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된 무능
무능은 더 많은 책임을 가질 수록 드러납니다. 그런데 책임에 따른 권한이 함께 부여되지 않아 종종 의도된 무능 상태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흔히 연봉 협상이라고 부르지만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조정된 연봉을 통보 받는 자리를 생각해 봅시다. 이번 해에 새로 받게 될 조정된 금액을 통보 받는 일에 왜 협상이라는 말이 붙었을지 생각해 보면 한때 이 자리는 실제 협상을 하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표현한 협상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테고 상대와 한 해 동안 받을 급여를 결정하는데 적어도 협상 비슷한 이야기 정도는 해볼 여지가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협상’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이 자리를 진행하는 사람이 실제 ‘협상’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금액 이야기를 진행하며 상황에 따라 금액을 조정한 다음 이를 결정할 권한이 있어야만 ‘협상’을 할 수 있습니다. 또 협상 대상자를 평가할 수 있는 수단이 있거나 이미 수행된 평가 자료를 가지고 있거나 평가 대상자 모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약 평가자가 평가 대상자에 대해 잘 모른다면 이 자리에서 협상은 불가능한데 이유는 평가 대상자의 주장을 평가자가 검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 이런 협상의 조건을 만족하기 어려워집니다. 협상자가 협상할 권한을 가짐과 동시에 협상 대상자들의 평가 정보를 가지고 이를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어렵기 때문인데 단순하게 말하면 인사 부서에서 협상 권한을 가진 사람이 회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평가를 이해하고 협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현대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는 의도적으로 협상에 권한이 없는 사람을 할당해 이 과정을 진행 시키는데 이 때문에 협상은 더 이상 협상이 아니라 통보가 되고 맙니다. 협상 대상자가 급여 조정이 필요함을 어필하더라도 협상 진행자는 이 주장을 들어줄 방법이 없습니다. 말을 듣더라도 실제 조정까지 이어질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협상 진행자는 회사의 모든 사람들을 알 수 없고 오직 이들의 평가에 기반한 기계적인 조정 금액이 적힌 표를 보며 이를 읽어주기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양이 만들어진 덕분에 회사는 연봉 조정의 어려움을 권한이 없는 사람에게 위임 함으로써 협상을 통보로 전환해 협상 대상자들을 무력하게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서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디자인 한 상황이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행동을 ‘의도된 무능’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무능은 말 그대로 어떤 일을 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능력이 없는 상태 보다는 능력이 없는 상태에 의한 일의 결과를 본 다음에 그 일을 한 사람을 평가하는 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 어떤 사람의 무능함은 그 사람이 일을 하는 도중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일을 한 결과에 기반해서는 무능함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 무능함은 책임이 적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능력으로 인한 업무 결과가 드러나더라도 그 결과가 이 업무를 포함하는 전체적인 일에 적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일을 구성하는 작은 일 중 일부가 조금 미흡하더라도 다른 일에 의해 가려질 수 있고 이런 결과에 의해 개인의 무능함이 드러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조직 안에서 개인에게 부여된 권한이 늘어나면 전체적인 일에 미치는 영향이 늘어나고 그만큼 개인의 무능함이 드러나기 상대적으로 쉬운 상태가 됩니다. 가령 팀원 각자의 무능함은 협업 부서와 관리자의 개입을 통해 문제 상태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 개인이 학습해 적어도 그 수준에서는 더 이상 무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한이 늘어난 상태에서 무능하면 그 무능함이 전체적인 일 진행에 좀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이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개입으로도 잘 무마 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권한의 크기에 따라 더 큰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일에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드디어 개인의 무능이 외부의 무관심과 일에 미치는 영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쳐 개인의 무능함이 최대의 영향을 끼치게 되지만 외부의 무관심으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무능함은 조직 내부에 문제를 일으킬 뿐 외부로 잘 전파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면 앞에서 소개한 의도된 무능을 활용해 책임이 더 많은 사람의 권한을 분산한 다음 스스로는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고 또 책임도 지지 않는 마음 편한 상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권한의 위임은 의사결정자 스스로와 조직 전체의 건강한 활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권한을 위임 받은 사람들의 무능을 의도해 권한을 위임하면 이 권한은 고위 의사결정자의 손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권한을 위임 받은 사람들은 이 권한을 실행할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권한은 그대로 유지하되 책임은 표면적으로 권한을 위임한 사람들에게 남습니다. 말이 좀 복잡하니 앞에서 설명한 연봉협상 자리에서 일어나는 의도된 무능 사례를 다시 살펴보면 규칙 상 연봉협상은 말 그대로 실제로 급여를 협상하는 자리이고 여기에는 협상 권한을 가진 대표나 협상 권한을 위임 받은 인사 부서의 책임자가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종종 이 자리에는 팀의 상급 관리자가 나타나는데 이 사람은 어떤 요구를 받더라도 이를 들어줄 실제 협상 권한이 없습니다. 권한은 여전히 더 높은 고위 관리자에게 남아 있지만 이 과정을 진행할 책임은 상대적으로 훨씬 권한이 적은 팀 내 상급 관리자에게 분산되어 권한을 위임하지 않고서도 연봉협상을 마칠 책임은 위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조직의 목표를 위해 책임만 위임 받은 상황에서 그에 합당한 권한을 행사하려는 행동은 강한 보복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 텍스트를 타이핑 하는 2023년 가을 현재 한국에서는 다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 수가 늘어나고 당장 제 주변에서도 이틀 사이에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 일곱 명이 확진되기도 해서 출퇴근 지하철이나 회의실 안에서 너무나 당당히 마스크 없이 계시는 분들이 과연 안전한지,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도 괜찮은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지난 2020년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는데 연 초에 미군의 시어도어 루즈벨트함의 브렛 크로지어 전 함장은 함내에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자 연안에서 작전 중이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이 함에서 내려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함에서 아무도 내릴 수 없어 이 상황을 함내에서 스스로 해결해야 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적과 교전 중에 발생한 스스로 해결하도록 훈련 받은 문제와는 상당히 다른 종류의 문제였습니다. 함장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병사들을 배에서 내려 치료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더 많은 권한을 가진 이들에게 다시 서한을 보냈고 그 결과 당시 해군장관 대행에 의해 해임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상황은 조직 안에서 권한을 가진 개인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인 특정 상황 속에서 의도된 무능을 수행하기를 거부하고 조직을 위한 권한을 초과한 행동을 요청하거나 그런 요청 자체를 시도하려고 할 때 의도된 무능을 거부한 댓가로 큰 보복을 받는 훌륭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권한이 충분해 보이는 사람, 특히 미국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의 함장조차도 평시와 전시에 명령에 따라 함을 통제할 권한은 있었지만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아주 특별한 상황에 필요한 권한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 병사들을 배에서 내리게 해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함이 옳다고 판단했고 이 스스로의 권한을 벗어난 행동의 승인을 요청할 때 함장은 의도된 무능의 경계를 벗어났으므로 해임을 통한 보복을 받았으며 당시 이 해임 결정에 대해 해임을 실행한 해군장관 대행이 함내에 본보기를 보이는 방송을 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참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던 비슷한 시기 당시 회사에서는 회사에서 발생하는 코로나 환자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당시 마스크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마스크를 구해다가 출근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지급했고 사람들이 퇴근하고 나면 일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공조기를 강하게 돌렸으며 방역 업체에 의뢰해 주 단위로 방역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또 확진자가 발생하면 같은 층에 출근해 있던 모든 사람을 쫓아내 원격으로 돌린 다음 방금 설명한 절차를 남은 시간 내내 수행합니다.
이런 조치에는 분명 조치 자체에도 큰 돈이 들고 또 이 조치를 통해 사람들의 업무시간 감소 등을 통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손해도 일어났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이유는 이 조치를 승인한 누군가에게 의도된 무능을 강요하는 책임 뿐인 가짜 권한이 아니라 실제 실행 가능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회사 입장 상 출근한 사람들 사이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파된 것으로 밝혀질 경우 회사에 미칠 파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최근 이틀 사이에 같은 공간에 있던 일곱 명에게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이 일어나면서 출근해 있던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누군가는 아이들에게 옮길 가능성도 있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내려야 한다에서 설명한 대로 아무 권한이 없는 사람들은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결국 의사결정은 의도된 무능을 강요 받는 중간 관리자들이 아니라 최상위 권한을 가진 사람에 까지 올라가야만 일어날 수 있있습니다. 이제는 이전처럼 건물의 공조 시설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출근 인원 상당수는 마스크조차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조치는 일단 사람들을 내쫓아 원격으로 돌려 더 이상의 확진자 발생을 막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은 채 의도된 무능을 안전하게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전달 받은 그 시점에 가장 큰 권한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전달 받자 마자 모두에게 ‘마스크를 써 주세요’ 라고 말하고 다녔을 뿐이었는데 이 말을 들으며 의도된 무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일곱 명이 확진된 상황에서 이들이 같은 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확진되었는지의 인과를 우리들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상황 상 정말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하고 싶었다면 공조기를 직접 제어할 수도 없고 방역 업체를 부를 돈도 없는 상황이라면 최소한 사무실에서 사람들을 쫓아내 원격으로 돌려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막을 수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스크를 써 달라는 공지를 듣고 너무나 실망스럽고 어이가 없어 사무실에서 사람을 쫓아내는 결정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자 돌아온 답변은 ‘여기서 그럴 것 없이 직속 상관에게 허가를 받아 재택 하시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번 의도된 무능과 이를 거부하려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린치가 어떤 것인지 깊이 느꼈습니다. 이미 사람들 각각이 원격으로 일할지 아니면 출근해서 일할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각기 다른 부서의 책임자들에게 위임 되어 있었습니다. 예상하시겠지만 권한이 위임 되어 있을 뿐 실제 문제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는 없는데 이유는 이 권한 위임이 실질적인 권한 위임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의도된 무능을 달성하기 위한 책임의 위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상황은 이 대화를 지켜보던 단지 책임을 위임 받았을 뿐인 부서 별 책임자들의 권한 행사에 의해 일단 그 날 퇴근 시점까지는 확진자가 일곱 명 발생한 사무실에서 준비되지도 않은 마스크를 쓴 채로 일한 다음 그 다음 날부터 원격에서 일하도록 권한이 행사 됨에 따라 일단락 됩니다. 여러 회사에서 연봉 협상 자리에 나타나는 아무 권한도 없는 불쌍한 인사 부서 팀원 분을 마주하며 의도된 무능에 대해 처음 생각하기 시작한 이후 오랜만에 또 다른 형태의 의도된 무능을 체험했고 우리들이 앞으로 개발을 계속하며 처하게 될 여러 가지 문제에 각자의 권한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의도된 무능 대신 상황에 맞는 올바른 권한을 행사하며 일할 수 있을지 깊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이번 주에도 다른 다섯 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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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여러 곳에 공사를 하느라 주변이 어수선해 요즘 출근하며 한동안 이 이름 모를 친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다 마주치는 고양이일 뿐인데 며칠 못 봤다고 좀 걱정 됩니다. 분명 그 옆에 있는 오래된 집에서 돌봐 주고 있는 것 같아 주변이 좀 덜 어수선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항상 기대하며 출근길을 나서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기까지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또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