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회의는 왜 망했을까

간만에 망한 회의를 경험했고 이번엔 왜 망했다고 느꼈는지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그 회의는 왜 망했을까

회의는 비쌉니다. 회의를 한 시간 동안 할 때 들어가는 비용을 대략 생각해봅시다. 먼저 회의를 하기 위해서는 회의실이 필요한데 강남역 사거리에 있는 그럴듯한 오피스빌딩 한 층을 한 달 동안 임차하는데 보증금을 무시하고 대략 5천만원 정도가 필요합니다. 대략 열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고 커다란 테이블 하나가 들어가는 회의실은 약 11평 정도라고 합니다. 오피스빌딩 한 층 크기가 약 200평이라고 가정하면 이 회의실 한 칸은 전체 공간의 약 5.5%를 차지합니다. 이 회의실 한 칸의 하루 당 부동산 비용은 약 9만 2천원, 그리고 한 시간 당 부동산 비용은 약 4천원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강남역 근처 오피스 빌딩에서 10명이 들어갈 회의실 한 칸을 한 시간 동안 사용하면 최소 4천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회의실만 있어서는 회의를 할 수가 없으니 이제 회의실에 사람들을 들여 보낼 차례입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기반 기업은 신입사원 연봉이 5천만원 정도부터 시작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이전 나를 얼마에 팔 것인가에서 제 연봉을 까겠다고 어그로를 끈 다음 맨 첫 회사에서 일을 시작할 때 받은 연봉을 깠는데 그에 비하면 굉장한 첫 연봉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단순 비교로는 아주 높은 첫 연봉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리 충분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이 금액이 국내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기반 기업의 이야기일 뿐이어서 한편으론 슬프기도 합니다. 바로 위에서 알아본 시간 당 4천원 짜리 회의실에 들여 보낼 한 사람의 연봉은 이 5천만원으로 가정하겠습니다. 세전 5천만원은 월급으로 환산하면 세전 416만원 정도이고 이를 휴일을 포함한 월 30일, 그리고 하루 8시간으로 계산하면 세전 시급 약 1만 7천원 정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회의실에 한 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 1만 7천원이 소요됩니다.

자. 이제 시간 당 4천원 짜리 회의실에 시간 당 1만 7천원 짜리 사람을 몇 명 들여보낼지 정해야 하는데 한 시간 짜리 회의 비용을 설명하려는 입장에서는 최대 인원인 10명을 집어 넣고 싶지만 그건 최악의 경우라고 생각하고 지난 번에 제가 겪은 망한 회의에 참여한 실제 인원인 일곱 명을 적용하겠습니다. 그러면 강남역 근처 그럴듯한 오피스빌딩 한 층을 임차한 어떤 회사의 약 10평 짜리 회의실에 일곱 명이 모여 한 시간 동안 회의하면 아무런 결과 없이 회의실 안에서 일곱 명이 숨을 쉬며 산소 농도를 낮추고만 있어도 약 12만 6천원이 소요됩니다. 처음 이 계산을 시작할 때는 그냥 감각적으로 회의실 자체의 부동산 비용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회의실 자체의 부동산 비용은 예상만큼 높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 회의실 안에서 회의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임금은 적지 않습니다. 또한 이 계산에는 초기 인테리어 비용이나 집기 구매 비용, 그리고 회의실 내에 설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터나 커다란 모니터, 원격 회의 장비, 에어컨 따위의 가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이들을 계산에 포함하고 또 이들이 사용하는 전기요금을 고려한다면 한 시간 짜리 회의에 필요한 비용은 적어도 12만 6천원 보다는 더 높을 겁니다.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회사 입장에서 일곱 명이 수행하는 한 시간 짜리 회의에는 최소한 13만원이 소요되므로 회의를 줄이고 또 회의 시간을 단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회의는 반드시 생산적이어야만 하고 목표가 있어야 하며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모든 회의가 항상 생산적이지는 않습니다. 어떤 회의는 단지 의사결정에 따르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실제 의사결정을 수행한 단 한 사람을 지목하기 어렵도록 여러 사람을 회의실에 모은 다음 결론을 내리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회의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다고 너무 정확한 회의록을 작성하면 의사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는 보스로부터 혼날 수 있으니 분위기를 파악해 적당한 수준으로 회의록을 작성하는 회사원의 지혜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회의는 뭔가 문제 상황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갈피를 전혀 잡지 못한 상태에서 일단 다들 방 안에 들어와 모여 앉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바람에 회의가 끝날 때 까지 각자가 마치 술자리에서 한창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자기 할 말만 반복하다가 끝나 긴 회의록만을 남기고 아무런 액션 플랜도 남기지 못하는 회의를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회의는 그저 정리된 문서를 살펴보고 내용을 파악하기만 하면 될 일을 굳이 문서를 작성한 누군가가 문서를 화면에 띄워 놓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문서를 읽어 모인 사람들이 문맹일 가능성을 고려한 행동을 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런 회의는 생각보다 많아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문맹인 사람을 고용하고 있는지 종종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이런 여러 쓸모 없는 회의는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대강 시간 당 13만원 정도가 들며 특히 마지막에 소개한 문맹인 사람들을 고려한 문서를 읽어주는 회의의 경우 보통 계산에 가정한 일곱 명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부동산 비용 뿐 아니라 각자에게 지불할 시급 역시 올라가 회의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집니다. 그런 무의미한 회의라도 그나마 회의의 핵심 목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마냥 비용의 낭비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령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고려해 문서를 읽어주는 제가 종종 ‘낭독회’라고 부르는 종류의 회의라도 낭독을 통해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문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앞으로 그 이해에 기반해 업무를 수행해 나갈 수 있다면 회의의 핵심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의실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소모했으면서도 결국 결론은 ‘다음 회의 때 다시 이야기하자'는 정도로 끝났다면 회사의 최소 13만원을 횡령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회사로부터 13만원을 직접 내 계좌로 옮긴다면 이건 명백한 범죄이지만 똑같이 회사의 13만원을 낭비하게 만들었지만 이 경우에는 범죄도 아니고 처벌 받지도 않는다는 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회의 목표를 달성하지도 못하고 또 바퀴벌레 같은 질문을 쏟아내며 회의 시간을 늘리면 과연 회사 돈을 횡령하는 것과 지금 이 회의 중 어느 쪽이 더 실제 회사에 더 큰 손해를 입히는지 헛갈릴 지경입니다.

우리는 회사에 고용되어 일을 한 댓가로 급여를 받아 생계를 유지합니다. 회사가 우리에게 급여를 주려면 회사는 돈을 벌어야 하고 회사가 우리들을 고용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 동안 효율적으로 일해 회사에 돈을 벌어다 줘야만 급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회사가 우리들에게 적절한 임금을 지급하고 또 우리들이 다른데 신경 쓰지 않고 업무에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 냉장고에 무료 음료를 채워 놓고 커피를 제공하며 무료 스낵을 쌓아 놓도록 만들려면 우리들의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회사에서 사용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여러 접근 방법과 여러 관점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그 중 하나가 바로 회의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요하지 않은 회의는 아예 일어나지 않게 만들고 부득이하게 회의를 한다면 최대한 짧게, 시작할 때 반드시 회의의 목표를 숙지하고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야 하며 회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낭독 과정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려면 회의 정보를 미리 공유해 회의를 시작하자 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모여 사용하는 비용을 최소화하고 또 목적을 달성한 다음 회의를 마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최근에 경험한 한 회의는 개인적으로 ‘망한 회의’로 정의하는 종류의 회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망한 회의’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면 상당히 불편해 하는데 그러면 반문하곤 합니다. 방금 한 그 회의를 망한 회의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굳이 다른 표현을 찾는다면 ‘공금 횡령 행위’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표현하면 ‘망한 회의’에도 불편해 하는 분들을 더더욱 불편하게 할 것 같아 실제로 이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제 기준에서 망한 회의의 핵심은 회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거나 회의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회의를 말합니다. 이 날 경험한 회의는 먼저 회의 주제가 지금까지 서로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자는 것이었는데 일단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했고 또 각자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는 회의이면서도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진행 상황이 아예 공유되지 않아 회의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회의 때 공유될 문서를 회의실 앞에 놓인 커다란 모니터를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유 이외의 목적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공유했다면 이 행동을 통한 다음 목표를 정해야 할 것 같았지만 공유 행동은 그저 공유를 통해 서로가 부실한 수준으로나마 알게 된 새로운 정보가 적당한지 판단하기를 요구했고 모든 사람들은 방금 입수한 정보를 판단할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캐릭터 성장이 포함된 게임을 설계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뻔한 MMO 장르의 성장과 별로 다르지 않은 성장을 설계하면서도 시장 전체에서 복제하려고 노력 중인 다른 게임들의 장점을 복제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시대에는 모든 회사들이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복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떤 회사는 출시 직전에 갑자기 출시를 1년 미루고 존재하지 않던 퀘스트 시스템을 만들고 여기에 들어갈 스토리를 쓰고 퀘스트 데이터를 넣고 복잡한 퀘스트가 잘 동작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1년 동안 엄청난 비용을 지출합니다. 또 다른 시대에는 모든 게임들이 도탑전기를 복제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동안 단순한 성장, 서로 영향을 심하게 끼쳐 망가질 수 있는 단순한 경제시스템을 설계하던 회사들이 도탑전기로부터 선형성장과 계단성장을 적절히 분배하고 또 고객들 하나하나, 그리고 시스템 하나하나 사이에 자원이 함부로 이동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하는 경제시스템을 복제해 고객들 각각에게 꽤 쏠쏠한 보상을 주면서도 게임 전체가 망가지지 않는 단단한 체계를 만들어냈습니다. 한편 또 다른 시대에는 모든 회사들이 모바일 리니지를 복제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미 리니지 시리즈는 모바일 리니지 이번부터 게임 프랜차이즈 이름이 아니라 게임 장르 이름에 가까웠습니다. 고객들을 강한 경쟁에 노출 시키고 이 경쟁에 반응하는 고객들 중 승자에게 권력 모양의 강한 보상을 주고 게임 내에서 이를 행사할 수 있게 만든 이 장르는 런칭 후에도 대규모 업데이트를 위해 개발팀을 여름팀과 겨울팀으로 나눠 1년 동안 뼈 빠지게 개발해 반 년 짜리 업데이트 주기를 반복하지 않아도 게임이 저 혼자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 시대가 지나고 현대에는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여전히 도탑전기, 모바일 리니지, 그리고 모바일 리니지를 매우 성공적으로 복제한 오딘을 여전히 복제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러는 사이 또 다른 프로젝트들은 과거 우리들이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맹목적으로 복제하려 했던 것처럼 이제 원신의 여러 요소를 복제하려고 노력하고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복제 시도가 그렇듯 다른 게임을 우리 프로젝트로 복제해 오기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이 일이 쉬웠다면 수많은 리니지 라이크 게임들이 모두 비슷한 수준의 경제적 성과를 달성했을 테고 운중동 주택단지의 남은 땅에 또 다른 멋진 건물이 들어서거나 시그니엘 레지던스를 구입한 사람이 더 생겼을 겁니다. 하지만 복제해 오려는 게임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겉모양을 살펴본 다음 겉으로 보이는 시스템 각각을 이들이 왜 존재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복제해 오면 분명 같은 시스템이지만 우리가 개발한 게임에서는 같은 시스템이 동작하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수 있고 더 나쁜 것은 이 상태가 일어난 이유를 파악하지 못해 고객들로부터 욕은 욕대로 먹고 게임은 게임대로 망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가령 모바일 리니지 시리즈의 전투 시스템과 성장 메커닉을 복제했으면서도 ‘우리는 자동 전투가 아닌 수동으로 플레이 하는 손맛을 느끼는 전투를 만들었다’라고 인터뷰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던 어떤 게임은 잘 돼 가나 하고 한번 플레이 해 볼 작정으로 검색하니 이미 서비스를 접고 없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서비스를 접는 그 순간까지도 왜 자신들의 게임이 예상대로 동작하지 않았는지 몰랐을 겁니다.

이 날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우리가 그 일부를 복제하려는 게임으로부터 여러 성장 요소를 가져와 우리 게임에 맞는 성장 전략을 작성하려고 했고 각자가 서로 다른 부분의 성장 전략을 작성한 다음 회의실에 모여 각자의 전략을 서로 살펴보고 의견을 내 각자의 부분 전략을 개선해야 했습니다. 만약 이 회의가 회의를 소집한 사람의 의도 대로 진행됐다면 모두는 서로가 작성한 전략의 각 부분에 대해 활발히 의견을 내고 이를 받아들여 다음 번에는 의견을 반영한 다 나은 전략을 준비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성장 전략이 한 가지 계획으로 통합 되어 어떤 마일스톤에는 이 성장 전략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여러 기능을 구축하는 계획을 수립하게 될 겁니다. 이상적으로 보면 이렇지만 이미 위에 이야기했다시피 우리들은 문맹이 아닌데도 회의 전에 문서가 공유되지 않았고 또 우리들은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성장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성장 메커닉의 지향이 리니지 스타일의 강력한 경쟁을 이끌어내는 목적인지 아니면 마치 싱글플레이 게임처럼 아주 느슨하게 고객의 행동에 따라 세계가 맞춰 변하는 수준의 성장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다른 게임의 주요 성장 시스템을 가져와 대강 MMO 게임에 어울리는 모양으로 바꿨지만 각자의 계획을 회의실에 처음 들어와 멀리 있는 모니터를 통해 읽어 이해 수준이 깊지도 않고 또 이 성장에 의해 우리가 고객들에게 제공할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사람들로써는 서로의 결과에 의견을 낼 수도 없었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 그때서야 각자가 준비해 온 문서를 화면에 띄워 놓고 돌아가며 브리핑을 했는데 저는 시력이 나빠 문서가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또 문서 각각은 꽤 구체적인 성장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는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성장 전략을 통해 달성할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의견을 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각자가 준비한 각기 다른 부분의 성장 전략은 각자 어떤 게임들을 참고했는지, 또 각자 참고한 게임으로부터 어떤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 전략을 수립해 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의견을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이 계획들이 모여 개발되면 일단 크게 이상하지는 않은 어떤 성장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서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경험인지, 또 고객들이 그 경험에 반응할지 같은 점을 판단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 각자 돌아가며 자신들이 준비해 온 문서를 브리핑 한 다음 더 이상 문서를 브리핑 할 사람이 남지 않은 상태가 되자 회의실에 들어온 각자는 각자의 얼굴을, 그리고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 중 책임이 있는 가장 높은 분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회의실 맨 뒤 가운데 앉아 있던 저는 이 상황을 뒤에서 살펴보며 아까부터 ‘ㅋㅋㅋㅋㅋㅋ’ 하고 웃고 싶은데 언제 웃어야 할 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습니다.

제 기준에서 이 회의는 전형적인 망한 회의였고 목적이 불분명한 상태로 시작해 무슨 짓을 해도 성공적인 회의로 멱살을 잡아 이끌어낼 수 없었습니다. 회의가 시작되고 한 3분쯤 지났을 때 이미 망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회의에 참여한 분들 중 책임이 있는 가장 높은 분이 브리핑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들고 들어왔던 레몬향 펩시 제로 캔을 다 마신 다음 테이블 아래에서 캔을 우그러뜨리며 유쾌하지는 않은 소음을 내고 있었는데 그 분의 표정에 이미 ‘아 시발 어쩌지…’ 라는 표정이 떠올라 있어 ‘ㅋㅋㅋㅋㅋ’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브리핑을 마치고 각자가 서로로부터 어떤 활발한 의견 교환을 요구하는 애절한 눈빛을 교환하다가 방금 소개한 책임이 있는 분의 얼굴에 떠오른 말을 눈치 채고 다들 조금씩 입을 닫고 마음만은 회의실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고 있을 때 이 상황에 웃었다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것 같아 웃는 대신 팀에 조인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만 쓸 수 있는 뉴비 버프를 사용해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로 시작하는 멍청한 질문을 해 봅니다. 질문을 이야기하기 전 힌트를 하나 더 추가하자면 저는 이 회의를 포함한 성장 메커닉 설계 작업 끝에는 고위 의사결정자를 대상으로 한 브리핑이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 회의로부터 결과를 도출하면 그걸 브리핑 할 사람은 누구인가요?”. 잠깐 서로들 사이에 의견 교환이 일어났지만 결국 브리핑 할 사람은 그 자리에 있는 이 주제에 책임이 있는 높은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아까부터 애꿎은 콜라 캔을 우그러뜨리고 있는 이유기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내용은 적어도 그 분과 의견이 일치 되어 있어야 했고 의견이 일치하려면 메커닉 제시 이전에 이 메커닉을 통해 달성할 게임의 목표 역시 서로 간에 정렬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다음 질문은 “이 회의에서 우리가 진행 상황을 브리핑 했는데, 이 회의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결과가 무엇인가요?”였는데 이 말을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보여 덧붙였습니다. “회의가 끝날 때 우리들 각각이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나요?” 그러자 누군가가 이제 각자가 준비한 성장 메커닉의 각 부분을 오늘 브리핑 경과에 따라 마무리 한 다음 누군가 한 문서로 통합해 우리들 중 가장 높은 분이 고위 의사결정자에게 브리핑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한참 이 정도까지 질문을 하고 있을 때 이 모든 결과를 짊어지고 고위 의사결정자와 대면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높은 분이 제 질문들의 의도를 이해하고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고 하마터면 완전히 망한 회의가 될뻔한 회의는 적당히 망한 회의로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일단 각자의 업무 진행은 현재 상태에서 잠시 중단하고 애초에 성장 메커닉이 달성해야 하는 목표 정렬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처럼 보였는데 고위 의사결정자에 대한 브리핑 일정이 촉박한 상황이어서 이 상황 자체를 돌파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어쨌든 이 상황에 대한 돌파, 고위 의사결정자에 대한 브리핑은 회의에 참여한 책임이 있는, 우리들 중에 가장 높은 분이 어떻게든 젊어 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저는 이 주제에 대해 별다른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회의가 마무리되는 모습을 지켜본 다음 저희 팀원님과 함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팀원님께 따로 방금 그 회의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먼저 회의에 참여한 각자가 뭔가를 수행해 오기는 했지만 일단 각자는 자기들이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고위 의사결정자에 대한 보고를 위해 문서를 작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목적만으로는 제안을 할 수도 없고 메커닉을 설계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뭘 해야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만든 문서에 의해 게임이 개발되었을 때 고객에게 어떤 경험을 줘야 할 지, 그리고 그 경험이 우리들이 의도한 경험인지를 우리들 스스로가 설명하고 또 설명에 기반해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캐릭터 각각은 경험치를 얻어 레벨을 올리는데 일정 레벨 구간마다 승급 개념을 둬 승급을 거치지 않으면 레벨이 해당 승급 구간의 최대치에 고정된다는 성장 메커닉을 주장하려면 무엇을 위해 이 메커닉을 사용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설명을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미리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승급 메커닉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이 메커닉이 우리들이 공유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브리핑 후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일을 할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고 목적이 없으니 서로의 제안을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 회의가 망한 이유는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의 정보 수준을 맞추지 않은 상태에서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회의에 참여한 각자가 의미 있는 의견을 주고 받기 위해서는 각자의 정보 수준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 메커닉을 설계해야 하는 이유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면 서로 올바른 의사 교환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 누군가 주장하면 정보가 부족한 사람은 이 주장의 맥락 자체를 따라가지 못해 아무 말도 할 수 없거나 완전히 이상한 말을 하게 되며 이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은 이미 그 주장이 의미 없음을 시간을 들여 설명해야만 할 겁니다. 서로의 정보 수준을 맞추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서로가 공유할 문서를 회의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미리 완성해 미리 공유한 다음 서로가 예습한 다음 회의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누군가 회의를 수집하면 회의 전에 미리 읽어야 할 문서가 있으면 던져 달라고 말하곤 하는데 다들 너무 쉽게 아무런 자료도 공유하지 않은 채 냅다 회의를 시작한 다음에서야 화면에 문서를 처음으로 띄워 낭독하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문서를 이해한 다음 자기 자신과 비슷한 정보 수준을 갖추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한 사람들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습니다.그래서 반드시 미리 회의 자료를 공유해야 하고 이 이유는 우리들이 똑똑하지 않음과 동시에 이 방법이야말로 각자의 정보수준을 맞추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또 각자가 업무를 수행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 서로가 아무런 의견도 낼 수 없게 만든 아무도 이 일의 정확한 목적을 모르는 상태는 그 목적을 모른 채 작업을 수행하는데 집중한 각자의 잘못이 없지는 않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애초에 업무 지시 수준에서 업무의 목표, 여러 업무 사이의 연관관계 따위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은 이유도 있습니다. 서로 함께 일한지 많은 시간이 지나 맥락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도달했다면 업무 자체만 전달해도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서로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최근에 여러 계획이 변경되었거나 시야가 충분하지 않은 주니어님들을 포함해서 일하고 있다면 업무 지시 때 업무의 맥락, 최종적인 목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함께 제시해야만 합니다. 이 정보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제시된 다음에야 서로가 회의실에 모여 각자가 예습해 온 정보에 기반해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애초에 이런 회의는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냥 아무때나 각자의 문서를 살펴보고 바로 이야기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회의는 망했지만 이 일에 책임이 있던 분은 예정 대로 고위 의사결정자에게 계획을 브리핑 하고 이후 계획을 수립하는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역시 책임이 있는 분은 괜히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오래된 HBO 드라마 뉴스룸 첫 화에서 메모 한 장만 들고 프롬프트에 아무 것도 없는 채 뉴스를 시작할 때 프로듀서가 “이게 원래 저 사람이 사는 곳이야”라고 말하는 상황과도 비슷했을 겁니다. 우리들은 이 일에 대해 그 쪽 부서의 업무 진행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그 분들과 비슷한 수준의 이해도를 갖춰 망한 회의를 만들지 않고 또 책임 있는 분의 업무 로드를 줄이며 그 분이 올바른 제안을 말할 수 있도록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첫 걸음은 바로 망한 회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날 우리들은 회사가 약 13만원을 낭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돈이면 우리들이 적당한 날 저녁에 모여 맛있는 술을 마시며 놀기에 충분한 돈인데 이 돈을 그냥 허공에 날려 버렸고 이 사실을 회사가 눈치챌까 걱정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회사가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일하게 두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우리들을 고용한 다음 우리들을 신뢰하기 때문인데 회사로부터 돈 받고 일하는 이상 그 신뢰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프로젝트를 성공 시켜 회사가 돈을 벌게 만들고 또 우리들도 돈을 벌며 우리들의 경험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첫 걸음은 망한 회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번 54호에는 지난 2주간 공유한 이야기를 함께 보내 드립니다.


짧은 테스트 동안 득템하는 느낌을 줄 수 있을까?
완성된 게임에서는 파밍의 재미를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직 버티컬 슬라이스가 온전히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회사에서 Windows File History 추천
회사에서는 형상관리도구를 제공하지만 여기 포함하기는 좀 애매한 파일 역시 버전 관리와 백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회사 보안팀을 놀라게 하지 않고 사용할 방법이 있습니다.
게임디자인 포트폴리오 사례 (3)
이전 구직에 사용한 포트폴리오 문서와 함께 제 의도를 설명하겠습니다.
웹3 게임과 코인 사기의 유사성
다단계 코인 사기에 관한 영상을 봤습니다. 그런데 주요 메커닉이 한때 시장에 나타났던 웹3 게임류와 비슷해 보입니다.

지난 52​호느긋하게 가자에 너무 아파 곧 떠날 것 같은 친구를 만난 이야기를 드렸었습니다. 제가 딱히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마음이 좀 답답했는데요, 몇 주가 지난 다음 출근길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데 몰골은 여전히 말이 아니었지만 구내염이 다 다 나았더라고요. 반갑기도 하고 또 장하기도 해서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반갑게 바라봤습니다. 그렇게 아팠는데도 잘 버티고 이렇게 만났으니 또 다음에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참. 최근에 뉴스레터에 등록하신 분들은 갑자기 메일이 나타나 당황하셨을 수 있습니다. 그저 글 하나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메일이 도착해 기분이 안 좋으셨을 것 같습니다. 이 메일 하단에 Unsubscribe 링크가 있을 겁니다. 그 링크를 클릭하시면 메일을 받지 않지만 여전히 구독자 전용으로 설정된 글을 읽으실 수 있으니 참고 부탁 드립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또 2주 뒤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