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가자
이제 허니문 기간은 없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점들은 제가 해결해 나갈 업무들입니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을 천천히 해 나갈 작정입니다.
출근 첫 날에 함께 처음 출근하신 분들과 널찍한 회의실에 모여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한 다음 각자 자기 자리가 표시된 종이를 들고 서로 다른 층으로 흩어졌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서로 각기 다른 부서로 이동해 앞으로 엘리베이터 안을 제외하고는 여간해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서 일하다 보면 결국은 어떤 이유로든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이전에 프로젝트가 터지거나 다른 분들이 팀을 떠나실 때 송별회를 빙자한 마지막으로 서로 알코올의 힘을 빌어 아무 말이나 해 대는 자리에서 서로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업계를 떠나지 않는 이상 대략 5년 정도 지나면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되며 그 정도 시간이 흐르면 하다못해 옆 사무실, 같은 건물에서라도 다시 스치게 되니 그 때까지 서로 잘 버티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헤어지곤 했습니다.
제 자리를 찾아 가 주변에 계신 분들께 간단히 인사하고 앉아 컴퓨터를 설정한 다음 온갖 소프트웨어와 거대한 퍼포스 디팟을 다운로드 하기 시작했고 그 동안 거대하게 쌓인 컨플루언스 구석부터 조금씩 읽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첫 며칠 동안은 저에게 별다른 업무 지시가 없을 테고 그 사이에 저는 빌드를 최대한 만져보고 또 그 동안 같은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간대에 걸쳐 여러 번 작성되어 모든 내용이 다 조각 나 있는 문서들을 최신부터 거꾸로 읽어 가며 파악해 현재 상태와 예상되는 미래 상태, 그리고 현재 상태가 되어 온 히스토리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 따라잡기에 소개했는데 팀의 여러 사람들은 그때그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템포로 문서를 생산하고 개발을 이어 나갔지만 온보딩 하는 사람은 그 모든 문서를 단시간 안에 최대한 파악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겪을 회의 따위에서 엉뚱한 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이미 2년 전에 그렇게 하지 말자고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 주제를 2년 뒤에 나타난 처음 온보딩 중인 사람이 그 히스토리를 모른 체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물어 대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거나 제가 포함된 조직의 신뢰를 떨어뜨릴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