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 게임을 만드는가
저는 게임을 통해 고객에게 감정적 변화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 게임을 만듭니다. 적어도 이런 관점과 자세를 가지려고 합니다.
지난 권고사직을 통해 지난 2년여 동안 시도했던 인게임 재화를 게임 바깥에 연동 시켜 기회를 찾으려던 시도는 적어도 제 개인 수준에서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어느 화요일 오전 모든 직원들은 탕비공간 근처에 있는 긴 테이블 주변으로 모였고 전 날 공지된 대표님으로부터 중요한 공지사항을 전달 받았습니다. 사실 올해 내내 진행하던 투자가 최근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들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처음 계획대로 투자가 진행되더라도 이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런웨이는 전통의 게임 업계 기준으로는 그리 충분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어느 시점에는 다음 라운드 투자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계획했던 목표는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지금 상태로는 올해를 넘기기 어려운 상태에 도달합니다.
이 투자가 왜 잘 진행되지 않았을지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은 앞에 링크한 권고사직에 다루고 있으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유튜브로 영상을 한참 보는데 이전에 다룬 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오른쪽 위에 표시된 카드를 눌러 보시라는 말을 듣고 지금 보던 영상을 끊고 카드를 눌러 봐야 할 지 아니면 그냥 저 주제에 대해 잘 모른 채로 현재 영상을 계속해서 봐야 할 지 고민하다가 그냥 후자를 선택하는 분들이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실은 제 스스로도 오른쪽 위에 표시되는 카드를 거의 누르지 않고 그냥 현재 영상이 재생되도록 놔 두곤 합니다.
그래서 짧게 요약하면 코비드 국면 이전부터 시작된 크립토 업계의 호황은 일시적으로 그게 무엇이든 블록체인에 등록 되기만 하면 그것이 미래에 어떤 가치를 가진다는 이상한 믿음 하에 관련 산업에 큰 투자가 일어났고 이들 중 일부는 의미 있는 경제적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현재 제품을 가지고 있거나 제품을 개발할 팀이 없더라도 블록체인에 근거한 미래에 대한 기대를 판매해 법정화폐를 획득한 다음 사라져 버리는 러그풀 - 계획된 사기에 대한 크립토 업계의 표현 - 이 쉴 새 없이 일어났고 이 때 돈을 낸 고객들 거의 대부분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편 이때 인게임 재화나 인게임 자원, 인게임 가상 부동산 등을 블록체인에 기반해 게임 외부에 연동하려던 게임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극 초반에 진입한 일부는 의미 있는 경제적 성과를 이뤘지만 블록체인 관련 스킬을 확보했을 뿐 비디오 게임 개발에는 경험이 없는 팀들이 극초반의 성공 사례를 확장해 복제하려 하다가 큰 실패를 거둡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여러 크립토 게임 프로젝트들이 시도됐는데 전 세계 기준으로는 조금 늦었지만 동아시아, 그리고 한국 기준으로는 그렇게 까지 늦지는 않은 시점에 우리들도 인게임 자원을 게임 외부에 연동한 제품을 개발하기로 합니다. 프로젝트 외부 환경은 프로젝트에 참여한 2022년과 2023년에 서로 완전히 달라졌으며 시장은 사기가 난무하며 사용자 및 개발자 적대적인 블록체인 사용 환경을 개선하려는 새로운 지갑 서비스나 온램프 서비스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질 뿐 기존 제품을 블록체인에 연동해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크립토 게임 개발을 위해 전통의 게임 업계에서 모인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시 힙한 키워드였던 크립토 게임, 그리고 메타버스를 구축하려고 했고 이들이 영양가가 없는 언어임을 깨달은 다음에는 결국 메타버스에 도달하되 고객들이 이를 사용할 이유가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는 투자자가 상상하던 메타버스나 크립토 게임의 모습과 거리가 있었고 결국 프로젝트는 크립토 업계도, 전통의 게임 업계도 만족 시키지 못하는 애매한 프로젝트가 되어 런웨이를 확보하기 위해 인원을 비용 순서로 정리했습니다.
자. 이제 링크에 글을 모두 요약했으니 다음으로 넘어가 이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하던 고민을 잠깐 짚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 블로그와 뉴스레터를 읽어 와 주신 분들은 지금 제가 또 무슨 이야기를 반복하려고 하는지 이미 눈치 채셨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바로 다음 문단으로 건너뛰시면 됩니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가요?에서 게임, 그 중에서도 시스템디자인 혹은 테크니컬 디자인을 업으로 삼아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가운데 그 설계를 담당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입장에서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들이 젊을 때 일을 그만 두고 다른 업계로 떠나는 세계에서 나이 든 다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 남는 그 자체를 목표로 삼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게임디자인에 강한 재능이 있는 분들은 디렉터가 되기도 하고 업계에 넓은 네트워크를 만드는데 성공하신 분들은 프로듀서가 되기도 하는 반면 저 자신은 그 중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요구사항을 구현 가능한 소프트웨어 설계로 바꾸는 일을 적어도 업계 안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해낼 수 있고 이대로 업계에 살아 남아 버틸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디렉터나 프로듀서로 도약이 아니라 이 일 자체에 전문성을 가지고 파고들며 변화하는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업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그 중심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 근처에라도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업계에서 모바일 게임을 처음 개발하려고 할 때, 또 모바일 수집형 장르가 나타나 여러 프로젝트가 이를 복제하려고 할 때, 또 모바일 리니지 장르가 엄청난 경제적 성공을 거두며 모두가 이를 복제하려고 할 때 그 중심에 있지는 못하더라도 그 근처에라도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인게임 재화를 게임 밖으로 끄집어내 기회를 찾으려는 시도가 다음 변화라고 생각했고 이번에도 그 중심은 아니더라도, 또 퍼스트 무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근처에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2년이 흐른 다음 미래를 알고 있는 저는 이전의 그 선택이 올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뭔가 있을 것 같았던 그 분야에는 아주 조금 과장해서 ‘아무 것도’ 없었고 시장에 남은 것은 플랫폼을 구축하는데 관심이 있는 플레이어들과 제품 없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도 이를 검증할 수 없지만 이 소리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시끄러운 파티를 일삼는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한편 이런 생각을 하던 차 과거에 전통의 게임 업계에서 오래 일하신 어느 디렉터님이 페이스북에 남기셨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정확한 문장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략 자신에게 주변으로부터 왜 블록체인이나 NFT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가져 보지 않느냐, 왜 그런 발언을 하지는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그 분야의 성장 잠재력을 부정하지 않지만 게임을 만드는 사람으로써 그런 키워드가 고객에게 어떤 경험을 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기 때문에 이 주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약간 치기 어린 심정으로 그럼 직접 제가 가서 뭘 할 수 있는지 알아보면 되겠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똥과 된장을 구분하기 위해 꼭 찍어 먹어 봐야 했나 싶은 생각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은 전통의 게임 업계에서 시작해 그리 짧지는 않은 기간에 걸쳐 게임을 만드는데 참여하면서 생각해 온 우리들이 게임을 통해 고객에게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이미 이 생각을 한번 해 봤기 때문에 이 생각을 하다 보면 전통의 게임 업계 관점에서 메타버스가 왜 공허한지, 그리고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크립토 게임이 왜 극초반에만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그 다음에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고 단지 러그풀에만 성공할 뿐인지에 대한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저는 그 이유를 제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이제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머릿속으로만 과거로 돌아가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비디오 게임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게임 경험과 현재 게임 경험의 차이, 과거 경험 미화를 경계하기를 통해 함부로 과거를 돌아보고 이를 미화하려는 행동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지만 이번 이야기에 한해서는 저 개인 관점에서 인생에 영향을 끼친 게임들을 살펴보고 미래 사람인 지금의 제가 이를 미화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채로 이야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게임은 윙 커맨더 4, 원숭이 섬의 비밀, 그리고 리븐입니다. 윙 커맨더 4는 지금 보면 인터랙티브 비디오, 그리고 슈팅에 가까운 장르이지만 그 시대 기준으로는 시뮬레이션으로 취급했습니다. 당시 처음 대용량 저장매체가 나타났지만 업계에서는 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디스크 여섯 장 분량의 음악과 영상을 포함한 무지막지한 볼륨으로 세계를 당황하게 했고 또 인터랙티브 무비 장르는 이로부터 이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넷플릭스에서 밴더스내치를 공개할 정도로 앞선 경험이었습니다. 이 게임 이후 본격적으로 시뮬레이션 장르를 거치며 미래 시대의 메커닉, 자동차, 비행기, 헬리콥터, 탱크, 잠수함 등 실제 세계에서 한 사람의 평생에 걸쳐 모두 경험해 보기 힘든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얼마 전에 이들 중 하나를 다시 해 보려고 했는데 현대 관점에서 이들은 도무지 엔터테인먼트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가 없었는데 그 때는 그렇지 않았고 현대에 이런 감정은 유로트럭 시뮬레이터를 하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 원숭이 섬의 비밀은 이 게임을 플레이 했을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종이로 된 영어사전을 끼고 화면의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 가며 느리게 플레이 해야만 했습니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장르인 이 게임은 등장인물들이 대사를 할 때마다 음성으로 대사를 한 다음 대사 자막을 띄우고 그 다음 행동을 선택하도록 대기했기 때문에 사전을 찾아볼 시간이 충분했을 뿐 아니라 사전을 찾으며 인물들이 방금 말한 대사를 의미도 잘 모르면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위에서 소개한 윙 커맨더와 이 게임을 합쳐 얻은 간단한 영어 실력은 이후 수 십 년에 걸쳐 인생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현대의 개인적인 관점으로 이 게임을 다시 설펴보면 여러 장면의 돌파 방법은 도무지 이해 되지 않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 장면에서 이 아이템을 사용할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만약 공략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이걸 생각해 내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는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게임을 플레이 하던 저는 일부 공략을 참고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인물과 상황에 있는 힘껏 몰입해 이들의 행동을 생각해 낸 개발자들의 의도를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은 마치 어드벤처 장르라기보다는 개발자들의 의도를 따라가는 추리물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리븐입니다. 저 유명한 미스트를 플레이 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계보의 거의 마지막 게임인 리븐을 플레이 하며 이 게임을 인생에 큰 영향을 준 게임으로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바로 위 원숭이 섬의 비밀과 달리 이 게임을 플레이 할 때는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게임이 제시하는 퍼즐을 스스로 풀어 그 끝에 다다랐다는 점, 그리고 망원경을 하늘이 아니라 땅으로 가리키는 그 생각이 아주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은 문자를 거의 읽을 필요가 없어 게임에 나오는 퍼즐 대부분은 언어에 기반하지 않았고 이전에는 플레이 하다 막히면 영어사전을 부여잡고 고통 받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순전히 기억과 메모, 반복, 그리고 끈기 이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습니다. 분명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게임에는 울티마 시리즈 같은 롤플레잉 게임을 넣을 수도 있었겠지만 리븐은 오직 머리와 종이와 펜과 손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개발자들의 의도에 도달하는 경험을 하게 해 준 게임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게임에 대한 경험은 고객이 게임을 구입하며 기대하는 것은 실제 세계에서는 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렵거나 상상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경험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실제 세계에서 저는 랠리카를 운전할 수 없고 잠수함에 탈 수도 없으며 김포에서 제주로 가는 민항기를 조종할 수도 없고 브리타니아의 모험가 중 한 명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게임을 통하면 리버티 시티에서 지나가던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폭행하는 범죄자가 되어 지나가는 아무 차량을 강탈하다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택시를 강탈해 택시 운전을 하기도 하고 갱단과 총격전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이 경험이 영화와 가장 다른 점은 영화는 이런 경험을 하는 화면 속 주인공을 바라볼 뿐이지만 게임 속 주인공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제가 직접 주인공을 움직이지 않는 이상 주인공은 움직이지 않으며 그 모든 행동을 제 스스로 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게임에서 게임 속 주인공을 대리 삼아 살인을 저지르다가도 맨헌트를 플레이 하려다가 멀쩡한 지나가던 사람을 죽여 쓰레기통에 던져 넣다가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더 이상 플레이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나서 처음에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게임 개발은 지독한 노동 집약적인 일이었고 회사는 그에 발맞춰 불법이 아닌 수준에서 가장 낮은 임금과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일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의 운명은 개발 중인 게임의 개발 지속, 런칭, 서비스 지속에 달려 있었으며 이들 중 어느 하나만 삐끗 해도 회사는 우리들을 순식간에 해고했고 이는 계약직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정신 없이 살다가 이 생활에 조금 익숙해져 프로젝트가 터지던 날의 경험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자 그 즈음부터 조금씩 우리가 게임을 통해 고객에게 전달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들은 회사에 고용되어 회사가 원하는 게임을 개발하는 일을 해 그 댓가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안에서도 고객에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다 보면 제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의사결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 끝에 적어도 제 관점에서 게임은 이를 플레이 하는 고객들에게 어떤 경험을,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의도한 어떤 감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가령 먼 옛날 윙 커맨더 4를 플레이 할 때 플레이어는 임무 수행을 위해 민간인 수 천 명을 죽게 만드는 결정을 하거나 이 결정을 하지 않음으로써 동료 파일럿 여러 명을 아주 큰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인생의 원수인지 아니면 이쯤 되면 동반자인지 잘 알 수 없는 리척의 정체를 알았을 때 든 당황스러움, 리븐에서 시작하자마자 조그만 방 안에 갇힌 채 3분의 1바퀴 씩 움직이는 방을 주의 깊게 돌려 원하는 방향의 출구를 만들어냈을 때 느낀 희열 같은 감정은 이를 제 스스로 조작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고서는 경험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계를 위해 어떤 게임을 만들든 어떤 의사결정을 하며 어떤 요구사항을 설계하든 이 결과가 고객들에게 어떤 감정적 경험을 줄 수 있다면 게임을 만드는 사람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봅니다.
지난 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가요?라는 질문을 받은 자리에서 받은 또 다른 질문은 지금까지 플레이 한 게임 중에 가장 큰 감정적 경험을 준 게임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 자리는 탈락한 면접 자리였는데 그냥 바쁘게 일하다 보면 이런 생각을 잊고 지내곤 합니다. 그러다가 면접 자리에 가서 갑자기 저런 질문을 들으면 당황하곤 하는데 이 때도 그랬습니다. 게임으로부터 겪은 감정적 변화.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번아웃이었는데 스테이지 1위를 차지하기 위해 상당히 공들여 연습했고 이번에는 실수를 거의 하지 않고 완벽하게 랩을 돌고 있었으며 피니시 라인이 거의 0.5초 앞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옆 차가 제 차를 들이받았고 저는 공중에 떠서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지만 이는 이미 경쟁 차 두 대가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시점이었습니다. 완벽한 랩을 돌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기대가 깨지자 즉시 화가 났고 바로 이어 어처구니 없는 감정을 느꼈으며 기계한테 화를 낸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이어졌는데 이 감정의 물결은 대단했습니다. 물론 질문자가 원한 답변은 이런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답변이야말로 탈락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한편 이런 관점에서 가장 최근에 실패한 프로젝트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제가 게임을 통해 고객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감정의 변화에 대한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이전 프로젝트에서 인게임 자원을 게임 바깥에 노출 시킴에 따라 고객이 게임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수익입니다. 액시인피니티 초기 참여자들은 NFT 모양으로 된 액시 - 일종의 포켓몬 - 를 구입해 게임을 시작하고 플레이 함에 따라 이들을 교배해 새로운 액시를 만들어 블록체인 상에 등록해 판매할 수 있습니다. 게임은 흔하디 흔한 속성 기반 턴 방식 전투에 불과한데 게임을 만들며 속성이야말로 더 이상 쓸만한 메커닉이 없을 때 하는 수 없이 선택하는 딱히 아주 재미있지는 않지만 또 아예 실패하지도 않는 좀 부끄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메커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이 전투에 어떤 대단한 경험이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 하며 새로운 액시를 만들어낼 수 있고 나중에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을 법정화폐를 받고 판매할 수 있다는 점은 게임을 먼저 시작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게임에 접근한 사람들은 게임으로부터 오직 수익을 기대한 것일까요? 대체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게임이 게임으로써 어떤 재미를 주거나 고객들에게 어떤 감정적 변화 경험을 줄 수 있었다면 이 게임이 단지 동아시아 지역에서만 인기를 끌며 단지 참가자들의 자산을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전 시키는 역할을 하다가 끝나는 대신 좀 더 넓은 지역에 걸친 다양한 고객들이 나타났을 겁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게임을 통해 뭔가를 경험하려는 고객 대신 게임을 시작할 때 더 많은 법정화폐를 들여 등급이 높은 액시로 게임을 시작해 단위 시간 당 수익을 극대화 하려는 고객들로 가득했고 뒤에 진입한 고객들도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겁니다. 이 파티에서 누군가는 올바른 의사결정과 적절한 운을 통해 경제적 성과를 달성했지만 뒤로 갈수록 그런 사람들은 줄어들었고 삶을 피폐하게 만들며 게임을 계속하며 이제는 누구도 구입하지 않을 액시 NFT를 찍어내기를 반복하거나 법정화폐를 공급하는 그룹에 속해 노동력을 제공하고 게임과는 무관한 법정화폐를 획득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우리들에게 더 익숙한 용어는 ‘작업장’일 겁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제가 직전에 만들려고 했던 프로젝트는 어땠을까요. 사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단순한 아바타 NFT 세일, 그리고 랜드 NFT 세일에 스토리를 부여하고 실제 어떤 적당한 재미를 줄 수 있는 메커닉을 도입해 슈터 장르를 플레이 하면서도 일종의 롤플레이를 통해 NFT를 획득하고 거래하는 모습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또 이런 세계에 NFT에 기반한 외부 에셋이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상호운용성을 위한 마이그레이션 환경을 제공해 프로젝트가 처음 시작될 때 시장을 휩쓴 메타버스에도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설계한 인게임 재화의 순환 구조, 토크노믹스, 인게임 경제와 아웃게임 경제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여러 안전장치는 일단 제품을 개발하는 우리들의 수익, 게임 상에서 고객들의 성장, 나아가 성장을 블록체인을 통해 캐시아웃 할 수 있도록 하되 게임이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재화의 소유권이 이전 되어 인게임 경제를 망가뜨릴 가능성을 최소화하는데 가장 큰 목표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는 널리 알려진 대로 국내법 상 불법이어서 애초에 국내에 서비스 할 계획이 없었으며 서비스 한다 하더라도 블록체인에 근거한 캐시아웃 메커닉을 제거한 버전을 서비스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지난 게임을 통해 고객에게 제시하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전까지 생각해 오던 경험은 분명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게임의 어느 부분은 이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또 다른 부분은 분명히 캐시아웃을 통한 수익을 처음부터 염두해 두고 있었고 우리를 바라보는 잠재 고객들, NFT 홀더, 투자자들, 잠재 투자자들, 여러 게이밍 길드와 온갖 커뮤니티들은 우리가 만드는 제품으로부터 경험 대신 뭔가 다른 것을 원한 것 같습니다.
만약 런웨이를 확보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어쨌든 제품을 완성해 우리를 둘러싼 여러 이익집단의 기대를 충족할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비용을 극도로 줄여 런웨이를 확보한 현 시점에도 여전히 이 임무를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지난 2년여에 걸쳐 만든 그것은 제 관점에서는 이전에 만들던 것과 비슷한 게임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접근하려고 노력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저 자신, 우리들을 둘러싼 그 바깥의 이익집단들은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이제 위에서 게임을 만들려고 하던 저 자신, 그리고 저를 둘러싼 사람들이 실패한 이유, 그리고 게임 관점에서 메타버스와 크립토 게임 중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둔 사례가 왜 없거나 거의 없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전통의 게임 업계 관점에서 게임은 고객에게 어떤 감정적 경험을 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객들은 이를 기대하고 우리에게 돈을 냅니다. 그런데 이런 게임 관점에서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는 메타버스는 고객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또한 같은 관점에서 크립토 게임은 전통의 게임과는 완전히 다른 기대를 받고 또 이에 부응해 완전히 다른 것을 고객에게 줘야 합니다. 때문에 전통의 게임 관점에서 이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게임 만드는 사람들이 이들을 온전히 설계하고 또 개발해 내기도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너무 올드스쿨 한 관점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일하는 이유는 결국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고 그러려면 회사가 돈을 벌어야 하며 회사가 돈을 벌려면 고객들이 우리가 만든 제품에 돈을 내 주셔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고객들의 목적이 경험이든 수익이든 회사가 돈을 벌 수 있으면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을 통해 인생에 남을 인상 깊은 경험을 하고 저 자신이 그런 경험을 만들어내는데 참여할 수 있기를 평생에 걸쳐 기대하는 입장에서 조금 쯤 올드스쿨에 가까운 관점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전통의 업계로 돌아가 다시 고객들에게 일생에 걸친 인상적인 경험을 줄 수 있는 뭔가를 만들 수 있을 때까지 개발에 참여하며 기다릴 작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