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자랑
제 가족이자 친구가 긴 탐색 끝에 인생의 새로운 장을 시작합니다.

제목부터 자랑이라고 해 놓고 시작했지만 실은 마지막 아르바이트의 유산이나 화장실 창문의 유용함, 또 에어컨의 날 같은 구질구질한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딱히 삶에 계획을 세워 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학교를 다닌 지방에는 적당한 일자리가 없거나 있어도 매우 열악한 곳들 뿐이어서 차마 지방에서 일을 구할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학사 과정에서 통계학을 여러 학기 들어야 했는데 그 중 한 강의를 맡은 교수님이 한번은 수업 중에 우리들 중 열심히 일할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통계 관련 회사에서 먹고 자며 일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통계학을 열심히 공부해 교수님 회사에 취직하라는 이야기였겠지만 교수님 말씀에 섞여 나온 직원들에 대한 처우는 열악하다는 표현 이외의 적당한 말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통계학 성적은 그리 신통치 않아 그 교수님의 눈에 들 일은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그렇게까지 일할 필요가 있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통계학 성적이 꽤 괜찮았고 지방에서 일을 찾으려고 했다면 그 일을 했을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얼마에 팔 것인가에서 제 연봉을 까보겠다고 어그로를 실컷 끌어 놓고는 첫 게임회사에 취업할 때 받은 연봉을 까서 아마도 공분을 샀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더더욱 그렇겠지만 지방에서 올라와 수도권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채 그렇게 적은 돈으로 생활을 영위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현대에 청년 분들의 어려운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더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은 삶은 여전히 어렵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방에 계신 부모님들은 보통 그런 도시의 삶을 잘 모르시는 덕분에 왜 가끔 만나면 왜 이렇게 살지 않느냐, 왜 이 일을 하지 않느냐, 왜 그런 일을 하느냐 등등의 잔소리를 늘어놓으시곤 하지만 그 말씀에 부응해 볼 생각을 했다가도 이내 개인의 물리적 한계에 부딪쳤고 결국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제 마음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디어에서 접하는 대단한 청년 분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며 미래로 나아가고 있지만 저 자신은 그렇지 못했는데 특히 마음이 조금씩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애써 무시한 채 버티며 살아오다가 어느 날 한계를 마주해 적극적으로 제가 처한 현실에 대응하기도 합니다.
그런 생활을 한 것은 저 뿐만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저와 가족인 다른 한 사람도 그랬습니다. 이 친구는 저보다 더 좋은 성적으로 제가 지방에서 학교를 마친 다음 서울에 등장한 것에 비해 이미 대학을 서울로 와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 역시 지방에 계신 부모님들은 도시의 삶을 잘 모르셨고 왜 그렇게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으로 살 수밖에 없는지 잘 이해하시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친구도 어려운 시간을 어떻게든 살아 냈는데 제가 마지막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에서 임금을 떼일 무렵 그 친구는 더 이상 서울에서의 생활을 감당할 수 없어 마지막 학기를 남겨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고 제대로 회사를 찾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웹 스크립트를 작성하는 일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이전에 지방에 살 때 근처의 보험회사에서 독자적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할 때 윈도우 기반의 소프트웨어 일부를 작성한 적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 그 관리 시스템을 웹 기반으로 전환하려고 할 때도 조금 관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비슷한 일을 찾을 작정이었는데 각오한 대로 저를 신입으로 받아 줄 곳은 없었고 이제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그 친구가 저에게 게임을 좋아하니 혹시 게임 만드는 회사에 지원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했고 저는 그 말에 따라 일을 저질러 버립니다.
다행히 저는 제가 처음 시작한 그 일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고 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또 다행스럽게도 업계의 전설이 될만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회사에서 잘리지 않을 정도로는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렇게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며 남은 인생의 목표를 최대한 업계에서 살아남아 내부 고객을 배려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개발해 내는 역할을 할 작정입니다. 최근 기여하기 시작한 팀에서도 주변을 둘러보니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아직 신뢰를 쌓는 과정이니 그런 일이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아 둔 채 제 할 일을 하다가 기회가 오면 미리 봐 둔 일들을 가져와 조금씩 수행해 가며 프로젝트 전체가 런칭과 서비스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명 뿐인 제 가족은 자기 일을 찾는데 긴 시간이 걸립니다. 전공과 비슷한 분야의 일은 주로 쓰고 버려지는 종류의 일로 미래가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을 찾는데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지금까지 했던 공부와 연결되는 일을 찾기는 아주 어려웠고 그 범위 바깥에는 사람을 쓰고 버리는 종류의 일들이 늘어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만 아주 조금 다행이었던 점은 제가 아주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면서 시간과 돈에 쫓겨 억지로 나쁜 수를 두지 않아도 됐다는 것입니다. 일단 먹고는 살 수 있는 상태로 버티며 자신의 일을 찾을 시간을 벌었고 덕분에 소모적인 일에 사람을 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친구가 저에게 오래 전에 멈춰 둔 마지막 한 학기를 마무리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이야기를 들은 저는 굉장히 기뻤습니다. 사실 이 친구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한 학기를 마무리한다고 해서 지금의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생에 걸쳐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지으며 그 시절을 포함한 인생의 한 장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서울에서 점점 더 먼 곳으로 밀려 나가다 보니 집에서 학교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지만 대략 반 년에 걸쳐 남은 한 학기를 마무리해 드디어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친구의 졸업식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졸업의 의미를 알고 축하해줄 친구들이 있어 굳이 제가 그 자리에 나타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정도로는 오랜 세월 만의 졸업을 통해 인생의 한 장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이 그리 기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오래 전에 남겨뒀던 인생의 한 장이 마무리 되었을 뿐이었고 그 다음은 현재 진행 중인 인생을 계속해 나갈 때 마음의 짐을 아주 조금 덜 수 있을 뿐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로부터 다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친구가 취미 수준의 미술을 배우다가 문득 저에게도 언젠가 이야기했던 어릴 적 겪었던 일을 기억해냈습니다. 이 친구는 어릴 때 그림을 그리는데 소질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학교 선생님이 집에 찾아가 부모님들께 친구에게 미술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지방에서 평생을 1차 산업에 종사해 오신 부모님들께 이 말이 얼마나 무섭게 다가왔을지 상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저 선생님이 돌아간 다음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저는 어릴 때 어쩌다 보니 음악에 감각이 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저 역시 그 사실이 삶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 적어도 제 가족은 아주 오래 전에 부모님들을 무섭게 만들었던 일을 우리들 스스로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장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몰랐는데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학의 평생교육원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도예 과정이 어릴 때 선생님이 봤던 소질과 이 친구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중심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대학원에 진학합니다.
저와 비슷한 생애주기를 밟는 분들은 만약 아이가 있더라도 아직 대학이나 대학원에 보내기는 많이 이른 편입니다. 반면 저는 아이가 없지만 가족을 대학에 보내고 평생교육원에 보내고 또 대학원에 보내는 경험을 먼저 하고 있어 제 지인들을 만나면 ‘아 진짜 요즘 등록금 너무 비싸요 ㅠ_ㅠ’ 같은 아이가 없는 집에서 도무지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말을 하는 재미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 제 친구의 부모님이 아이에게 미술 공부를 시키라는 선생님의 말에서 느꼈을 공포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다음 제가 느끼게 됩니다. 미대 등록금은 결코 저렴하지 않았고 매 학기가 찾아올 때마다 웃고 있었지만 등록금 고지서에 표시된 계좌에 입금하며 ‘와 씨 진짜 장난 아닌데?’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당연히 학비 외에도 다양한 곳에 돈이 필요했고 회사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하거나 더 나은 조건을 향해 회사를 옮기거나 하는 행동을 해 가며 가정을 뒷받침했습니다. 지방에 계신 우리들의 부모님들이 아이들 학비를 마련해 주면 나머지 생활은 어떻게든 해낼 거라고 생각하셨다가도 심지어 그 학비를 지원해주시는데 실패하신 덕분에 우리들은 꽤 골치 아픈 이십대를 보냈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학비를 지불하고 그 외의 실습과 생활을 지탱했는데 그러면서도 이제는 오래 전 우리들의 부모님들이 느꼈을 그 먹먹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가족이자 배우자인 이 친구는 종종 자신이 어릴 때 겪던 어려운 일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쳐올 때 집 주변의 자연에 감싸여 자기 자신을 보호할 방법을 배워 온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주 어려운 일들은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친구의 배우자이자 가족이기 때문에 언제나 변함 없이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기에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더라도 진정으로 오래 전 자신을 괴롭히던 일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는 대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여러 가지 경험을 했는데 여러 가지 방법 중 자신의 마음에 들고 또 그 방법이라면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적당한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 방법을 찾아내는데는 대학원 등록금 이외에도 그 경험들을 위한 상당한 돈을 필요로 해 제가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요즘 학비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같은 말을 하게 만들었지만 점차 친구 스스로의 경험을 표현할 방법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미대 커리큘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는데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려면 수료 후 논문 뿐 아니라 석사청구전이라는 개인전을 치러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논문은 그동안의 공부를 통해 적당한 주제를 찾고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석사청구전은 또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종종 학교 사람들의 졸업작품 전시회, 그리고 또 다른 청구전을 둘러보며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그 동안 준비해 온 다양하지만 그들 사이에 일관된 맥락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 작품들을 늘어놓곤 했는데 그 전시가 학교의 조건을 만족하고는 있었지만 전시를 관람하는 제 기준에서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제 친구가 드디어 석사청구전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전시 날짜로부터 약 1년 쯤 전 어느 날 덜컥 전시장을 계약해버렸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전부터, 그리고 그 후로 1년여에 걸쳐 온갖 고생, 어처구니 없는 고생, 어쩔 수 없는 고생을 거쳐 전시 전날 미리 계획한 배치에 따라 벽에 적당한 높이마다 나사못을 박고 또 기물을 올릴 받침을 준비하고 또 밤 11시에 마지막으로 준비된 작품들을 차에 싣고 한밤중 문 닫힌 전시장 앞에 내려 놓는 생 쑈를 한 끝에 다음 날 시간에 맞춰 전시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시는 위에서 언급한 어릴 때 겪었던 어려운 경험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시를 준비하며 친구는 과거에 느꼈던 감정과 경험을 자신의 기법에 따라 외부에 표현하면서 당연한 신뢰를 구축한 저에게 이야기하는 것과는 또 다른 감정을 느꼈다고 합니다. 뭉클했던 건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일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어 왔는데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며 작품에 그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덤덤하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표현하며 어쩌면 자신이 이 일을 하기 위해 지금까지 이런 경험을 포함한 인생을 살아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입니다. 썩 유쾌하지는 않은, 아마도 썩 떠올리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르는 먼 옛날 어릴 적 이야기를 덤덤하게 여러 사람들에게 보일 작품에 표현해 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할 일을 찾고 작품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오랫동안 마무리하지 못한 인생의 또 다른 한 장을 마무리하고 그 다음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을 옆에서 짧지는 않은 세월에 걸쳐 봐 왔고 사실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드디어 서울 어느 한 구석에 조그만 장소를 빌어 덤덤하게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친구가 어릴 적 경험한 일들을 소리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너무나 기쁩니다.
어릴 적 겪었던 경험들로부터 친구를 보호해 주던 그 주변의 자연은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 오랜 옛날부터 왕들의 등 뒤를 장식하던 일월오봉도의 모습으로 친구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덤덤하게 이야기할 방법으로 도예에 기반해 일월오봉도가 표현하고 있는 자연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느낌을 작가의 해석에 따라 자신의 경험을 덧붙인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저는 작가의 친한 친구로써 각각의 작품들이 의도하는 바를 조금은 알고 있고 그 작품들을 전 날 벽에 걸기 위해 드릴과 나사를 들고 엉성한 자세로 벽을 뚫고 있었기에 작가의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에게 덤덤하게 늘어놓는 이 순간을 그 동안 작가 자신, 그리고 그 옆에서 작가를 뒷받침한 저 역시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걸린 벽을 둘러보며 작가 자신,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저 자신 역시 오래되었지만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어릴 적 경험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인생의 한 장을 마무리하고 다음 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번 주 내내 전시를 계속하지만 저는 지금까지와 같이 저와 제 가족의 삶을 지탱해야 하기에 회사에 있다가 주말이 된 다음 전시 마지막 날에야 실제 열려 있는 전시에 가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열려 있는 마지막 전시를 보고 하루 휴관일이 지난 다음 다시 작품들을 벽에서 떼 내 잘 포장하고 차에 싣고 서로의 인생에 한 장을 마무리한 그 공간을 떠나 집에 돌아와 다시 이전과 다르지 않은 삶을 이어 갈 겁니다. 저는 똑같이 지금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기여하며 생활을 지탱하고 제 친구는 논문을 준비하고 또 작가로써 활동을 계속해 나갈 겁니다. 아마 썩 순탄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들의 인생이 그래 왔던 것처럼요. 어쩌면 집안 한 구석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낸 바로 그 작품들이 차에 싣고 오느라 단단히 포장한 그 모양 그대로 쌓여 있을른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겠지만 분명 그 안에 달라진 점은 있습니다. 제 친구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자신의 할 일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 시간이 드리운 긴 그림자 때문에 마무리하지 못했던 인생의 한 장을 마무리하고 이 세계에 나타난 작가로써 생활을 시작할 겁니다.
지난 기분 좋은 지원 뒷부분에 조금 이야기했던 바로 그 전시를 이번 주에 시작했습니다. 저는 회사에 나가야 하니 주말 전에는 가볼 수 없지만 친구가 보내 주는 사진을 보며 친구가, 그리고 우리가 이룬 작은 성취가 우리들의 인생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며 일하는 내내 작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궁상맞은지 알고 있지만 오늘은 제 가족이자 친구 자랑을 해 보았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뉴스레터 시즌 2 계획 안내에 말씀 드린 대로 이제 이번 51호에는 지난 2주 동안 공개한 글을 함께 보내 드립니다. 지난 2주 동안에는 이런 글들을 만들었습니다. 메일을 보내지 않는 주에도 조용히 새 글이 나타나고 있으니 가끔 둘러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2주 뒤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