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처티드4와 노동집약적 개발

언처티드4를 플레이 하며 이 게임의 어디에 그토록 많은 인력과 자원이 필요했는지 추측해봤습니다.

언처티드4와 노동집약적 개발

전에 늦게서야 언처티드 4를 플레이 하며 플레이어의 관측 가능한 영역 바깥의 세계가 연속적으로 동작하는 특징에 따라 게임에 대한 몰입 수준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편 이 게임을 하며 계속해서 한 생각은 이 게임 제작사와 이 게임이야말로 업계에 널리 알려진 지독한 노동 집약적 개발로 유명한데 게임의 어느 부분 때문에 그렇게 지독한 노동 집약적 개발이 일어났는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비슷하게 지독한 노동 집약과 폭언, 협박 등으로 유명한 GTA 시리즈는 게임을 딱 잡아 보면 이 게임에 왜 그렇게 엄청난 자원이 필요했는지 너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거리를 걸으며 보이는 온갖 상점 간판에 전화번호는 전화를 꺼내 여기에 모두 전화를 걸어볼 수 있고 게임 속에는 꽤 그럴싸한 인터넷이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 주식 투자를 비롯한 여러 미니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습니다. 게임에 나오는 여러 서브 캐릭터들은 게임 진행에 따라 여러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인데도 엄청나게 공들여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에 비해 언처티드 4는 게임을 플레이 하며 이 게임의 어느 부분에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게임은 챕터 약 20여개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챕터는 아주 짧지는 않은 플레이 시간을 요구하지만 챕터 각각이 다른 챕터와 완전히 독립되어 있어 현대에 여러 사람이 상호작용 해야 하는 멀티플레이 온라인 게임이나 캐릭터가 게임의 여러 시점에 계속해서 성장해야 하는 롤플레잉 게임에 비해 시스템이 복잡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깊이 연구한 것 같은 파쿠르 시스템은 상황에 따라 분명히 실패한 점프인데도 아주 자연스럽게 위치를 보정해 성공한 점프로 만들어주는 상황을 몇 번 겪으며 여기에는 분명 자원을 집중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 외에는 메타 플레이를 위한 시스템 볼륨이 많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으며 이들 사이에 일어날 상호작용도 거의 없고 플레이는 크게 파쿠르, 컷씬, 그리고 잠입 또는 전투 뿐이어서 만약 스토리보드가 사전 제작 되어 있다면 개발 과정을 시스템과 스토리보드로 분리해 알려진 것에 비해 훨씬 적은 자원으로 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에필로그 챕터를 마치고 주인공의 가족인 엘리나가 오래 전 찍은 사진을 어린 주인공과 형 샘이 찍힌 사진 옆에 내려 놓으며 화면이 어두워진 다음 게임이 마무리되고 제작사 로고가 나타난 다음 스탭롤이 시작되었을 때 아주 매력적인 스토리를 마무리 하며 느낀 좋은 감정을 유지하며 이어지는 스탭롤을 관찰하다가 문득 이 게임에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한 이유를 아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게임에 스탭롤이 있고 주로 싱글플레이 스토리모드가 끝날 때 스탭롤을 보여주는 게임은 스탭롤을 끝까지 보곤 하는데 이는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영화관에서 스탭롤이 시작될 때 몰려 나가는 사람들을 피해 좀 덜 복잡할 때 나가려고 스탭롤을 보기 시작했는데 한동안은 스탭롤 뒤에 쿠키 영상을 보여주기도 해서 그걸 기다리느라 스탭롤을 끝까지 보기도 했습니다. 지난번 존윅4를 봤을 때는 쿠키 영상의 존재를 모른 채로 스탭롤이 시작되고 좀 있다가 그냥 나오는 바람에 쿠키 영상을 보기 위해 영화를 한번 더 보기도 했고요. 그런데 영화 스탭롤을 살펴보면 현대에 영화 제작이 얼마나 잘 규격화 되어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 영화에 걸쳐 투입된 인원들은 그 인원이 해야 할 규격화된 일에 따라 표시되고 있었는데 이는 여러 영화가 비슷한 파이프라인에 의해 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게임 스탭롤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구분된 모양에 따라, 그리고 어떤 자원이 얼마나 동원되었는지에 따라 우리들은 생각보다 잘 하고 있다에서 설명한 것처럼 직접적인 자료가 없어도 개발 규모나 파이프라인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플레이 한 디아블로 4의 스탭롤에는 게임디자인 스탭이 여럿 보였는데 각 클래스 별로 담당자가 한 명 씩 할당된 점은 비슷한 게임을 국내에서 개발할 때의 접근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반면 클래스, 몬스터, 전투 액션, 월드 레벨디자인을 담당하는 여러 사람들과 별도로 인카운터 디자이너라는 항목에 여러 사람이 할당된 점이 흥미로웠는데 검색해 봤지만 정확한 업무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개발사의 잡 디스크립션으로 미루어 이미 제작된 클래스와 몬스터 집합 사이에 전투를 시작하는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일 것으로 예상합니다. 가령 의도적으로 좁은 공간을 만들어 전투 양상을 달리 하거나 몬스터 집합을 구성하는 몬스터 각각을 주의 깊게 선별해 근접 위주 공격과 원거리 위주 공격을 하는 플레이어들에게 서로 다른 접근을 하게 만드는 일종의 퍼즐을 만드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예상해 봅니다.

비슷한 관점에서 언처티드 4 스탭롤에서 흥미롭게 본 부분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챕터 갯수와 거의 비슷한 게임디자인 직군에 해당하는 사람 수,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아트 에셋 외주 제작사 목록입니다. 먼저 챕터 수와 거의 비슷한 게임디자인 직군은 그들이 종종 유명한 컨퍼런스에 나와 소개하거나 책을 통해 소개한 파이프라인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스토리라인을 완성하고 이를 챕터 단위로 구분한 다음 각 챕터에서 고객이 느낄 감정과 게임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설정한 다음 각 챕터를 담당자 한 명에게 할당하고 나면 담당자 각각이 스토리에 해당하는 세부 설정, 대사, 레벨디자인, 레벨에 해당하는 에셋 제작 요청, 조립, 플레이 등을 모두 직접 수행하는 방식으로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챕터 수와 스탭롤에 나타난 게임디자이너 수를 비교해 보면 이들 각각이 챕터 하나 이상을 개발하는데 직접적으로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메탈기어솔리드 5에서 메인 스토리라인에 해당하는 레벨을 플레이 할 때 레벨디자이너 이름이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파이프라인을 통해 개발했을 것 같습니다.

담당자 한 명이 챕터 하나를 온전히 책임지고 개발하는 방식은 어쩌면 꽤 이상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최상위 의사결정자과 직접 의견 교환을 하며 초기 요구사항을 발전 시켜 완결된 레벨디자인을 완성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야 할 게임 플레이, 등장인물의 대화, 플레이어의 감정 변화 따위를 챕터 제한 안에서 주의 깊에 설계하고 여기에 필요한 에셋 제작 요청을 하고 이들을 모두 조립해 챕터를 완성 시키는 과정을 사람 한 명이 완전히 통제해 완성도를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제작 방식은 비용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여러 대규모 MMO 게임이 코어 메커닉 개발을 담당하는 소위 전투 팀, 게임의 거의 모든 보조 메커닉 개발을 담당하는 시스템 팀, 그리고 이들이 만든 결과를 조립해 실제 게임 경험을 만드는 레벨디자인 팀으로 구분해 개발하는 이유는 이렇게 개발할 때 게임의 각 시점에 따른 경험을 대량 생산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전투는 전투에만 집중하고 시스템은 각 시스템의 실제 활용은 조금 덜 신경 쓰고 좀 더 범용적인 요구사항을 만족하는 시스템을 설계하는데 집중하며 이 결과를 레벨디자인에서 실질적으로 사용해 레벨디자인 관점에서 선택의 폭이 줄어들지만 그만큼 비용을 절감하고 적당한 수준의 컨텐츠를 개발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언처티드 4 방식은 먼저 챕터 단위로 책임자가 구분되므로 만약 챕터 간에 개발 현황이 철저하게 공유되지 않으면 서로 비슷한 요구사항을 서로 다른 모양으로 요구해 중복 개발이 일어나기 아주 쉽습니다. 규모가 큰 MMO 게임을 만들 때도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하는데 같은 결과를 해석하는 관점이 사람들마다 다르고 서로 뭘 만드는지 잘 모르는 상황을 방치하면 같은 결과를 내는 서로 다른 시스템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개발될 수 있는데 심지어는 같은 마일스톤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상황을 너무 늦게서야 눈치 챌 때도 있었습니다.

만약 한 챕터의 책임자인 한 게임디자이너가 챕터에 주인공을 뒤쫓아 올 장갑차가 필요해 장갑차가 움직일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이를 레벨디자인에 잘 반영하는 동시에 장갑차 에셋을 제작 요청했다고 해 봅시다. 만약 이 상황을 다른 챕터를 책임진 게임디자이너가 잘 모른다면 이 사람 역시 주인공과 좁은 골목에서 싸워야 하는 강력한 장갑차를 원했고 이번에는 좁은 골목에서 장갑차가 움직일 메커닉을 설계하고 여기 맞춰 레벨을 제작하는 동시에 장갑차 에셋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트 에셋 제작 요청이 한 곳에서 잘 통제된다면 서로 다른 레벨에서 같은 장갑차를 요청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이전에 제작한 장갑차 에셋을 공유하거나 두 요청이 한 가지 에셋 제작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파악해 이를 외주 제작에 반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조금만 실수하면 서로 거의 같은 에셋을 요청했지만 이 에셋이 서로 다른 외주사에 나가 서로 다른 결과를 만들고 비용이 중복해서 발생하는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게임디자이너 한 명이 서로 스토리 상으로만 연관될 뿐 영향을 주고 받지 않는 챕터를 전적으로 개발하고 관리하는 체계는 각각의 완성도를 올리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전체 비용을 줄이고 더 효율적인 개발을 해 필요한 노동력을 줄이는데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한편 스탭롤에 지나가는 게임디자이너 목록 외에도 눈길을 끄는 부분은 끝없이 이어지는 아트 에셋 외주 제작사 목록이었는데 암만 생각해도 언처티드 4는 볼륨이 아주 풍부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볼륨이 크다고 말할 만한 게임이라면 아주 넓은 오픈월드에 기반한 유비소프트 게임이나 GTA 같은 게임을 볼륨이 크다고 말하곤 합니다. 아니면 노맨즈스카이처럼 거대한 볼륨에 기술적으로 접근한 사례 역시 볼륨이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던전마다 완전히 다른 기믹과 완전히 다른 에셋을 풍부하게 사용한 MMO 게임 역시 볼륨이 풍부하다고 표현하곤 합니다. 반면 언처티드 4는 대략 스무 개 정도 챕터가 있고 챕터에 따라 꽤 넓은 공간이나 꽤 정교한 공간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들의 합계가 아주 많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다음 자동차를 타고 꽤 넓게 트인 공간을 달리거나 꽤 큰 도시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자동차를 타고 미친 듯 달리는 장면들은 분명 아트 에셋을 대량으로 요구할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총 합을 두고 볼륨이 크다고 말하기에는 요즘 게임의 볼륨이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엄청난 외주 제작사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이 많은 외주 제작사는 같은 부분을 다시 제작하기 위해 필요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만약 게임의 여러 부분을 다시 제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까지 많은 외주 제작이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스무 개 남짓 한 챕터를 제작하기 위해 처음 에셋 제작을 요청해 레벨을 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개발팀 전체가 그 제작 행위 자체에 기반한 연구를 거듭하게 되고 그 결과 이전에는 잘 몰랐던 노하우를 쌓게 됩니다.

노하우를 더 많이 습득한 상태에서 이전에 제작한 레벨을 살펴보면 개선할 부분이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규모가 큰 MMO 게임을 개발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곤 하는데 초반에 제작한 던전에서 경험하는 전투는 중후반에 개발한 레벨에 비해 경험이 빈약하고 초라하거나 이후 깨달은 영리한 메커닉을 경험할 수 없어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낮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레벨들을 다시 작업하기로 결정하면 그 때부터 통제하기 어려운 초과 노동이 시작됩니다. 언처티드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거라고 예상하는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 않는 챕터를 각 책임자가 개발하는 구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쌓이는 노하우를 반영해야 할 압력을 더 강하게 느끼게 만들어 프로젝트 전체를 반복되는 재작업의 굴레에 빠뜨리기 쉽습니다.

이 게임에는 중간에 여러 번 전투를 경험하게 되는데 전투 때마다 경험하는 적들은 각 레벨에 따라 그럴듯하게 움직이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아마도 각 레벨에 의존성이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적들은 짧은 절벽 사이를 그럴듯하게 점프해 이동하고 기둥 주변에서 그럴듯하게 주변을 살피며 벽에 기대고 다른 적들을 가볍게 밀치며 이동하는 등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레벨마다 잘 규격화 되지 않은 사물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만들기 위해 레벨에 의존성을 가지고 움직여 한 레벨에서 제작한 적의 움직임을 바로 다른 레벨에 적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전에 없던 레이저 조준을 하는 스나이퍼를 적에 추가하기로 결정하면 MMO 게임 파이프라인에서는 그저 등장하는 몬스터 목록에 스나이퍼를 추가하고 이들을 레벨에 배치하면 끝이지만 레벨에 의존성을 가지도록 하려면 일단 스나이퍼를 레벨에 배치한 다음 이들의 행동을 레벨에 맞게 다시 튜닝해야 합니다. 만약 스나이퍼가 그럴듯하게 숨어 있을 위치의 레벨을 자연스럽게 수정하기를 원한다면 재작업 요청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게임에 등장하는 여러 규모가 큰 퍼즐은 분명 에셋 없이 메커닉을 개발하는 단계가 있었겠지만 일단 에셋이 제작되어 반영되고 나면 에셋 의존성이 너무 커져 수정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게임의 여러 퍼즐은 같은 뜻을 가지고 한 곳에 모인 해적들 각각에 모티브를 두고 만들어졌는데 미리 시나리오를 철저히 써 놨다면 문제가 적겠지만 만약 중간에 새로운 해적 한 명을 추가해야 한다고 결정하는 순간 과거의 해적 개개인에 모티브를 두고 만들어진 퍼즐들은 완전히 다시 만들어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한 퍼즐의 각 단계를 해결해 나감에 따라 해적들의 핵심 인물의 석상이 하나 씩 나타나는 퍼즐은 석상 각각이 레벨디자인에 완전히 융화된 아름다운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만약 여기에 해적 석상이 하나 더 나타나야 한다면 단순히 석상 하나를 더 배치하고 이에 해당하는 퍼즐 메커닉을 추가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들이 배치될 공간 전체를 완전히 재설계하고 이에 따른 제작 요청이 다시 나가야만 합니다.

개발 후반으로 갈수록 노하우가 쌓이고 이전에 개발한 레벨의 재작업 압력이 높아지며 이에 따라 아트 에셋 제작 요청 역시 늘어나고 제한시간 안에 개발을 마치기 위해 인하우스 인력의 초과노동과 아트 에셋 제작사 목록이 길어지는 상황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런 결과는 분명 대단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제작 파이프라인은 효율적으로 동작하게 만들기 아주 어렵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팀에 축적되는 노하우가 게임 전체를 개선하기는 하지만 아주 소모적인 방법으로 개선해 완성도는 높지만 볼륨에 비해 아주 높은 제작비와 아주 높은 초과 노동을 통해서만 제작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핵심 메커닉을 레벨 독립적으로 개발하고 범용성이 높은 시스템 설계에 기반해 동작하는 개발 파이프라인은 그 시각적인 결과가 언처티드 수준으로 훌륭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도 거대한 볼륨을 개발할 수 있으며 재작업 요구가 상대적으로 적어 개발기간과 비용을 좀 더 예측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아마도 최근에 플레이 한 디아블로 4는 이런 방식으로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작자들이 공개한 뒷 이야기나 컨퍼런스에 나와 이야기한 발표 따위로 미루어 엄청난 초과 노동과 거대한 재작업, 이를 뒷받침하는 개개인의 희생과 엄청난 제작비를 바탕으로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제작 파이프라인이 지속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영화관에서 영화가 끝난 다음 스탭롤을 살펴보며 꽤 잘 정규화 된 것처럼 보이는 파이프라인과 이에 기반한 인력 배분은 게임 업계에서 이를 흉내내지 못할 이유가 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게임 업계에서는 주로 연구개발에 대한 인식이 나빠 완성된 게임 없이 연구개발에 집중하는 시도를 하기 어려워 일단 특정 게임 개발을 시작한 다음 실제 제작 과정에서 노하우를 발견하기 때문에 이를 개발 중인 빌드에 반영하는데 비용이 높습니다.

만약 한 게임을 개발하며 발견한 노하우를 다음 게임에 반영하거나 이번 게임의 현 시점부터 반영한다면 특정 게임과 완전히 연결되지 않은 연구개발을 등한시 한다 하더라도 게임 출시와 비용 절약을 함께 달성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독한 초과노동을 반복해 업계 전체에 대한 인식이 나빠져 점점 더 인력을 수급 하기 어려운 상황을 개선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들이 잘 하고 있다기 보다는 그들이 엄청나게 못하고 있고 그 못함을 초과 노동과 높은 제작비로 커버 하는 상황에서 우리들의 장점을 살릴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글 전체가 뇌피셜이라는 전제 하에 스탭롤에 나타난 게임디자인 인력 수와 게임 볼륨으로 미루어 챕터 하나를 독립적인 게임디자인 담당자 한 명이 책임지는 형태로 개발을 진행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형태는 각 레벨의 완성도를 올리고 개발 중 획득한 새로운 노하우를 게임 전체에 적용하는데 좋은 접근이지만 제작 후반으로 갈수록 쌓이는 노하우와 변경된 요구사항으로 인한 재작업 요구에 취약하며 재작업 비용이 아주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한된 기간 안에서 재작업은 인하우스에 초과 노동 압력을, 외주 제작에는 새로운 제작사를 섭외해야 하는 어려움을 일으키는데 여기에 필요한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을 때 이런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훌륭하기는 하지만 이런 제작 방식이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임 제작과 연구개발을 분리하거나 이번 개발을 통해 획득한 연구개발 결과를 다음 개발에 반영하는 방식을 통해 제작비를 줄이고 장기적으로 퀄리티를 올릴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