않아 그대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붕괴의 성격을 두고는 유동성 가정의 실패로 해석하는 견해 말고도 앵커 프로토콜의 연 20% 수익률과 대형 보유자의 선이탈에 주목해 전형적인 뱅크런으로 분석한 논문이 있습니다[^Anatomy of a Run: The Terra Luna Crash]. 롤오버로 버티다 한 번에 부도가 나는 이야기에는 뒤쪽 해석이 더 잘 맞습니다.
2021년 10월 15일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는 테더에 4,100만 달러의 제재금을 부과했고 비트파이넥스에는 150만 달러를 부과했습니다[^CFTC Orders Tether and Bitfinex to Pay Fines Totaling $42.5 Million]. 약속을 이행할 준비금이 실제로 없었던 사례가 규제기관 문서로 기록됐습니다. 명령서에 따르면 테더의 웹사이트는 모든 테더 토큰이 언제나 준비금에 보유한 전통 통화로 1대1 뒷받침된다고 표시해 왔지만 최소 2018년부터 2019년 2월 25일까지 준비금에 무담보 미수채권과 기업어음과 제3자가 보유한 자금과 그 밖의 비법정화폐 자산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준비금 일부는 비트파이넥스의 은행 계좌에 있었고 비트파이넥스의 운영자금 및 고객자금과 섞여 있었습니다. 명령서는 별도의 소제목을 달아 준비금이 감사받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두 번의 검토 가운데 2017년의 것은 단 하루를 대상으로 했고 그 날짜는 회사가 미리 골라 회계법인보다 먼저 알고 있던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비트파이넥스가 3억 8,206만 달러를 테더 계좌로 이체했습니다. 2018년의 검토는 회계법인이 아니라 로펌이 회사가 제공한 정보에 근거해 계좌 잔액 두 개를 비교했습니다.
FTX 사건에서는 자기가 발행한 토큰이 담보였고 그 기록이 파산법원에 남아 있습니다. 법원 선임 조사관 보고서는 알라메다가 초기 FTT 배분의 60%에서 70%를 무상으로 받았고 그 보유분을 담보로 계열사와 제3자에게서 대출을 받았다고 정리합니다[^Report of Robert J. Cleary, Examiner]. 뱅크먼-프리드가 2019년 9월 5일 문서에 쓴 문장이 그 구조를 설명합니다. 알라메다의 순자산가치는 FTT를 어떻게 계상하느냐에 극도로 의존하고 FTT를 조금이라도 자산으로 치면 완전히 괜찮지만 치지 않으면 현재의 차입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같은 보고서는 2019년 12월 그가 외부 로펌에 보낸 통신도 인용합니다. 알라메다는 FTT를 많이 보유하고 있고 그 시장가치는 높지만 시장을 붕괴시키지 않고는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2022년 11월 2일 보도된 유출 대차대조표에서는 총자산 146억 달러 가운데 최대 항목이 36억 6,000만 달러의 언락된 FTT였고 세 번째 항목이 21억 6,000만 달러의 FTT 담보였습니다. 총자산의 약 40%가 자기가 발행한 토큰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메포어음과 FTT는 구별해야 합니다. 메포는 담보의 실체가 국가였고 FTT는 담보의 실체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메포어음의 구조는 자기참조라기보다 국가 보증을 장부 밖으로 옮긴 특수목적회사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논점에서 더 중요한 차이는 뒤에 있습니다. 메포어음에는 창구가 있었고 그런데도 결국 상환되지 않았습니다.
창구가 실제로 열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준 사건이 있습니다. 연방준비제도의 금융안정보고서가 경과를 기록했습니다. 2023년 3월 10일 실리콘밸리은행에서 무보험 예금이 대규모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가운데 시가총액 310억 달러의 스테이블코인 USDC를 운영하는 서클이 준비금 33억 달러를 그 은행에 두고 있다고 공시했습니다. 이 공시가 대규모 상환을 촉발했고 USDC는 목표가인 1달러 아래로 떨어져 한때 87센트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보고서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은행과 시그니처은행의 무보험 예금이 안전하다고 보장하는 정부 개입 소식이 나온 뒤 USDC 가격이 1달러 근처에서 안정되었습니다[^Financial Stability Report, May 2023].
회복은 두 단계였습니다. 발행사가 스스로 뒷받침을 선언한 뒤 가격은 0.95달러에서 0.96달러 부근까지 올라왔다가 거기서 멈췄습니다. 액면가로 돌아온 것은 그다음입니다. 3월 12일 오후 6시 15분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와 연방예금보험공사가 공동성명을 냈습니다. 옐런 재무장관이 두 은행의 정리를 모든 예금자를 완전히 보호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도록 승인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같은 성명에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주주와 일부 무담보 채권자는 보호받지 못하고 경영진은 해임되었고 무보험 예금자를 지원하느라 예금보험기금에 발생하는 손실은 법에 따라 은행권에 대한 특별부담금으로 회수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Joint Statement by Treasury, Federal Reserve, and FDIC]. 발행사의 약속은 가격을 움직였지만 액면가를 되돌리지는 못했고 그것을 되돌린 것은 한 층 위의 보증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화폐 위계를 두고 알려 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위층이 개입할 때는 화폐성 부채만 골라서 구제하고 위험자본은 소각합니다. 예금자는 25만 달러 한도와 무관하게 전액 보호받았고 주주는 배제됐습니다. 그리고 그 창구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를 위해 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열린 곳은 은행 예금 층위였고 USDC는 그 아래에서 낙수를 받았을 뿐입니다. 라이히스방크의 재할인 창구가 메포어음을 위해 늘 열려 있던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만기는 크립토커런시와 메포어음을 비교할 때 나타나는 흔한 차이입니다. 어음에는 만기가 있었지만 코인에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료를 모아 놓고 확인하니 이 구별을 그대로 쓰기에는 근거가 약합니다. 스테이블코인에는 액면가로 상환하라는 청구권이 있고 거래소에는 인출이 있습니다. 계약상 만기일이 달력에 표시되어 있지 않을 뿐 보유자가 원하면 언제든 만기를 불러올 수 있는 청구권입니다. 연방준비제도는 아예 스테이블코인을 자신의 금융안정 모니터링 체계에서 뱅크런이 가능한 화폐성 부채라는 집계 항목에 포함했습니다. 2022년 4분기 기준 그 총계는 19조 6,270억 달러로 명목 국내총생산의 75%였고 그 금융안정보고서는 스테이블코인이 구조적으로 뱅크런에 취약한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이 표현은 회계 기준의 분류가 아니라 감독 당국의 모니터링 개념이고 이 범주에는 실제 만기가 있는 상품도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층을 나누는 쪽이 실제에 더 잘 맞습니다. 메포어음은 계약상 만기와 상환 청구권을 다 갖췄고 위층 창구까지 열려 있었습니다. 여기서 위층 창구는 화폐 위계에서 한 층 위의 발행자가 아래층 약속을 액면가로 바꿔 주는 전환 통로를 말합니다. 메포어음에서는 라이히스방크의 재할인 창구가 그 자리였고 은행 예금에서는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과 예금보험이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최종대부자는 시장에서 돈을 구하지 못하는 은행에 중앙은행이 담보를 받고 빌려주는 기능이고 예금보험은 은행이 무너져도 정해진 한도까지 예금을 대신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스테이블코인에는 계약상 만기가 없습니다. 상환 청구권은 있지만 위층 창구가 없습니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무담보 크립토커런시로 내려가면 만기도 상환 청구권도 없습니다. 만기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청구권이 어느 층에서 끊기느냐가 다릅니다. 무담보 크립토커런시를 두고 "만기가 없어서 부도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청구할 상대가 없어서 부도라는 사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도가 나지 않는 것과 갚아 주는 것은 다릅니다.
이 이야기를 게임 쪽으로 가져오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중앙은행이 게임 화폐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직접 기록한 문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중앙은행은 2012년 보고서에서 가상통화 체계를 현실경제와의 연결 정도에 따라 셋으로 나누고 현실경제와 거의 연결이 없는 폐쇄형의 대표 사례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골드를 들었습니다. 4장 서두에는 특정 가상 커뮤니티에 초점을 둔 폐쇄형 체계는 중앙은행의 관점에서 무관하고 전통적 게임을 온라인 세계에 맞춰 적응시킨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맥락에서는 빠르게 논외로 할 수 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이 글에 필요한 대목입니다. 더 개방적이거나 현실경제와 연결된 2형과 3형은 상황이 다르고 특히 양방향 환율이 관련될 때 그렇다고 말했습니다[^Virtual Currency Schemes]. 같은 보고서의 각주는 그 체계 바깥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골드를 사고파는 암시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스스로 단서를 답니다.
개발사가 발권은행이라는 비유도 이 보고서에서는 비유가 아닙니다. 같은 문서의 통화 관련 절은 세컨드라이프의 이용약관을 인용합니다. 린든달러는 린든랩의 재량으로 판매되거나 배포되고 린든랩으로부터 금전적 가치로 상환되지 않고 린든랩은 그 라이선스 권리를 관리하고 규제하고 통제하고 변경할 권리를 가진다는 약관 문장을 옮긴 다음 실제로 린든랩은 세컨드라이프 환경에서 발권은행 역할을 맡아 유통 화폐량을 원하는 대로 바꾸고 자원 배분을 결정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조금 뒤에는 약관상 린든달러가 데이터베이스에서 소실되어도 린든랩은 어떤 보상도 할 필요가 없다는 조항까지 인용했습니다. 발권권은 완전하고 상환의무는 0이라는 구조를 중앙은행 문서가 정리했습니다.
게임사가 발권당국이면서 동시에 통계당국이라는 사실은 EVE 온라인이 매달 증명합니다. CCP는 월간 경제 리포트를 공식 발간합니다. 여기에 통화량과 화폐유통속도와 소비자물가지수와 광물가격지수와 생산자물가지수를 싣고 ISK가 경제로 들어오는 경로와 빠져나가는 경로를 항목별로 집계한 표를 함께 냅니다. 2024년 5월 리포트를 보면 유입 총계 173.8조 ISK와 유출 총계 118.5조 ISK 같은 숫자가 그대로 공개되어 있습니다[^Monthly Economic Report - May 2024]. 8월 리포트에는 통화량이 2,190조 ISK에 이르렀고 이는 7월 말의 2,158조 대비 1.5% 증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Monthly Economic Report - August 2024]. 게임 안에서 무엇이 화폐를 만들어 내고 무엇이 회수하는지를 이 정도 해상도로 공표하는 회사는 드뭅니다. 발권과 회수를 뜻하는 수도꼭지와 배수구도 학계보다 개발사 실무에서 먼저 나왔고 CCP의 차트 제목에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게임 경제에서는 발권 결정을 금리 결정처럼 내리지 않습니다. 2024년 10월 리포트에는 자르자크 공성전이 9월 말에 끝난 뒤 상위 8개 항목 차트에서 특정 유입원이 빠지고 그 자리에 중개 수수료가 들어왔다는 공지가 있습니다[^Monthly Economic Report - October 2024]. 발권 경로가 컨텐츠 일정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통화량을 관리하는 사람과 이벤트를 기획하는 사람이 같은 표를 확인하지 않으면 발권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늘어납니다. 이것이 CCP가 매달 그 표를 공개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게임 화폐가 별도의 레이어에서 돈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아니고 그 레이어를 다른 레이어와 연결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2011년 10월 밸브의 사장 게이브 뉴웰이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가상경제의 규모를 키우고 경제들을 서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잔뜩 생기고 있다며 컨설팅을 요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상 환경의 경제를 연결해 공유 통화를 만드는 문제를 논의하다가 국제수지의 까다로운 대목에 부딪혔고 그때 "이건 독일과 그리스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IT ALL BEGAN WITH A STRANGE EMAIL]. 이 메일에서 연결된 두 레이어는 가상 세계끼리이지 게임과 법정화폐가 아닙니다. 그래도 레이어를 연결하는 순간 통화동맹의 문제가 그대로 따라온다는 것을 게임 회사 대표가 자기 문제로 겪었다는 기록입니다.
게임 레이어와 현실 화폐를 연결했을 때 개발사가 어떤 처지가 되는지는 훨씬 이전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 캐스트로노바는 2001년 논문에서 소니가 에버퀘스트 아이템의 달러 거래를 막으려고 이베이와 야후에 경매 폐쇄를 압박한 일을 다룹니다. 소니는 노라스의 아이템이 자사의 지식재산이고 그것을 달러로 거래하는 것은 절도라는 입장이었습니다. 논문은 그럼에도 거래는 계속된다고 말한 뒤 각주에서 사실상 노라스의 정부인 소니는 어떤 정부도 이겨 본 적 없는 무역 제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Virtual Worlds: A First-Hand Account of Market and Society on the Cyberian Frontier]. 같은 논문에는 이 글의 실무적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저자가 팬사이트 가격 데이터로 만든 종합 아이템 지수는 2000년 4분기 100에서 2001년 3분기 71.17로 떨어집니다. 게임 경제가 겪은 문제는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이었습니다. 이유도 나와 있습니다. NPC 상인이 어떤 물건이든 무제한으로 사들이고 아이템은 소멸하지 않으므로 그 무한내구 재화의 재고가 계속 쌓입니다. 아바타끼리의 시장이 그나마 유지되는 유일한 이유는 개발사가 계속 새 아이템을 투입하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발권만 관리하고 재화의 소멸을 설계하지 않으면 문제는 인플레이션이 아닌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2007년 12월 10일 재그렉스는 룬스케이프에 거래 제한을 도입하면서 실화폐 거래를 없애려면 골드 판매업자가 영업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불균형 거래를 막는 수밖에 없다고 밝혔습니다. 목표는 골드 판매를 아주 어렵게 만들어 판매업자와 작업장이 룬스케이프를 영원히 떠나게 하는 것이라는 문장도 있습니다[^10 December 2007 - Trade and Drop Changes]. 구체적으로는 주고받는 아이템의 총가치 차액이 3,000골드 이내여야 하고 15분마다 3,000골드의 이득이나 손실로 제한한다는 규칙이었습니다. 3년 뒤 2010년 12월 24일 재그렉스는 24시간 만에 120만 표의 청원이 모였다며 자유 거래와 황무지의 복원 여부를 이용자 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2011년 1월 17일에는 120만 표를 접수했고 그중 91%가 복원에 찬성했으므로 2월 1일에 되돌리겠다고 알렸습니다[^The Wilderness and Free Trade Will Return!]. 소니가 이기지 못한 전쟁을 재그렉스는 시도했다가 스스로 그만두었습니다.
레이어를 아예 철거한 사례가 디아블로 3입니다. 2013년 9월 17일 블리자드는 경매장 폐쇄를 발표하면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경매장을 처음 설계하고 도입했을 때의 목표는 편리하고 안전한 거래 체계를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여러 차례 언급했듯 경매장 체계의 장점과 전 세계 많은 이용자가 그것을 사용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디아블로의 핵심 게임플레이인 몬스터를 죽여 멋진 전리품을 얻는다는 것을 훼손한다는 점을 점점 분명하게 알게 됐다는 문장입니다[^Diablo® III Auction House Update]. 이것은 어디까지나 블리자드가 밝힌 사유이고 실제 동인이 이용자 이탈이나 콘솔판 설계였다는 해석은 별개 층위입니다. 그래도 개발사가 자기 입으로 실화폐 연결이 게임의 핵심을 훼손한다고 말한 문서는 이것 말고 찾기 어렵습니다. 게임 안의 경제를 밖으로 노출할 이유가 있는지는 예전에 '게임 경제를 외부에 공개할 이유가 무엇인가'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답을 찾지 못했던 질문에 유럽중앙은행 문서와 이 발표문이 뒤늦게 근거를 댑니다. 여러 가상세계를 잇는 상호운용성을 두고도 '상호운용성은 거짓말이다'에서 회의적으로 다뤘습니다. 뉴웰의 메일은 그 회의가 게임 회사 안쪽에서도 같은 모양으로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게임 화폐의 위층에는 개발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개발사에게는 창구를 열 의무가 없고 열지 않겠다고 명문화한 회사도 있습니다. CCP는 2016년 7월 4일 공지에서 자선 사칭 사기를 경고합니다. EVE 온라인에서 사기와 신용사기와 절도는 허용되고 게임 규칙 위반으로 간주되지 않지만 자선 행사나 게임 안팎의 자선단체가 이런 플레이의 겉가면으로 쓰이는 경우에는 무관용 정책을 적용한다고 명시했습니다[^A Reminder Regarding Scamming & Charity Events]. 게임 안에서 남의 ISK를 속여 빼앗는 것은 규칙 위반이 아니고 게임 밖의 신뢰를 사칭할 때만 개입합니다. 발권권은 독점하지만 그 화폐를 둘러싼 신뢰의 최종 보증자가 되기는 문서로 거부했습니다. 라이히스방크의 재할인 창구가 늘 열려 있던 것과 정확히 반대편입니다.
개발사는 발권 규모를 조정하는 방식도 통화정책의 언어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2015년 3월 2일 블리자드는 WoW 토큰을 발표하면서 도입 이유로 둘을 들었습니다. 계정 도용의 주요 원인인 비공인 제3자 골드 판매를 대신할 안전하고 합법적인 경로를 원한다는 이용자 의견이 있었고 정상적인 플레이로 골드를 많이 모은 이용자가 그 골드를 다른 이용자와 교환해 구독료를 충당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Introducing the WoW Token]. 발표문 전문에 인플레이션도 골드 회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흔히 이 토큰을 골드 회수 장치로 설명하지만 회사 자신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가격은 회사가 정합니다. 후속 공지는 토큰 교환이 어디선가 시작해야 하므로 초기 골드 가치는 우리가 직접 정한다고 말했고 이후에는 등록량과 구매량에 따라 가격이 자동으로 조정된다고 했습니다. 호가도 입찰도 없고 한 지역 안에서는 모든 토큰이 같은 가격입니다. 발권당국이면서 가격당국이지만 그 역할을 통화정책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게임 화폐는 상환 청구권이 아예 없는 세 층 가운데 가장 아래의 약속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회계 쪽을 열어 보면 반대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블록스의 2025 회계연도 연차보고서의 수익인식 정책에 따르면 이용자는 가상 아이템을 얻기 위해 가상통화인 로벅스를 구매할 수 있고 로벅스 판매 대금은 우선 이연수익으로 계상됩니다. 이연수익은 대금을 먼저 받았지만 그 대가로 줄 것이 아직 남아 있는 금액입니다. 그리고 이용자가 가상 아이템을 구매하고 사용함에 따라 수익으로 인식된다는 내용입니다. 보고서는 회사가 이행해야 할 의무를 이용자가 플랫폼에서 가상 아이템을 획득하고 사용하고 보유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Roblox Corporation Annual Report on Form 10-K for the fiscal year ended December 31, 2025]. 이연수익은 부채이고 판매된 게임 화폐는 회사의 빚으로 장부에 올라갑니다.
규모를 따지면 이것이 작은 항목이 아닙니다. 같은 보고서의 재무상태표에서 이연수익은 유동 항목이 41억 6,897만 달러이고 비유동 항목이 23억 3,696만 달러입니다. 합치면 약 65억 달러이고 같은 시점 총부채는 91억 8,214만 달러이므로 판매된 로벅스가 이 회사 전체 부채의 약 71%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 부채가 소멸하는 방식이 이 글의 논점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같은 보고서는 수익의 대부분을 유료 이용자의 추정 평균 수명에 걸쳐 인식하고 그 값이 2025년 12월 31일 기준 27개월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상환 기한이 아니라 회사가 추정한 이용자의 잔여 수명입니다. 이용자가 떠날 때까지의 기간에 걸쳐 조금씩 상각되어 사라지는 부채입니다. 같은 보고서는 이용자의 결제가 환불되지 않는다는 점도 함께 밝혔습니다. 만기 없이 이어지다가 시간이 지나면 장부에서 사라진다는 점에서 메포어음과 형태가 닮았습니다. 차이라면 메포어음은 조문 하나로 사라졌고 이쪽은 분기마다 조금씩 사라집니다.
일본의 자금결제법은 그 창구를 법으로 만들었고 선불식지불수단에 세 가지를 강제합니다. 제14조는 기준일의 미사용잔고가 정령이 정한 기준액을 넘으면 그 미사용잔고의 2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발행보증금을 공탁하도록 정했습니다. 제20조는 발행 업무의 전부 또는 일부를 폐지한 경우 보유자에게 잔액을 환급해야 한다고 정했습니다. 그 절차에서 60일을 밑돌지 않는 기간 안에 채권을 신고하도록 공고해야 하고 그 기간에 신고하지 않은 보유자는 환급 절차에서 제외되어 돈을 돌려받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제31조는 보유자가 그 발행보증금에 대해 다른 채권자보다 먼저 변제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정했습니다[^資金決済に関する法律]. 부분지급준비와 폐지 시 환급 의무와 우선변제권이 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2023년 3월에 재무장관이 재량으로 판단해서 한 일을 일본은 미리 제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이 게임업계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하면 이 글의 논점이 다시 나타납니다. 같은 법 제4조는 적용 제외 대상을 열거합니다. 그 제2호가 발행일로부터 정령이 정한 일정 기간 안에만 사용할 수 있는 선불식지불수단이고 그 기간은 6개월입니다. 그래서 유료 재화의 유효기간을 6개월 이내로 정하면 공탁 의무도 서비스 종료 시의 법정 환불 의무도 함께 사라집니다. 예전에 '일본의 선불식 지불수단'에서 이 법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정리한 바로는 거액의 공탁금 부담을 피하려고 일본 게임사들이 가장 널리 활용하는 방법이 바로 이 6개월 설정입니다. 미사용잔액 230억 엔의 공탁을 회피했다는 의혹으로 2016년 라인 팝이 조사를 받고 결국 100억 엔 이상을 보전해야 했던 일도 그 글에서 다뤘습니다. 일본 법은 위층 창구를 강제로 만들었고, 업계는 그 창구가 열리지 않는 구간으로 재화를 밀어 넣는 표준 관행을 만들었고 그 방법이 기한을 짧게 정하는 것입니다.
한국 쪽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은 서비스 종료 시 게임 내 재화를 환급하라고 정하지 않습니다. 제30조의 폐업 규정은 영업자의 폐업 신고 의무를 정한 것이고 이용자 보호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대신 같은 법 제32조 제1항 제7호가 게임을 통해 획득한 결과물의 환전과 알선과 재매입을 금지합니다. 앞의 글에서 정리한 대로 일본의 규제가 기업이 파산해도 충전금을 돌려줄 수 있는가라는 금융 보전에서 출발했다면 한국의 규제는 게임 재화가 도박의 도구가 되지 않는가라는 사행성 차단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잔여 재화의 환급을 게임법이 아니라 상법의 소멸시효와 약관 규제 쪽에서 다룹니다. 6개월 만에 소멸시키는 일본식 약관을 그대로 들여오면 오히려 한국법을 위반합니다. 이것이 같은 게임을 두 나라에 서비스할 때 종료 절차를 양쪽으로 나눠 준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가장 놀란 것은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세 자료에 사실상 같은 문장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957년 독일의 전쟁결과일반처리법은 제국에 대한 청구권이 소멸한다고 정했습니다. 일본 자금결제법 제20조에는 60일 이상의 기간 안에 신고하지 않은 보유자가 환급 절차에서 제외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블리자드는 2014년 3월 13일 경매장 종료 안내에서 이용자가 완료 탭에서 골드와 아이템을 수령할 수 있는 기한을 2014년 6월 24일까지로 정했습니다. 그 날짜까지 수령하지 않은 아이템과 골드는 보물 고블린에게 먹혀 다시는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Auction House FAQ Updated]. 세 문서 모두 종결의 방식으로 상환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청구할 기한을 주고 그 기한이 지나면 청구권 자체를 없앴습니다.
앞에서 다룬 일본의 6개월 관행이 이 목록의 네 번째입니다. 앞의 셋은 끝날 때 기한을 정한 경우지만 6개월 설정은 시작할 때부터 기한을 붙이는 경우입니다. 재화를 팔면서 그것이 6개월 뒤에 사라지도록 정하면 공탁도 환급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법이 만든 창구는 그 창구가 열리는 조건에 아예 해당하지 않게 설계하면 사라집니다. 이것은 편법이라기보다 법이 예정한 적용 제외 조항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 그래서 더 눈여겨볼 만합니다. 상환 의무를 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도를 내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상환 의무가 생기지 않는 형태로 발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기 없는 화폐의 실제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만기가 없는 약속은 만기가 오지 않아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만기 대신 기한이 오고, 그 기한은 발행자가 정하고, 대부분의 보유자는 그 기한이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나중에 압니다. 메포어음의 결말이 무서운 이유도 부도를 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도는 사건이라도 되고 협상 상대라도 있지만 이쪽은 1948년에 전환 대상 목록에서 조용히 빠졌고 1957년에 조문 한 줄로 없어졌습니다. 옳은 비전이 시대를 앞질러 발행되었다가 30년 뒤에 결제된 이야기를 '30년 일찍 발행된 어음'에서 다룬 적이 있고 그 어음은 늦게라도 결제됐습니다. 메포어음은 결제되지 않았고 부도도 나지 않았습니다.
게임 경제를 설계하는 사람 입장에서 이 이야기의 교훈을 정리합니다. 첫째로 발권만 관리하고 소멸을 설계하지 않으면 값을 치르는데 그 값이 반드시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에버퀘스트는 아이템이 소멸하지 않아서 디플레이션을 겪었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만들어 내는지만큼 무엇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같은 표에 기록해야 합니다. 둘째로 게임 경제의 발권은 금리 결정이 아니라 이벤트 기획이 결정합니다. 자르자크 공성전이 끝나면 유입 경로 하나가 사라집니다. 통화량을 확인하는 사람과 컨텐츠 일정을 정하는 사람이 같은 표를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발권량이 바뀝니다. 셋째로 우리가 만드는 화폐를 지탱하는 것은 이용자의 애정이 아니라 그 화폐로 계속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플레이어가 골드를 모으는 이유는 골드를 믿어서가 아니라 창구가 열려 있다고 알기 때문이고 그 창구는 상점이고 제작이고 거래소입니다. 그것을 좁히는 패치가 곧 창구를 좁히는 결정이지만 회의실에서는 그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넷째는 종결을 미리 설계하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만기가 없는 화폐에도 끝은 옵니다. 서비스가 끝나거나 기능이 없어지거나 특정 지역의 서비스가 종료됩니다. 그때 이용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돌려줄지 지금 정하지 않으면 기본값은 정해져 있습니다. 기한을 공지하고 그 기한 뒤에 남은 것을 없애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부당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디아블로 3가 준 3개월은 짧은 기간이 아니었고 일본 법이 요구하는 60일보다 훨씬 깁니다. 그리고 유료 재화에 6개월 유효기간을 정하는 결정도 대부분은 이용자를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공탁금이라는 실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내리는 판단입니다. 다만 그 기본값을 선택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과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아서 도달하는 것은 다릅니다. 유효기간 6개월이 들어간 약관 한 줄이 회계와 규제에서 무슨 뜻인지 알고 쓰는 것과 다른 회사가 그렇게 하니까 따라 쓰는 것도 다릅니다. 폴라니를 다시 읽으면서 '거대한 전환'에 썼던 것처럼 제도가 없는 곳에서 시장이 알아서 공정한 결말을 만들어 주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메포어음이 5년 동안 화폐일 수 있었던 이유가 라이히스방크 창구였다면 그 어음이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한 이유는 창구를 열 수 있는 주체와 그것을 없애기로 결정하는 주체가 같았기 때문입니다. 크립토커런시에는 그 창구가 애초에 없고 2023년 3월에 잠깐 열린 것도 스테이블코인을 위해 열린 창구가 아니었습니다. 게임 화폐에는 창구가 하나뿐이고 그 창구를 관리하는 사람이 발권하는 사람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골드는 그런 의미에서 메포어음과 크립토커런시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국가의 보증은 없지만 회계상으로는 누군가의 부채이고, 상환 청구권은 없지만 관할권에 따라서는 법이 그것을 만들어 줍니다. 어느 쪽으로 갈지는 설계하는 사람이 정할 수 있는 여지가 아직 남아 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아무도 정하지 않은 채로 기한만 흘러가는 것보다는 나은 경우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