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을 때에 대한 대비
제가 없을 때 저 대신 제 개인정보에 접근해야만 할 사람을 위한 매뉴얼을 작성해 놔야겠습니다.
지난번에는 며칠 동안 아팠습니다. 알고 보니 지난 권고사직 이후 몇 사람이 비슷하게 아팠던 모양인데 이게 어떤 심적인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다 함께 모여 있을 때 전파된 어떤 바이러스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몇 달 전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나서 3년이 지난 다음 확진자에 대한 모든 지원이 사라진 다음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너무 힘든 나머지 뉴스레터에 넣을 그 주 커버스토리 작성을 포기하고 여러 동네 고양이들을 통해 고양이 짤을 조공하며 한 주를 그냥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끝까지 숨어다닐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를 통해 3년 동안 피해 다니다가 결국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느 때와 같이 독감 백신이 출시될 때 백신을 맞고 또 코로나 백신을 맞을 수 있게 됐을 때 월요일 아침에 가서 백신을 맞고 바로 출근했습니다. 지하철에 거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 없이 생활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신체의 일부가 된 마스크를 빠뜨리지 않았고 다시는 그런 무지막지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바이러스에는 인플루엔자의 여러 타입이나 사스 계열의 여러 타입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어떤 이름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양이었고 첫째 날 저녁이 되자 몸이 떨리기 시작하고 체온이 갑자기 치솟았습니다. 지난번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을 때는 명백히 감염 가능성이 있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피해 다니다가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억울했을 뿐 감염 자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정말 조심했고 딱히 감염 가능성이 있을 행동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몸이 으슬으슬하고 열이 오르자 이번엔 짜증부터 나기 시작합니다. 아니 도대체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또 뭐에 걸리면 어쩌자는 건가 하고요. 또 병원에 가면 코로나이든 아니든 검사하는데 상당한 검사비를 지불해야 해서 열을 다스릴 수만 있으면 딱히 병원에 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그렇게 첫째 날 아주 고통스럽게 머리에 아이스팩을 대고 열이 오른 동안에는 거의 잠을 못 잔 채로 보냅니다.
그렇게 둘째 날 아침이 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은 멀쩡했고 체온은 37도로 아주 조금 높았지만 이 정도는 어제 밤에 올라갔던 숫자를 생각하면 높은 축에 끼지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잠을 거의 못 자 힘든 걸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고 또 이렇게 증상이 빠르게 개선되는 것으로 미루어 다행히 코로나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또 그냥 집에서 조용히 쉬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밥 먹고 물 먹고 가만 쉬면서 하루를 보냈고 종일 힘은 없었지만 체온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후 즈음에는 잠깐 강남에 가서 예약해 둔 술을 픽업해 올까 하고 집 밖에 나갔는데 100미터쯤 걷자 컨디션이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무리하는 대신 그대로 뒤로 돌아 집에 왔습니다. 괜히 나갔다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도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지자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첫째 날 만큼 힘들지는 않았지만 체온계의 숫자는 다시 그만큼 올라갔고 이게 도대체 뭔 일인가 싶었는데 둘째 날도 머리에 아이스팩을 대고 버티다가 새벽녘이 다 된 다음에야 잠들었고 셋째 날이 시작됩니다.
셋째 날 아침은 전날 아침에 비해 컨디션이 훨씬 좋아 이번에야말로 강남에 나가 술을 픽업하고 잠깐 회사에 들러 아무도 돕지 않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전날 잠깐 걷기 시작했다가 컨디션이 영 말이 아니어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그냥 돌아온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태였지만 여전히 무거운 술을 들고 걷다가 누가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열이 올랐다 내린 다른 날에 비하면 훨씬 멀쩡했고 또 열에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를 내지만 않는다면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날도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지자 다시 체온이 올라갔고 첫째 날이나 둘째 날만큼 힘들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체온계의 숫자는 그만큼 치솟습니다. 이번에도 머리에 아이스팩을 댄 채로 버텼고 이번에는 다른 날보다 빨리 열이 내리기 시작해 더 빠른 시점에 잠들 수 있었습니다. 역시 넷째 날 아침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무슨 밤마다 찾아오는 뱀파이어도 아니고 낮에는 멀쩡하고 밤에는 열이 오르는 병이 다 있나 싶어 이 날은 아침 일찍 동네 병원에 찾아가 증상을 설명합니다. 의사선생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럴 수 있다며 유아들은 그럴 때 열을 내려야 하지만 성인은 아예 40도를 돌파해 의식이 흐려지는 정도가 아니면 그냥 놔둬도 된다고, 아마 독감 같은데 살짝 오는 것 같고 아직 며칠 안 됐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처방전을 보니 그냥 열이 오를 때 아프고 힘든데 대응하는 진통제가 전부였습니다. 설명을 들으며 사실 첫째 날 밤에는 40도를 돌파해 진지하게 택시를 타고 근처 큰 병원 응급실에 가야 하나 한 백 번쯤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하다가 지금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병원에서는 처방전 외에는 아무 처치도 없이 - 지금은 너무 멀쩡하니까 - 진료를 마무리했습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바이러스 감염에 의해 밤에만 열이 오르는 증상은 꽤 흔하며 그냥 놔두면 되고 이런 증상이 한 3주 쯤 계속되면 다른 증상을 의심할 수 있다는 것 같아 되게 신기했습니다.
한편 여기 부터가 본론이자 웃긴 이야기인데 첫째 날 밤 체온계가 39.5도가 됐다가 한 시간 뒤 40도를 돌파하자 슬슬 정신이 흐려지고 이거 큰일 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에게 체온이 39도 쯤 된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놀랄까봐 40도를 넘겼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는데 이거 40도 넘겼다가 그렇잖아도 멍청한데 이렇게 뇌가 익어 더 멍청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또 한편으로 문득 이렇게 의식이 없어진 다음 뭔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문득 어느 유튜브에서 본 가족이 사망했을 때 맨 먼저 해야 하는 행동은 그 사람의 스마트폰을 챙기는 거라는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이렇게 의식이 없어지면 누군가 제 카드로부터 지출되는 여러 서브스크립션을 중단해 줘야 하기도 하고 또 제 개인정보에 접근하려면 여러 접근 정보가 필요한데 이들이 모두 1Password 앱에 기록되어 있어 이 앱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상 이메일 주소도 패스워드도 모두 달라 추측이 불가능해 큰 문제를 겪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체온이 40도를 돌파해 정신이 몽롱해진 가운데 들었습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고민하다가 아이폰을 집어 들고 멍한 상태로 가족에게 보내는 종단간 암호화 창을 열고는 1Password 앱 주소, 이메일 주소, 시크릿 코드 - 1Password 앱은 새 기계에 앱을 설치하고 동기화할 때 미리 정해진 시크릿 코드가 필요함 - , 패스워드를 쭉 입력한 다음 전송을 누릅니다. 이어서 아이폰 패스코드, 집 컴퓨터 윈도우 헬로 코드, 랩탑 로그인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쭉 타이핑한 다음 전송을 눌러 놓고 멍하니 가족에게 피식거리며 혹시 뭔 일 생기면 그 메시지를 침착하게 읽어보라고 한 다음 머리에 아이스팩을 대고 자리에 누워 끙끙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내가 멀쩡히 살아나면 알아서 메시지를 지울 테니 그 전까지는 그대로 두라고 한 것도 같습니다.
병원에 갔다가 그냥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며 보내 뒀던 메시지를 양쪽에서 삭제한 다음 좀 웃기기도 하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 지 한 번 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만약 어느 날 제가 없어진다면 제 개인정보에 접근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고 고통스러운 일일 겁니다. 1Password 앱에 거의 모든 접근 정보가 기록되어 있지만 애초에 1Password 앱 자체에 접근하지 못하면 이 모든 기록은 저 없이는 쓸모가 없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계정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가 있을 수 있고 이들 각각에 접근해 서비스를 중단하거나 정보를 별도로 받아 놓을 필요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절차는 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계정 정보만 가지고 따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만약을 대비해 이런 상황에 참고할 수 있는 매뉴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몇몇 사망 시 사용할 수 있는 계정 설정을 할 수 있는 곳에는 가족을 등록하고 여기서 나온 인증 코드를 전송해 놓고 있지만 실제로 상황이 일어나면 이를 기억해 메일을 검색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또 시간이 오래 지난 다음에도 현재에 발급 받은 인증 코드가 유효할지, 그 사이에 어떤 시스템 변경이 일어나 코드가 유효하지 않게 될 수도 있지 않을지 같은 의사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성인은 별로 걱정할 필요도 없는 잠깐 열이 오르는 증상에 당황한 나머지 별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해봤습니다. 언제 한번 되게 심심할 때가 되면 제가 없다고 가정하고 제 개인정보를 열어보는 방법을 기록한 매뉴얼을 작성해 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