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돕지 않고 돌아서다
어느 퇴근 시간이 가까운 저녁 다른 이유로 회사에 갔다가 습관처럼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제가 당장 기여할 수 있을 일이 일어났지만 결국 아무도 돕지 않고 돌아섰습니다.
약 두 달 전 지난 2년 동안 몸담은 프로젝트가 앞으로 존속 가능할지를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출퇴근을 반복하고 또 일상 업무를 수행하면서 뭔가 삐걱거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를 일시적인 직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 회사와 거리를 두고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싶었고 1년에 15일이 부여되는 유급 휴가를 도통 사용하지 않아 휴가가 남아 도는 마당에 시간을 좀 내 집, 그리고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아무것도 안 하며 생각 안하기, 생각만 하기를 합니다.
별 건 아니고 그냥 멀리 가서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이나 좀 오르며 아무 생각도 안 하다가 또 하루는 주의력이 부족한 사람의 할 일 관리 방법과 비슷하게 카페에 앉아 하루 종일 랩탑 키보드를 두드리며 손가락이 움직이는 속도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속도를 맞춰 요즘 느끼는 것,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는 정보의 나열, 이로부터 제가 도출한 결론 등을 무작정 써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을 들여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하며 기록한 꽤 많은 텍스트가 만들어질 무렵 어느 정도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겠다는 확신에 가까워집니다. 팀에는 미안하지만 탈출 버튼을 누를 때가 된 것입니다.
이 즈음에 하던 생각은 메타버스는 그 모호한 개념을 보강하고 전통의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지난 수 십 년에 걸쳐 쌓아 온 고객들이 세계에 찾아오고 세계에 계속해서 남아 경험을 계속하는 메커닉을 보강해 다양한 컨텐츠의 시청각적인 플랫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신흥 가상화폐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에서 이야기한 대로 거기에는 블록체인 비슷한 어떠한 주체 중립적으로 추정되는 기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메타버스는 전통의 비디오 게임처럼 다양한 장치를 통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하지만 어느 하드웨어 업계가 주장하듯 머리에 뒤집어 쓰는 VR 디바이스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으며 VR 기계 사용 여부가 메타버스의 경험을 끌어 올려 주지도 못합니다. 이 당시 우리들은 메타버스에 비디오 게임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에 따른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팀 사이즈와 런웨이, 시장 상황에 맞는 계획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또 시장 상황의 변화, 그리고 이에 따른 투자자들의 관심 변화로 추가 런웨이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메타버스 키워드를 유지한 채로 살아 남는 방법은 전통의 비디오 게임 업계가 사용하는 세계 구축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고 이는 우리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가 가진 자원 만으로는 실행 여부가 불투명했습니다.
회사는 돈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 상황에 실행할 수 있는 방안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미래에 무엇을 할 작정이든 간에 줄어드는 런웨이를 막을 방법은 없고 런웨이를 한 시간이라도 늘리려면 비용을 줄여야 합니다. 이전에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 회사에 물과 커피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고 한국계 회사에서 습관적으로 지출하던 회식비, 식비 지원도 없었으며 명백한 하드웨어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여러 번 재확인하기 위해 운영체제를 여러 번 재설치 해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 만으로는 비용을 줄이는데 한계가 있고 결국 인원을 줄이는 것 만큼 확실하게 비용을 줄일 다른 방법은 적어도 정보기술 기반 회사에는 없어 보입니다. 이는 결국 지난 주에 밝힌 권고사직으로 이어집니다. 정보기술 기반 회사에서 ‘정보’, ‘기술’ 양쪽 모두 사람들에게 분산 저장되어 있고 회사의 가치는 그런 사람들의 조합, 그리고 그 조합이 만들어낸 현재의 빌드, 그리고 그 조합이 만들어낼 미래의 빌드로 물질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의 조합’을 깨는 결정은 정보기술 회사가 ‘정보’, ‘기술’ 양쪽 모두를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보유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냥 이들을 좀 날리기로 합니다.
이 결정으로 회사는 물리적으로 법인 계좌에 남은 돈으로 떠날 사람들의 퇴직금을 지급하고 나면 더 이상 매달 이전만큼 지출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전 보다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투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남은 사람들은 이전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일을 한번에 떠맡거나 이전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고려한 계획을 남은 인력에 맞게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 과정을 잘 버틴다면 많은 것을 짧은 시간 안에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주니어님들께는 좀 잔인하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종종 새 디렉터가 태어나는 방법 중 하나는 이전 디렉터가 도망갈 때 이를 수습하는 것인데 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리드그룹이 떠난 다음 그들의 유산을 살펴보고 미래에 유효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분리하는 경험은 미래에 팀이 자원을 낭비하려고 할 때 이를 귀신 같이 찾아낼 수 있는 대단한 직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추진하던 계획을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을 테니 계획 중에서 좀 더 본질적인 측면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 때 프로젝트의 본질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고민하며 이전에는 실무자 입장에서 요구 받은 업무를 수행하는데 그쳤다면 이제는 이 업무가 프로젝트에 정말로 필요한지, 정말로 비용을 들여야 하는지 고민할 수도 있으며 이런 기회는 평생에 걸쳐 잘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분명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조금 힘들 수 있지만 이런 기회를 잘 활용하기를 빌며 팀을 떠날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나가기로 확정된 인원은 더 이상 회사에 상시 출근하지 않아도 됐는데 장비 반납 전까지는 여전히 인수인계와 당장의 급한 업무 대응을 통해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었지만 어차피 떠날 인원이 출근해 분위기를 흐리는 것 보다는 이들을 출근하지 않도록 해 분위기를 쇄신하고 또 떠날 사람들이 마음을 추스리고 구직을 할 시간을 줄 수도 있어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끔 슬랙 채널을 보고 있으면 ‘아이구… 저거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제 남은 사람들이 해쳐 나가야 할 상황이었고 떠날 사람들이 잠깐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한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 분명해서 웬만하면 끼어들고 싶은 충동을 최소화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떠나는 날까지 슬랙 알림을 끄지는 않기로 했는데 뭐랄까 아직 권한이 있는 상태에서 모든 메시지를 무시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미 원격으로 전환해 업무 집중도가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라도 도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알림 옵션을 건드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공식 업무시간 대부분은 원격에서 구직 준비를 하고 업계에 여러 고마운 분들께 사람이 물에 빠졌다는 신호를 보내 저를 좀 건져 달라고 외치는 등 프로젝트와 관련되지 않은 개인의 미래를 준비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한편 지난 주에 가족으로부터 올해 연말에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크리스마스 와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시고 싶은 것이 생김(36호에 공개됩니다.)에 설명한 대로 딱히 뚜렷한 취향이 있지는 않아 이런 데 도통 관심이 없지만 가족과 저는 함께 보낸 세월이 길어짐에 따라 취향이 비슷해져 가족이 좋아하는 것은 보통 제 취향에도 잘 맞는 편임을 알고 있기에 분명 재미있을 거란 생각을 했고 연말에 인기 있는 것은 뭐든 순식간에 부족해진다는 이전 여러 차례의 실패 경험에 따라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와인 가게에 픽업 주문합니다. 과연 한밤중에 주문하고 나서 나중에 다시 보니 주문은 순식간에 끝났고 원래 픽업 하러 가기로 한 날은 몸살감기로 앓아 눕는 바람에 못 가고 그 다음날 멀쩡해져 간만에 와인 가게가 있는 강남에 나갔습니다. 강남에는 와인 가게도 있지만 그와 멀지 않은 곳에 회사도 있습니다. 정확히는 그냥 와인 가게에서 1분 안에 있는 강남대로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횡단보도를 건너 다시 1분만 가면 곧 전 회사가 될 건물이 있습니다. 와인 가게에서 와인을 픽업할 때 수입사가 수입량을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채로 주문을 받아 난리가 났다는 하소연을 들으며 안전하게 제가 주문한 병들을 받아 들고 가게를 나설 때 문득 배에 신호가 오기 시작합니다.
사실 전 날까지 몸살감기를 심하게 앓으면서 컨디션이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고 사실 강남까지 올라오는 길에도 속이 썩 좋은 상태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식사를 잘 한 것도 아니어서 몸에 힘이 도는 느낌이 아니었는데 대강 와인 픽업 해서 집에 돌아올 수는 있을 것 같아 살짝 무리해서 집을 나선 참입니다. 하지만 묵직한 종이가방을 손에 들고 건물을 나서자 몇 분 전까지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던 주변 공기가 갑자기 더 차갑게 느껴지고 그 차가운 공기가 바로 두터운 뱃살의 지방층을 통과해 대장에 신호를 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대장으로부터 바로 뇌까지 연결된 신경 다발을 통해 이 상태가 그리 안전하지 않으며 사회적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하철에 타고 집에 가는 선택 이전에 어딘가 화장실에 들려 지금 대장이 보내 온 신호에 대응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횡단보도를 향해 걸으며 갑자기 머리는 지난 며칠 사이에 가장 빠른 속도로 가동하기 시작했고 주변에 화장실을 떠올려 봅니다. 사실 강남역 주변에는 대형 빌딩이 많아 아무 빌딩에 들어가도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주 오래 전 서울에 눈이 엄청나게 내린 어느 날 강남에서 술을 마시고 삼성역까지 광역 버스를 타러 술에 취한 채 걷다가 삼성역에 거의 도착해서 도저히 화장실을 참을 수 없어 어느 게임회사에 냅따 쳐들어가 보안 요원께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어 간신히 노상방뇨하는 아저씨가 될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종종 어떤 건물은 화장실에 키패드가 달린 잠금장치를 설치해 사람들을 좌절 시키기도 하고 또 건물마다 구조가 제각각이어서 화장실을 빨리 찾을 수 없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면 화장실을 확실히 찾을 수 있겠지만 운이 나쁘면 수 백 미터를 어정쩡한 자세로 걸어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온갖 생각이 1초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 스쳐 지나간 다음 마지막으로 떠오른 곳. 바로 회사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 조금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고 건물 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이 시간이면 모든 화장실이 비어 있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보안문 안쪽에 있지만 보안문을 열 권한이 아직은 있으며 평소에 가끔 사용해 익숙하기까지 한 바로 그 곳. 회사 화장실. 더 이상 생각할 것 없이 뇌는 대장에게 확실한 해결 방법이 있고 곧 실행할 수 있으니 조금만 참아 보라는 신호를 보낸 다음 최대한 자연스럽게 여느 퇴근 시간에 강남역 주변을 걷는 멀쩡한 직장인처럼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걸으며 회사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물론 회사까지 올라가는데는 가장 싼 상품과 신뢰와 멍청한 엘리베이터 사용기에 소개한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엘리베이터가 버티고 있었지만 그것만 어떻게 잘 넘기면 강남역 한복판에서 사회적 존엄의 상실을 겪을 위험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2분을 기다린 다음에야 도착했지만 다행히 대장은 자기 주장을 굽혀 제가 멀쩡히 걸어 엘리베이터에 타고 똑바로 서 있을 기회를 주었고 이 기회를 감사히 여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동안 입을 꽉 다문 채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층에 도착하자 전혀 바쁘지 않은 것처럼 허리를 쭉 편 채 똑바로, 그리고 천천히 걸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보안문 옆에 달린 기계에 인증을 하고 문이 열리고 평소 출근하는 것처럼 자리로 걸어가 의자에 묵직한 종이가방을 올려 놓은 다음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또 누구와도 아는 체 하지 않고 바로 화장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이동합니다. 중간에 유리문이 하나 있는데 그걸 거의 걷어차다시피 해서 열고 또 화장실 문 역시 그 뒤에 누가 있을 위험이 있건 말건 거의 쾅 소리가 나도록 걷어 찬 다음 들어가 화장실에 갈 수 있었고 이제 이 다음부터는 마음의 안정을 찾습니다. 심박이 제법 올라 있었지만 움직이는 중이어서 애플워치가 심박 경고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이제서야 몸에 식은땀이 나고 아까 밖에서 종이가방을 들고 처음 건물 밖을 나서며 마주한 강남대로의 한기로부터 지금 앉아 있는 이 편안하고 안전한 장소에 도달하는 그 사이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여기서의 이야기는 머릿속에 든 생각만 설명하고 그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두의 편안한 읽기 경험을 위해 더 이상 묘사하지 않겠습니다.
한편 사회적 존엄 상실의 위기를 무사히 모면하고 대뇌와 대장이 서로 수고했다며 악수를 나누며 기쁜 마음으로, 하지만 여전히 표정은 권고사직 당한 회사 사무실에 잠깐 나타난 사람의 그리 즐겁지는 않은 얼굴을 한 채로 종이가방을 가지러 다시 자리에 갔다가 평소 같으면 아직 퇴근할 시간이 안 된 참이어서 종이가방을 의자에서 치우고 잠깐 자리에 앉아 컴퓨터의 잠금을 해제해 봤습니다. 읽지 않은 메일, 슬랙 메시지, 훑어보지 않고 그냥 지나간 커밋 메시지들이 지나갔는데 얼핏 살펴보니 마일스톤 마감이 지났지만 여전히 완결되지 않은 기능과 이 바탕 위에서라도 어떻게든 조립해 게임처럼 만들어 보려는 남은 기획팀 인원들의 사투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파악합니다. 불가능한 목표를 부여하고 이를 수행하게 만들어 일시적으로 팀의 효율을 끌어 올리는 마감 일정을 통한 학대 전략(35호에 공개됩니다.)은 개인적으로 이 전략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효과가 없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는 매뉴얼을 만들어 하나하나 설명해 가며 전달하려고 해도 잘 전달되지 않던 여러 작업 방식이 매뉴얼 없이도 이를 적극적으로 익혀야만 하는 개개인의 절박함 속에 순식간에 전달되어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하게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작업이 그렇게 순조롭게 인계된 것은 아니어서 어떤 작업은 개발이 진행 되어 조립을 시작할 수는 있는 상태가 됐지만 도대체 뭐가 어떻게 개발된 것인지 담당자가 잘려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남은 사람들이 어디부터 파악하기 시작해야 할 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상황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은 제 담당이 아니더라도 개발 중인 여러 사양의 진행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는 팀 밖으로 나간 문서를 제 스스로 컨펌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리얼엔진과 데디케이트서버 기반 개발에서 딱히 다른 따른 구현 방법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며 종종 그냥 지나치기 쉬운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커밋 로그를 살펴보기만 해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엔지니어링 부서에서 커밋하고 빌드가 돌아가는 동안 아직 기획에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커밋 로그에 포함된 데이터 에셋을 열어 데이터를 입력하기 시작하고 빌드가 끝나면 바로 로컬에서 돌려본 다음 정상 작동하고 제대로 조립하기 시작하겠다고 담당자에게 통보하면 서로 말을 주고 받을 필요도 없이 일을 빠르게 진행 시킬 수 있었고 이런 상황을 반복해 서로 신뢰를 쌓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일종의 묘기에 가까워서 팀원 모두에게 이렇게 일하라고 할 수 없었고 또 명시적으로 이 과정을 공유하지 않으면 남은 팀원들이 진행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에 업무 진행을 전파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난 권고사직 이후 그런 전파를 게을리 했기 때문에 팀이 파악하지 못한 일이 있었고 제가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 남은 팀은 담당자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확인하기 시작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방금 화장실에서 적어도 저 자신에게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마주했다가 이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깐 자리에 앉아 컴퓨터에 로그인 했다가 이런 상황과 마주하자 잠깐 이 상황에 개입해 빠르게 교통정리하고 남은 기획팀이 조립에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할 지 고민했습니다. 사실 별 게 아닙니다. 그냥 방금 마우스로 찍어 본 커밋 메시지에 포함된 데이터 에셋을 열어 살펴보고 아무렇게나 데이터 한 두 개를 넣은 다음 빌드가 끝나는데 맞춰 다시 리파지토리를 업데이트 해서 언리얼 에디터를 실행하고 빌드를 플레이 해 기능이 동작하는지 확인한 다음 제 자리에서도 기능이 별 문제 없이 동작하면 데이터 에셋 위치와 입력 방법을 새 기획 담당자에게 설명하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기능이 잘 동작한다는 가정 하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 3분이면 끝날 일입니다. 설명하는데 시간이 걸리거나 설명을 받을 담당자가 최신 빌드를 받아 놓지 않았다면 이를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해도 한 5분이면 충분합니다.
그 다음은 담당자가 조립을 시작해 지금은 그냥 동작하는 기능일 뿐이지만 이를 게임처럼 보이게 만들 데이터를 넣고 테스트를 반복하는 과정으로 바로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뭐랄까, 갑자기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저는 이번 달 말일 날짜로 해고될 예정이고 남들이 당한다는 여느 구조조정처럼 그 댓가를 받은 것도 아니며 해고 30일 전 서면 통보를 받은 것도 아니고 내년 휴가가 발생하면 이를 정산하는데 돈이 들기 때문에 그 전에 해고하느라 12월 말일 까지 해고를 실행하는 이 꼴이 마음에 안 들었고 기분이 나빴고 이를 이 의사결정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팀에 투사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등 뒤에 있는 엔지니어들의 대화는 최근에 모여 결정한 요구사항 변경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어딘가 기록이 없는지 찾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대화일 뿐이었고 그 대화에 제가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겠고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도 알 것 같았습니다. 곧 집에 가야 하니 일기예보 사이트에서 바깥 기온이 몇 도인지 확인하다가 브라우저에 탭을 하나 더 열어 회사 노션을 띄우고 검색할 것도 없이 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뒤에서 들리는 대화에 필요한 기록을 찾았습니다. 지난번에 남은 일정이 빠듯하니 특정 기능을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미래의 유지보수 자원에 기대기로 하고 현재에는 좀 더 가격이 싼 방식을 사용해 개발하기로 했는데 이 때 요구사항이 조금 바뀌게 됐고 이 내용이 문서에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쨌든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이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있는 수준으로 기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쩐지 이 페이지를 그냥 공유 채널에 붙여 넣고 등 뒤 저 편에서 이야기하는 분들을 멘션 하기만 하면 순식간에 끝날 일이었음에도 갑자기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약식으로 구직 중임을 알리고 구인 의사를 타진했던 몇 곳에서 거절 의사를 들은 참이어서 제 마음도 마냥 편하지는 않았고 그런 위축된 제 상태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이런 상태를 만든 의사결정을 한 사람들이 아닌 엉뚱한 사람들에게 이 과정에 드는 제 감정을 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안 하는 행동을 통해 투사하고 있었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정확히 사전을 찾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일의 처음과 끝을 모두 잘 마무리하는데 사용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떤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자는 의미에서 비록 이번 달 말 날짜로 이번 달 월급 말고는 아무 것도 없이 해고 될 예정이고 이미 출퇴근을 개인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하고 있으며 인수인계 이외에는 개발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있고 또 명시적인 업무시간의 일부를 구직 활동에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어떻게 해야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는 것인지 생각해봤습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 개인적인 관점의 프로젝트 포스트모템 글을 공개할 예정인데 아직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 포함할 예정인 글 제목 중 하나는 ‘여섯 번째 마일스톤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입니다. 이는 PvP는 정말 저렴한가? 의사결정 따라잡기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의사결정이 어쩌다 일어났는지, 혹시 이를 성공 시킬 방법은 없었는지, 또 성공하려면 계획을 어떻게 수정해야 했을지에 대한 생각을 적는 글이 될 예정인데 지금까지도 이번 여섯번째 마일스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유종의 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금 이들을 도와 도움 없이 이들이 소모할 한 시간을 1분으로 줄여줄 수 있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계획을 조정하지 않고서는, 다음 서비스 일정을 조정하지 않고서는, 이들을 포함한 목표 수준을 조정하고 마일스톤 시작 전에 검토한 플레이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이에 따른 마일스톤 계획 재검토에 해당하는 업무들을 수행하지 않고서는 예정한 서비스를 수행할 수 없어 보입니다. 만약 어떤 기적이 일어나 서비스를 수행하더라도 이로부터 정량적인 힌트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 정량적인 힌트를 얻을 사람이 저 자신이고 서비스가 수행될 즈음에 저는 다른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테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또 이런 제 감정 상태에서 유종의 미란 무엇인지 잠시 제 자리 주변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고 그에 알맞는 페이지나 데이터에셋이나 커밋 로그를 열어보고 또 빌드를 실행해 잠깐 상태를 확인해 보다가 문득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제 옆으로 지나가다가 ‘어 우진님 오셨네요?’라며 인사를 건냈고 웃으며 인사를 받고 또 인사를 했지만 더 이상 뭘 할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어쩐일이시냐는 물음에는 사실대로 ‘근처에 왔다가 똥 싸러 들렀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니고 정말 그래서 온 건데 상대는 이 말을 농담으로 이해했을지 아니면 정말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 끝에 컴퓨터를 잠그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내려놨던 크리스마스 와인이 든 묵직한 종이가방을 들고 아무도 돕지 않은 채 조용히 유리문을 열고 나가 보안문을 통과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아까보다 더 추워졌지만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더 많아진 강남대로 주변 거리를 걸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습니다. 지하철 역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대형 빌딩마다 예쁘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잠깐 바라보고 그런 장식 뒤에 서 있는 유리로 만든 반짝이는 오피스 빌딩 안에 아직 빌드를 완성하지도, 게임을 조립하지도 못한 채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 지 몰라 허둥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했습니다.
이번 34호 뉴스레터에도 다섯 가지 다른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지난 내가 살아남은 이유 끝부분에 간만에 마주친 동네 고양이 걱정을 했다가 간만에 다시 마주쳐 기뻤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날 오전의 중요한 일정은 결국 잘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게 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가요?라는 중요한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고 이 생각을 해 보는 과정은 무척 신선했고 또 즐거웠습니다.
한편 지난 권고사직에 회사 돈을 아끼려 항상 저녁을 제 돈으로 산 버거킹의 단품 버거로 때우다가 회원 등급이 킹이 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날은 기분이 울적해서 버거 단품에 조그만 사이드 하나를 추가하는 사치를 부렸는데요, 그걸 들고 집에 가다가 혹시 이 친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좁은 골목으로 향했습니다. 이 친구를 돌봐 주시는 집 문 앞에 앉아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걸 방해하고 말았지만 간만에 다시 만나 좋았습니다.
한참이나 쓰다듬게 해 주고 또 제 손이 더럽다고 생각했는지 핥아 주기도 했지만 핥아준 다음 부비고 또 핥아 주고 또 부비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미루어 마냥 부빌 수 있도록 깨끗하게 하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참을 그러다가 일어나 작별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걸어 멀어졌는데 몇 발자국 따라오다가 이내 자리에 멈춰 서서 한동안 제 뒷모습을 바라봐 줬습니다. 뭐랄까 되게 위로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연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그럼 또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