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가 고민할 차례입니다
한때 자기파괴적인 게임이라 평가하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게임을 계승하며 그들이 남긴 고민도 함께 계승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고통 받을 차례입니다.
어쩌다 보니 경력의 거의 대부분이 다른 게임의 후속작입니다. 현대에는 완전히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이전에 공개한 적이 있어 어느 정도 흥행을 예상할 수 있는 결과물이 여러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영화나 드라마의 리메이크하고 오래된 곡을 다시 편곡해 다른 가수가 부르기도 합니다. 게임 역시 영화, 드라마, 웹툰 같은 매체를 빌려와 개발되기도 할 뿐 아니라 이전에 이미 고객들에게 알려진 게임을 리메이크 하기도 하고 아이피를 활용해 개발되고 있습니다.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게임의 후속작을 만드는 일은 전작의 눈높이를 맞추면서도 그 사이에 변화한 세계의 눈높이에도 대응해야 하는 난처한 일이기는 하지만 항상 이 모든 결과를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해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대단합니다.
이미 공개된 적 있는 게임의 후속작은 방금 소개한 두 가지 눈높이를 맞춰야 합니다. 먼저 전작을 플레이 했던 고객들이 그 게임 프랜차이즈 신작에 대한 기대입니다. 인생에 일부를 투자해 전작으로부터 경험을 획득한 고객들은 게임을 그만 두고 시간이 흐르며 기억이 조금씩 흐려져 실제로 경험한 것 보다 더 나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거 경험 미화를 경계하기에서 비슷한 경향을 설명한 적 있는데 과거에는 분명 다른 사람들과 대장간 앞에 놓인 용광로를 사용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여 부대끼던 기억, 배가 고프면 제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대담하기 짝이 없는 제한, 단검 하나 들고 맞서 싸웠던 거대한 드래곤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에서 144프레임으로 재생되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과거 경험을 미화하지만 정작 과거에 경험했던 바로 그 게임을 다시 시도해 보면 현대 기준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인터페이스, 지독하게 불편한 시스템, 게임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컨텐츠를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지어 과거에 온 신경을 집중해 대항했던 거대한 드래곤은 대강 구글 이미지 검색에 아무 검색어나 넣으면 얻을 수 있는 실뱀장어 그림보다도 못해 고작 이런 것에 인생의 일부를 바쳤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객들은 절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객들은 현대에 다시 살펴보면 어처구니 없이 불편한 시스템, 불친절한 인터페이스, 어이 없는 컨텐츠 구성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이미 그들의 머리 속에서 완전히 미화된 경험을 자신의 체험이라고 굳게 믿고 새로 나올 그 후속작, 리메이크를 벼르고 있습니다. 이들의 눈높이를 맞추기는 거의 불가능한데 우리들이 어떤 모양으로 게임을 만들든 이미 머릿속에서 미화된 도달하기 불가능한 기대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과거와 비슷한 시스템을 채용해 개발하면 현대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불친절하고 어렵고 또 복잡한 게임이 되기 쉽습니다. 가령 과거에는 MMO 게임의 인벤토리에 무게 제한이 있고 또 장비류에 내구도가 있는 규칙이 당연했습니다. 과거에는 가상 세계를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상 공간이 실제 세계와 비교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편리함을 고민하기 보다는 실제 세계의 동작을 그대로 가져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무기는 사용함에 따라 내구도가 감소하고 또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아이템 각각은 인벤토리에 칸을 차지함과 동시에 별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어 무거운 물건을 들면 인벤토리에 칸이 남아 있어도 더 이상 인벤토리에 아무 것도 넣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인벤토리가 그리드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은 아이템 스프라이트 무더기를 마우스 커서로 이리 저리 헤집으며 포션을 찾던 기억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마치 드래곤이 내뿜는 브레스를 간신히 피한 다음 재빨리 가방을 뒤적여 아슬아슬하게 포션을 찾는 영화 같은 경험으로 변해 있습니다.
하지만 내구도 수리는 낡은 메커닉일까요?에 생각해본 것처럼 현대에는 과거에 의심 없이 실제 세계의 규칙을 모방한 게임 규칙은 현대에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게임은 고객들이 게임의 핵심 경험에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 핵심 경험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조금씩 제거해 가기 시작합니다. 가령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에서 세이브포인트에 있는 인벤토리에 넣은 물건은 서로 다른 세이브포인트에서 똑같이 접근할 수 있는데 실제 세계에서는 한 장소에 보관한 물건이 다른 장소에 똑같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미시 세계에서는 양자 결어긋남에 의해 원자 하나, 원자 여럿이 조합된 분자 등이 다른 입자와 상호작용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동시에 여러 장소에 파동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는 거시 세계에서 다른 입자와 상호작용에 의해 재현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양자 결어긋남에 근거한 레벨 3 다중우주를 관측을 통해 증명한다 하더라도 이 사실은 여전히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인벤토리로부터 항상 같은 물건들에 접근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상 세계에서는 그딴 걸 알 바 아닙니다. 가상 세계에서는 어디에 있는 상자를 열든 똑같은 아이템이 나타날 수도 있고 인벤토리 그리드에 나열된 아이템 하나하나는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한 칸의 공간을 점유할 뿐 질량이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래서 인벤토리 그리드 한 칸에 포션 999개를 겹쳐 놓아도 이 인벤토리를 감싼 가방을 들고 모험을 계속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또 현대에는 게임에 따라 플레이를 통해 새로운 무기를 획득하거나 새로운 무기를 제작하도록 하는 대신 한 가지 무기를 계속해서 성장 시키도록 설정하기도 합니다. 싱글플레이 게임에서는 몬스터들이 더 강한 무기를 드랍하고 또 더 강한 무기 재료를 드랍하게 해서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 함에 따라 더 강한 무기로 바꿔 가도록 만들어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더 강한 무기를 획득한 다음 이전에 사용하던 무기를 상점에 팔면 상점 주인은 도대체 어디서 그 모든 무기를 매입할 돈을 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군소리 없이, 그리고 절대 흥정에 응하지 않고 중고 무기를 매입해 줍니다. 적은 수의 인원과 멀티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게임에서는 맨 먼저 게임을 플레이 한 고객이 이어서 함께 플레이 하는 고객들에게 이전에 자신이 획득했다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무기를 따로 보관해 뒀다가 넘겨 주기도 했는데 이렇게 도움을 받는 경험은 훌륭하지만 게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중에 게임을 플레이 하는 고객들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컨텐츠를 소모해 버리는 바람에 골치가 아프기도 합니다. 본격적인 멀티플레이 게임에서는 이런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처음에는 무기에 레벨 제한을 둬 처음 게임을 시작하는 고객들이 즉시 상급 무기를 들고 컨텐츠를 빠르게 소모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고 여러 가지 제한을 도입해 이른바 버스를 태워주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고객들은 게임으로부터 성장 경험을 얻기를 꽤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캐릭터 뿐 아니라 무기 역시 성장의 대상으로 만들어 게임 내 여러 가지 요소를 성장 시키도록 만들어 점점 더 강해지는 실질적 경험을 게임 곳곳에서 줄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무기를 성장하게 만들자 멀티플레이 온라인 게임의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먼저 플레이어가 무기를 계속해서 바꾸지 않으므로 점점 더 강한 무기를 몬스터들이 드랍 하게 만들어 필요 이상의 무기가 게임에 나타나지 않게 됐습니다. 몬스터들은 무기 대신 강화 재료를 드랍함으로써 사냥의 결과가 즉시 강함으로 연결되지 않고 플레이어가 직접 의지를 가지고 강화 행동을 해야만 강해지도록 만들어 이전에는 시점과 정도를 통제하기 까다로웠던 계단식 성장 경험을 의도에 맞춰 통제하기 이전보다 쉬워집니다. 또 게임에 따라 여전히 몬스터가 무기를 드랍 한다 하더라도 플레이어가 보유한 첫 번째 무기를 성장 시키기 위한 경험치로 성장 대상으로 고려하지 않는 자잘한 무기들을 요구하게 만들어 이전에는 상인에게 팔아 돈으로 바뀌던 것을 이제 오히려 플레이어가 돈을 내고 무기를 성장시키는데 사용하도록 만들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무기는 일정 시점마다 더 강해져야 하고 이 때마다 강화를 요구하므로 굳이 무기에 내구도 메커닉을 사용해 일정 시점마다 게임 플레이를 중단 시키고 다시 마을로 돌아오도록 만들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런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오래된 게임 메커닉을 그대로 사용했다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고객들이 순식간에 게임에 질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가령 현대 고객들은 인벤토리의 아이템 각각에 무게가 있을 때 이를 잘 관리하지 못합니다. 실은 이전 오랜 세월에 걸쳐 그런 관리를 요구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인벤토리 그리드에 아이템이 들어 있는 상태와 비어 있는 상태를 통해 직관적으로 관리하던 인벤토리에 갑자기 작은 숫자로 표시되는 무게 개념이 추가되면 인벤토리 그리드가 비어 있지만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넣을 수 없거나 행동에 제약을 받는 상황을 경험하면 이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포기하고 게임을 그만 둘 수 있습니다. 심지어 현대에는 인벤토리 칸 수 마저 제한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서로 다른 게임 시스템 사이에 재화가 통제 없이 이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재화를 사용하면서 다양한 재화 및 재료의 종류와 인벤토리 칸 수 제한은 서로 잘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종 엔지니어들이 이런 변화를 평소에 잘 체감하지 못해 ‘인벤토리 칸 수에 제한이 없다’는 요구사항을 기획서에 적어 가면 굉장히 불편해 하곤 해서 그런 요구사항을 설명하는 저를 포함한 게임디자이너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무기가 성장의 대상이 되면서 계단식 성장을 할 시점마다 게임 내 제한된 장소에서 무기를 강화해야 하기 때문에 성장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고객 스스로가 플레이를 중단하고 마을에 돌아와 무기를 강화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임의로 플레이를 방해하는 내구도 메커닉을 사용할 필요가 크지 않습니다. 한때 무기 내구도 메커닉은 플레이어가 지속적으로 재화를 소모하게 만드는 하수구 역할 중 하나로 동작하기도 하고 또 MMO 장르에서 플레이어들이 종종 마을에 돌아올 이유를 만들어 게임 내 잘 알려진 대도시에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연출하는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게임 플레이에 큰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 패널티를 주는 내구도 메커닉은 이에 대비하지 않을 때 게임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또 예측하지 않은 시점에 플레이를 방해하므로 감정이 그리 좋을 수 없는 메커닉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현대에는 고객이 계단 성장을 필요로 할 때 스스로 마을에 돌아와 무기를 강화하도록 하고 있어 굳이 내구도 같은 메커닉을 통해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고객이 마을로 돌아오도록 일종의 패널티를 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고민 없이 그저 먼 옛날 플레이 하던 게임을 떠올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구도 개념을 넣으면 이번에는 계단 성장을 위한 강화와 내구도 수리가 동시에 존재해 고객을 시도 때도 없이 마을로 돌아가게 만드는 이상한 게임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단 과거에 전작을 플레이 했던 고객들의 눈높이를 맞추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경험한 현대 기준으로는 어처구니 없이 불편하고 불친절하고 또 이상한 경험을 머릿속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미화했기 때문에 현대의 우리들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도 이들을 만족 시킬 수는 없습니다. 한편 전작 플레이 경험이 없는 고객들은 과거에 이 게임에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 바가 아니기 때문에 현대 기준으로 게임을 평가하지만 전작의 플레이 경험에 대한 정보를 미화된 기억을 가진 고객들로부터 전해 들어 좀 더 미화된 경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역시 어지간한 게임을 만들어서는 만족 시킬 수가 없습니다. 과거 고객들의 현대에 전혀 맞지 않는 미화된 기대와 이로부터 파생된 현대 고객들의 과장된 경험, 그리고 현대 게임 플레이 경험이 합쳐지면 후속작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어떤 결과를 만들더라도 모든 고객들로부터 신나게 욕을 얻어 먹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심지어 사내에서도 현대적인 메커닉을 도입할라 치면 우리들 스스로도 고객이기에 어떤 게임의 후속작으로써 너무 현대적인 메커닉을 도입하는데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고 또 너무 오래된 메커닉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입해 놓고 이 상태가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지 못하기도 해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난처할 때가 많습니다.
한편 이런 배경에서 몇 년 전에 플레이 했던 게임은 국내에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게임이 드물어 제 주변의 초식 플레이어들이 오랜만에 기어나와 게임을 플레이 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주변의 초식 플레이어들은 평소에는 게임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인크래프트, 발헤임, 테라리아, 팰월드 같은 덜 경쟁적이고 게임 상에서 여러 가지 행동을 할 수 있으며 핵심 플레이를 어떤 한 가지 경험으로 함축하기 어려운 장르 게임이 나타나면 밤중에 바닥에 누워있다가 스르르 일어나는 좀비들처럼 나타나 “우진아. 서버 안 만드니?”라고 묻곤 했습니다. 마인크래프트도 테라리아도 팰월드도 주변 사람들을 위해 항상 데디케이트 서버를 띄워 두면 서로 다른 편안한 시간대에 각자 게임을 플레이 하며 게임 속 가상 세계에 남은 기록으로 서로 의사소통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하지만 깊이 플레이 했습니다. 테라리아를 한참 플레이 할 때는 종종 표지판과 지형 지물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던전 탐험을 마친 다음에는 던전 입구에 나무로 ‘END’ 모양을 만들어 여기 들어가 봐야 더 이상 건질 것이 없음을 알리기도 하고 강력한 보스를 만나 죽으면 다시 그 근처까지 돌아가 허공에 또 다시 나무라 ‘DIE’ 모양을 만들어 그 방향으로 이동할 때 좀 더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2024년 봄 현재에는 팰월드 데디케이트 서버를 띄워 놓고 있는데 서버에 램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서버 애플리케이션이 부실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거의 한 시간에 한 번 정도는 크래시 되어 모든 사람들을 쫓아내고는 있지만 주변 사람들의 플레이를 안전하게 보관할 정도로는 동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몇 년 전에 전작이 출시되었을 때에도 갑자기 스르르 일어나 이번에는 데디케이트 서버를 구축할 필요 없이 함께 플레이 하자고 했고 다들 같은 서버에 모여 퍼시스턴트 월드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함께 그 기묘한 가상 세계에서 플레이를 즐깁니다. 간신히 식물을 엮어 만든 오두막에 딱 봐도 더러워 보이는 침대를 간신히 만들어도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경험은 즐거웠고 모두를 그 기묘한 세계에서 살아남도록 만들고 또 정착하게 만들며 한동안 일이 바빠 저 자신이 세계로부터 멀어진 사이에 저 한 몸 누일 자리를 유지해 주며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게임은 게임을 플레이 하면 할수록 저를 그 기묘한 세계로부터 쫓아내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포탈을 처음 플레이 할 때 주인공에게 친절하게 굴던 글라도스가 호시탐탐 저를 죽이려 하고 그 사실을 눈치 채고 글라도스의 마지막 배려를 배신한 다음 여러 모험 끝에 글라도스와 대면하는 것처럼 게임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저 자신, 그리고 저와 함께 플레이 하는 사람들을 게임으로부터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게임 속 세계는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모든 것이 다 부서져 사라져 그 모든 것들을 만드는데 보낸 시간을 없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핵심 플레이를 아주 느슨하게 요구함으로써 함께 플레이 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표에 의해 저마다의 다른 플레이를 해도 계속해서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었던 비슷한 다른 게임에 비해 여느 MMO 게임처럼 한 가지 핵심 플레이로 플레이어들을 꽤 강하게 몰아 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주 오래된 MMO 게임은 인스턴스 개념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게임의 모든 공간은 퍼시스턴트였고 그 공간 안에 플레이어들이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했지만 세계 전체에 한정된 자원인 부동산이 그저 선점한 사람들에 의해 영구적으로 점유되어 결국 게임 속 세계가 멈추게 만들지 않기 위해 일정 시간 동안 접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부동산이 서서히 파괴되어 나중에는 부동산에 배치한 모든 물건의 소유권이 해제되어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게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플레이 없이 점유되기만 하는 부동산의 소유권을 되돌린다는 관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접근이지만 닫힌 경제 시스템에서 플레이어들이 생산한 자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마당에 다른 플레이어가 생산한 자원이 아무런 통제도 없이 불특정 다수에게 이전 되도록 만든 건 좀 나이브 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편 이렇게 퍼시스턴트 월드에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한 누구나 부동산을 점유할 수 있었지만 영구적으로 부동산을 점유하지는 못하도록 했는데 이는 매달 게임에 지속적으로 이용 요금을 지불하기 때문에 게임에 반드시 접속할 이유가 있었던 시대에 유효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게임은 더 이상 매달 과금하지 않기 때문에 고객들은 이전 시대에 비해 가상 세계에 대한 충성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습니다. 그래서 이전 시대의 게임을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한 번 점유된 부동산이 영구적으로 점유 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깊은 고민 없이 도입하면 실컷 고객들이 시간을 들여 구축한 자원을 별다른 설명 없이 파괴해 고객을 쫓아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가상 세계에 한정된 부동산이 영구적으로 점유되고 또 가상 세계에 설치된 여러 물체들이 세계에 영구적인 효과를 가지도록 하지 않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습니다. 앞서 아주 오래된 게임이 약 2주 정도 건축물에 돌아와 관리하지 않으면 사라지며 그 안에 있던 모든 물건의 소유권이 모든 다른 플레이어로 변경되도록 하기도 했고 또 몇 년 전에 플레이 했던 게임 역시 얼마 동안 게임에 접속하지 않으면 퍼시스턴트 월드에 만들어 놓은 물건들이 파괴됐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마치 돈 스타브 같은 생존 장르가 플레이어를 불사 상태로 만들어 게임 메커닉이 영구적으로 망가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꽤 폭력적인 방법으로 고객이 구축한 자원을 제거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나마 돈 스타브는 처음부터 생존 장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게임이 폭력적으로 플레이어의 자산을 파괴해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MMO 장르에서 함부로 그랬다가는 고객이 순식간에 게임을 그만두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싱글플레이 게임이기는 하지만 가상 세계에서 부동산 문제를 우아하게 해결한 사례에는 데스스트랜딩이 있다고 생각하고 데스스트랜딩 설정의 우아함에 대해서를 통해 이 생각을 소개했습니다. 이 세계는 비가 모든 것을 낡게 만드는데 이는 플레이어가 세계에 설치한 여러 구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에 건축물을 만들어 편안하게 사용하지만 비가 내리기를 반복하면 어느새 건축물은 낡아 사라져 같은 역할을 하는 새 구조물을 만들어야만 하고 이는 돈 스타브 같은 게임에 비해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가상 세계의 부동산이 영구적으로 점유 되어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합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플레이 했던 게임은 그렇게 우아한 방법으로 고객을 대하지 않았고 우리들이 즐거운 경험을 하며 게임 속 세계에 남긴 흔적은 모두들 바빠 얼마 동안 게임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사이에 완전히 사라졌을 뿐 아니라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의 구조물이 들어서 우리들은 게임에 발 붙일 자리를 잃어버린 채 게임으로부터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상 이런 장르 게임을 함께 시작하면 짧게는 몇 주부터 길게는 몇 년 단위로 플레이 하곤 했는데 이 때는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경험을 ‘자기파괴적 밸런스’라고 정의했는데 가상 세계의 온전한 존속을 위해 그런 조치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이를 위한 여러 메커닉들이 결국 고객들을 쫓아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게임 속에 이룩한 모든 것은 호시탐탐 파괴되어 갔고 우리들은 한 가지 핵심 플레이 - 전투 - 에 내몰렸으며 실제 세계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느라 심신이 지쳐 있는데 어느 날 우리들의 거처가 있던 그 자리에 높은 담장이 들어섰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가상 세계에서조차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부동산 뿐 아니라 각자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은 빠르게 낡아 갔고 우리들은 모험을 하고 경험을 넓혀 가는 대신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지탱하는 온갖 물건을 지탱하기를 반복하는 경험을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게임은 그리 오래 서비스 하지 못하고 막을 내렸는데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자기파괴적인 밸런스는 그 게임이 서비스하던 시대를 기준으로 한 현대에도 썩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 시대에도 게임은 고객들에게 이전과 비교해 훨씬 관대하게 굴고 있었고 고객들이 핵심 경험에 집중하고 자신이 필요할 때 선택적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대신 지속적으로 게임 상에서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 쓸 필요를 줄이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런 시대가 시작되었음에도 심각하게 자기파괴적인 밸런스는 이런 장르에 관대한 입장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웠고 도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이해하지만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든 부동산 문제를 안고 있는 퍼시스턴트 월드에 모든 플레이어들의 플레이 기록을 남기려는 시도 자체가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거나 애초에 매달 과금하지 않는 가상 세계에서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분명 게임을 플레이하는 우리들보다 더 많이 고민했을 개발팀이 대체 왜 그런 상태로 게임을 출시하고 또 왜 그런 상태로 서비스했으며 그런 자기파괴적인 상태를 서비스를 종료하는 순간까지 유지했는지 알 수 없었고 한 편으로는 업계에 이름을 알린 그들도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름에 비해 그렇게까지 훌륭하지는 않을른지도 모르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전에 참여한 어떤 프로젝트는 널리 알려진 다른 게임을 다른 플랫폼으로 개발했는데 처음에는 포팅에 가깝거나 포팅이 아닐 경우 전작을 새 플랫폼에 맞게 훨씬 가벼운 모양으로 개발할 계획으로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아이디어는 경영진의 바램과 큰 차이가 있음이 밝혀지며 썩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고 또 남은 사람들에게 고통스런 경험을 선사하고 있지만 이 때 좋았던 점은 전작 개발팀의 거의 모든 문서를 제한 없이 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원작 개발팀은 한 층 아래에 있었는데 컨플루언스 위키를 통해 그들이 개발 과정에 생산한 모든 문서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들이 오래된 엔진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만든 여러 가지 경험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졌는지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당장 바로 다음 업데이트가 왜 그렇게 개발되었는지 이를 지탱하는 문제의식과 장기 개발 계획 따위를 바로바로 볼 수 있었고 덕분에 시행착오를 크게 줄이고 또 온갖 생각을 흡수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번에는 서비스를 중단한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전작을 개발하며 생산한 문서 전체가 현재 사용 중인 컨플루언스 버전 보다 이전 버전이어서 별도 공간에 분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제한 없이 접근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온보딩 과정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몇몇 의사결정에 의문을 가졌지만 아직 그 의사결정을 진행한 시점에 생산된 문서에 도달하지는 못한 상태여서 왜 이런 모양으로 만들고 있는지 얼마 동안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낮 시간에 제가 해야 할 업무를 수행한 다음 초과 시간에 전작으로부터 생산된 문서와 그 밑에 달려 있는 여러 사람들의 답글을 통한 논의를 살펴보며 이 고민들이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의아한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과거에 저 자신이 전작의 고객이었을 때 자기파괴적인 밸런스를 원망하며 이런 장르를 만들었는데 정작 이런 장르에 반응할 만한 사람들을 게임 밖으로 쫓아내도록 만든 이유를 모르겠다며 개발팀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모르겠다고 건방지게 말하곤 했는데 과거에 그들이 생산한 문서를 살펴보다가 ‘변명’으로 시작하는 문단을 읽기 시작했을 때 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과거 이와 비슷한 장르 게임은 퍼시스턴트 월드에 기반한 규칙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만 현대적인 MMO 게임에서 퍼시스턴트 월드에 기반한 부동산 개념은 이를 유지보수할 규칙을 만들기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또 부동산 문제를 완화하고 게임 속 세계의 부동산 점유율을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들은 앞서 계속해서 원망했던 자기파괴적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또 근본적으로 게임의 장르가 MMO이기에 독특한 플레이를 만들어냈지만 여전히 전통의 MMO 게임에 예상하는 플레이를 만들어내야만 했고 퍼시스턴트 월드의 부동산 문제가 이런 전통적인 MMO 게임의 성장 경험과 합쳐지며 양립하기 대단히 어려운 상태를 만들어 냈습니다.
과거에 제가 읽은 문서들을 생산하며 이를 기반으로 전작을 만들어낸 사람들 역시 이런 문제를 전혀 모르지 않았고 어떻게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회사의 기대와 제한된 자원 안에 명확한 해결 방법을 찾아내는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아직 시간을 들여 전작을 개발한 분들이 남겨 놓은 문서를 모두 읽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읽어본 문서들로부터 이들도 스스로의 자기파괴적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를 해결하는데는 실패했음을 알 수 있었고 이제 그 고민을 우리들이 이어 받았으며 과거의 저 자신이 건방진 생각을 했다면 이제 제 스스로가 그 고민을 이어 가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치 회전하는 수레바퀴를 머리 위에 얹고 고통 받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가 그 수레바퀴를 대신 머리 위에 얹게 된 어떤 북유럽 전설처럼 한때 고객으로써 불만을 가진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몇 년이 흐른 다음 이제 제가 고민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는 생각으로 한 사람 몫을 하면 적어도 수습 탈락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너머에는 오래 전 제 스스로 의문을 가졌던 그들이 해결하는데 실패한 바로 그 문제를 저 자신이 이어서 풀어 나가야만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는 건방진 생각은 순식간에 쏙 들어가고 그 자리에는 숙연한 마음과 과연 저는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은 고사하고 완화할 수나 있을지 걱정이 한 가득 생깁니다. 그들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모를 리 없었습니다.
이번 49호에도 다섯 가지 다른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지난 1년에 걸쳐 쓴 뉴스레터를 시즌 1로 마무리하고 이전보다 약간 느린 템포로 시즌 2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글을 보내 들일 계획을 뉴스레터 시즌 2 계획 안내에 소개하고 있으니 참고 부탁 드립니다.
회사 근처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에 1500원인 커피 가게가 있습니다. 매장에 앉을 곳은 하나도 없고 오직 테이크아웃만 하는 가게인데 종종 점심때 들러 한국인의 따뜻하고 새카만 숭늉을 받아 들고 혹시 떨어뜨릴까 조심스럽게 회사로 돌아갑니다. 한때 고객 입장에서 털어놓던 불만을 이제 제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고 과연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회사로 돌아가 제 할 일을 할 겁니다.
그럼 다음 주에는 한 주에 한 번 글을 보내는 마지막 주로 돌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