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얼마에 팔 것인가

오늘은 제 연봉을 까보겠습니다.

나를 얼마에 팔 것인가

계약서 상에는 계약 내용에 대한 비밀유지 조항이 있고 이 조항을 어기면 회사는 저를 해고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되게 오래 전에 이루어진 계약이고 이미 저는 그 회사를 아주 아주 오래 전에 그만 다니게 됐으니 계약의 일부를 이야기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전 시대에는 호봉 같은 방식으로 급여를 책정했다고 하는데 저는 처음부터 연봉 계약을 하는 회사와 그런 시대에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첫 게임회사에서 연봉 계약을 할 때 얼마를 제안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고 얼마 정도를 받아야 하는지도 잘 몰랐으며 제안이나 협상이 어떤 형식이나 절차를 통해 진행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제가 일하게 될 부서를 포함한 상위 본부장님과 마주 앉아 ‘연봉을 얼마로 하실 생각이세요?’라는 질문을 전혀 준비 없이 받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을 뿐입니다.

졸업 전 직장을 구하러 서울에 올라왔지만 아직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잘 몰랐습니다. 마지막 아르바이트의 유산에서 소개한 대로 웹 스크립트를 아주 조금 다룰 수 있었고 이걸로 요즘 기준으로 설명하면 백엔드에 조금 더 가까운 일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 회사들에 신입으로 이력서를 내 봤는데 결과는 당연하게도 서류에서 광탈합니다. 아직 졸업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어 이를 어쩌나 하고 또 습관처럼 게임을 플레이 하다가 문득 친구로부터 게임회사에서 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듣습니다. 처음 들을 때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보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쪽으로 생각이 변합니다. 그때 한참 열심히 하던 한 MMO 게임 웹사이트의 게시판에 직원 분들이 글을 쓰면 이름 옆에 개발팀 아이콘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정말 멋지고 또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라길래 한 번도 작성해본 적 없는 게임 기획서라고 이름 붙인 쓰레기를 만든 다음 한 줄 짜리 이력서에 첨부해 제출했는데 황당하게도 정말로 연락이 옵니다.

회사 건물 1층의 어느 회의실에서 면접을 봤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회사에서는 모바일 개발팀과 MMO 개발팀에서 게임디자인 할 신입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신입이니까 처음부터 MMO 개발팀 같은 곳에 이력서를 낼 생각 조차 못하고 모바일 개발팀이라면 어떻게 조금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 끝에 모바일 개발팀에 제출할 문서를 만든 다음 마지막 순간에 바로 위에 있던 엉뚱한 이메일을 통해 제출한 것이었습니다. 면접을 진행하며 질문을 주고 받다가 마음 속으로 제 실수를 인지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지금 제가 잘못된 면접 자리에 있고 선생님들도 잘못된 사람을 면접 보고 있으니 여기서 멈추자고 할 수도 없어 그냥 처음부터 이 자리에 지원한 것처럼 행동했고 웃기게도 저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시던 분들은 저를 신입으로 채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보통은 면접을 끝낸 다음 인사팀을 거쳐 결과를 통보 받고 그 다음 단계로 진행하곤 하지만 이 때는 그 자리에서 바로 결과를 통보 받은 다음 바로 이어서 위층으로 올라가 간소한 2차 면접, 그리고 연봉 계약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방금 면접 보고 올라온 사람이 바로 연봉을 질문 받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서울에 올라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게임 업계에서 일할 계획도 아니었기 때문에 한달에 얼마나 받아야 생활을 지탱할 수 있을지, 또 이 업계에서 신입에게 돈을 얼마나 주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정보를 알아본 다음 다시 오겠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대강 1년은 12개월이고 한 달에 한 백만원 쯤 있으면 어떻게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다음 천 이백 만원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을 하는 그 순간에도 세금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성함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본부장님은 이후 지금에 이르는 세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가 제시한 금액보다 더 높은 금액인 천 사백 만원으로 연봉을 결정합니다. 나중에서야 이 금액이 어처구니 없이 작은 금액일 뿐 아니라 당시 서울 생활이 아슬아슬하게 가능한 수준 밖에 되지 않으며 미래를 도모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금액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게다가 작은 회사와 신입 사이 관계에서 소개했듯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신입은 빠르게 성장하지만 회사는 이를 과소평가하고 이에 따른 보상 역시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 도달했는데 그 뒤 몇 번의 연봉 인상이 파멸적인 수준으로 끝나면서 이직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직을 할 때는 다른 때에 비해 연봉을 조금 더 올릴 수 있었지만 그 다음부터 인상 수준은 거의 비슷했습니다. 팀에서 아무리 난리를 쳐 인사평가에 높은 등급을 받아도 이로 인한 임금 상승은 의미 없는 수준이었고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해 봐야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운이 좋으면 물가상승률을 따르고 운이 평범하거나 좋지 않으면 물가상승률을 따르지도 못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회사가 보는 물가상승률은 전경련에서 발표하는 숫자였고 우리들이 실제로 세상을 살아 가며 직접 접하는 물가는 따로 집계되는 실질물가상승률 또는 생활물가상승률에 가까웠는데 회사에서 보는 물가상승률은 항상 우리가 체감하는 숫자에 비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낮았습니다. 이 즈음이 되어 주변을 살펴보니 다들 같은 회사에 오래 있으면 도통 급여를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회사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 성장하면 같은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는 대신 회사를 옮기며 급여를 올려 보상을 받습니다. 첫 회사는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수준의 신입 급여를 줄 뿐이어서 첫 MMO 프로젝트에서 일 하는 요령을 배운 주니어들이 빠르게 사라져 어려움을 겪었고 저 역시 그렇게 사라진 주니어 중 하나입니다.

지난 권고사직 이후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작성하고 면접을 보러 다니며 새로운 분들을 만나고 또 이전에는 잘 생각하지 않던 주제에 대한 질문을 받으며 즐거워 했습니다. 특히 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가요?, 무엇을 위해 게임을 만드는가, 현대 MMO 디자인에 대한 갈증 같은 주제는 면접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순발력에 의존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질문들을 머릿속에 갈무리 한 다음 돌아오는 지하철에 서서 다시 생각해보면 평소에 잘 생각하지 않던 주제로 생각할 수 있어 좋았고 또 이를 다시 글로 옮겨 정리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어 좋았습니다. 하지만 여러 면접을 진행할수록 정신력이 조금씩 소진되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면접 과정들이 마무리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습니다. 면접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면 면접 단계는 계속되어야만 하고 그러면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그러는 사이에 오가는 리퍼쳌 속에 싹트는 카르마에 소개한 각자의 네트워크를 통원해 저에 대한 평가를 얻으려는 곳들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섬뜩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면접의 다음 단계로 진행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의미이니 그리 무서워만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몇몇 프로젝트에서 저를 나쁘지 않게 봐 주셔서 다음 단계로 진행하게 됐는데 그 다음 단계 중 하나가 바로 맨 처음에 이야기한 제가 직접 제 연봉을 설정하고 이를 회사와 협의하는 일입니다. 여전히 계약서에는 내용 자체에 대한 비밀 유지 조항이 있고 이를 어기면 손해 배상을 하거나 해고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같은 내용으로 계약하기 때문에 저는 제가 시장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시장 전체를 기준으로 어느 정도 퍼포먼스를 내는 사람인지, 또 퍼포먼스에 따라 어느 정도 급여를 받아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대강 동북아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획득하는 비언어적 신호, 그리고 고맥락 언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정보를 통해 전체 시장에서 제 위치, 그리고 저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받는 급여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에 비해 회사는 모든 직원들의 인사 평가 자료, 이들의 피어리뷰, 그리고 모두의 급여 내역을 정확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매년 연말정산을 대행하며 각자의 가계 상황 정보마저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회사는 이미 연차에 따른 연봉 상한을 규칙으로 정해 놓고 있는데 이 정보를 직원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회사가 정해 놓은 연봉 상한을 초과하는 연봉을 제안하면 회사는 규정 상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면 더 이상 협상을 할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이 상황에서 협상을 지속하려고 하면 회사는 여러 사람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가령 이전 서류 전형과 면접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요구하는 상한을 초과하는 연봉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다시 한번 묻는데 이 질문을 인사 부서를 통해 받는다면 부담을 덜 느끼며 답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질문을 부서의 주요 비용을 집행할 권한이 있는 상급자로부터 받는다면 압력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소위 연봉 협상이라고 부르는 과정 대부분은 서로의 정보수준 차이, 권한 차이, 그리고 이로 인한 협상력 차이에 의해 협상이라기 보다는 거의 제안과 동의 혹은 거절 정도의 과정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슬슬 제 가격을 제시해 달라는 메일을 받기 시작했고 부족한 정보, 이로 인한 부족한 협상력에 기반해 제 가격을 책정해야 하는 익숙하지만 무력한 상황이 다시 시작됩니다.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의 협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 중에는 전 회사를 그만 두지 않은 상태에서 협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음 회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할 때 이전 회사를 멀쩡히 다니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 제안을 쉽게 거절할 수 있습니다. 상대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직 전 회사에 재직 중인 사람에게는 함부로 ‘황당한’ 제안을 하지 않곤 합니다. 그래서 회사가 아직 멀쩡한 상태에서 이직을 준비한다면 반드시 이전 회사를 멀쩡하고 성실하게 다니는 상태여야 합니다. 이전에 어느 PD님은 제가 이직 의사를 밝히자 여러 이야기 끝에 그러면 이직을 진행하는 동안 계속해서 팀에 남아 협상력을 유지하라는 말씀을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전 회사에서 이미 권고사직 된 상태입니다.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 정보를 조회해 보면 사업장 가입자에서 지역 가입자로 변경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제가 따로 자영업을 하지 않는 이상 제가 이미 백수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또한 회사들은 입사 절차에 여러 가지 이유로 제가 백수라는 사실을 정부가 증명하는 서류 모양으로 제출하기를 요구하는데 이에 따라 저는 제 스스로 제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요구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런 이유로 이전 회사의 권고사직 절차에 상당한 불만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법인 계좌에 남은 돈을 생각하면 불만이 있더라도 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따른 협상력의 감소는 굉장히 크리티컬한 요소여서 이해는 하지만 답답하고 또 불만이 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다음 회사가 저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한다 하더라도 저는 그저 백수일 뿐이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제안을 거부한 다음 처음부터 다른 회사에 지원하는 절차를 반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 이번에는 부득이하게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에 지원하고 또 동시에 여러 회사와 채용 과정을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한 명이고 또 동시에 한 곳에서만 일할 수 있으니 어느 한 회사를 선택하는 순간 그때까지 채용 과정에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을 지출한 나머지 회사들은 손해를 입게 됩니다. 이전에는 운이 좋은 나머지 이동하기를 원하는 회사 한 곳에 지원하고 그곳 하나와 채용 절차를 진행해 왔습니다. 덕분에 저 자신도 동시에 여러 채용에 대응하지 않을 수 있었고 회사 역시 거의 마지막 단계까지 채용을 진행했지만 갑자기 출근하지 않기로 결정해 시간과 노력이 의미 없게 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전의 이직 거의 대부분은 이전 회사에 소속된 상태로 진행해 최소한의 협상력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협상력을 기대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여러 채용을 동시에 진행한 다음 각각의 진행 상태에 기대 만들어낸 협상력에 기반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회사는 항상 저에 비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와 훨씬 큰 권한을 가지고 있고 이에 비해 저는 아주 작은 협상력을 확보한 상태이지만 이 상황에서 제가 할 일은 그래서 이번에는 저를 얼마에 팔 것인지 결정해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 결정은 항상 이상한 고민을 하게 만듭니다. 저는 여느 다른 사회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게 조금 일하고 많이 벌고 싶습니다. 하지만 회사 역시 여느 회사와 별로 다르지 않게 조금 주고 일은 많이 시키고 싶을 겁니다. 이렇게 서로의 목표가 상대의 목표와 완전히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상황에서 저는 모두가 받는 급여를 불분명하게 파악한 온전하지 않은 정보와 제가 이전에 다른 회사들로부터 받아 온 급여, 앞에 언급한 물가상승률, 이전 회사들로부터 받은 퍼포먼스에 기반한 인사평가, 포괄임금제 적용 혹은 비적용에 따른 차이에 대한 보정치 등을 고려해 제가 먼저 금액을 제안해야만 합니다. 유튜브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인사 관련 영상에서 자신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은 이상 연봉은 회사 내규에 따르겠다고 작성하라는 안내를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진행된 협상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가 있어 이제 회사는 이전에 비해 훨씬 적극적으로 지원자가 먼저 연봉을 제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 회사는 제가 먼저 희망 연봉을 기입해 회신하도록 했고 또 다른 회사는 이전에 받은 연봉을 증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서류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특히 두 번째 사례는 이전 회사와 마지막 계약서를 요구했는데 만약 제가 그 이전 회사에 아직 다니는 중이라면 이 요구에 응하면 이전 회사의 해고 사유에 해당하는 이상한 상황이 됩니다. 계약서 뿐 아니라 급여 명세서, 원천징수영수증을 함께 요구해 지금 이 단계가 연봉을 결정하기 위한 단계인지 아니면 이미 입사가 확장되어 주요 서류를 제출하는 단계인지 헛갈릴 정도입니다. 이 사례에서 회사는 이미 모든 사람의 정보와 이들의 평가, 각자가 받는 급여를 완전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이전에 받던 급여 정보 역시 완전히 파악해 제가 터무니 없이 높은 급여를 요구하지도 않겠지만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완전히 차단해 회사의 협상력을 극대화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제가 이전 회사에 여전히 소속되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협상력 또는 여러 회사의 채용 과정을 동시에 진행해서 얻을 수 있는 아주 작은 협상력이라도 준비하지 않으면 사실상 연봉을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회사가 인정할 수 있고 또 제가 제 제안에 대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깊이 후회하고 또 좌절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적당한 제 가격은 얼마일까요. 과연 저를 얼마에 팔아야 좀 더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시작해 조직의 모든 사람들과 신뢰 관계를 완전히 바닥부터 구축해야 하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을 기꺼이 시작할 수 있을까요. 일단 모든 근거는 이전에 받던 금액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금액은 다시 그 이전에 받던 금액으로부터 결정되고 이 과정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결과입니다. 회사 각각에서 받던 금액은 그 회사에 채용될 때 회사가 인정한 금액이고 그 이후 인상폭은 인사평가를 조금이라도 더 잘 받기 위해 난리를 친 댓가로 거의 무의미하고 맥이 빠질 정도의 금액을 아주 조금씩 올려 온 결과의 총합입니다. 여러 회사에 소속된 여러 사람들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정해진 이전 금액으로부터 시작해 최소한 뉴스에 나오는 작년 물가인상률, 그리고 올해 물가인상률 예측값을 반영하는 수준이 최소값이며 회사가 이미 연차나 퍼포먼스, 평가에 따라 금액을 설정해 놓았다 하더라도 제가 설정한 제 최소값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회사의 제안을 거절하는 행동은 위에 소개한 협상력이 있을때만 가능합니다. 만약 제가 백수이고 다른 채용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지도 않으며 지금 당장 은퇴해도 될만한 돈이 있지도 않다면 회사가 얼마를 제안해도 이를 거절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록 백수 신세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진행 중인 다른 채용들이 있어 이들 각각을 협상력에 동원해 각각을 비교할 수도 있고 회사의 제안에 의문을 표시하거나 다시 제안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전에 오가는 리퍼쳌 속에 싹트는 카르마에서 이야기한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여러 회사의 인사 부서 직원들이 한 방에 모여있다는 단톡방의 존재에 대한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어 여러 채용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그나마 아주 조금 확보할 수 있는 협상력 역시 약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협상력을 유지할 수 있는 확실한 전략은 협상력이 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활용하되 절대 거짓말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회사로부터 더 나은 금액을 제안 받았을 때 이를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만약 뒤에서 이들 사이에 정보 교환이 일어나면 저는 그냥 웃기는 사기꾼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해봐도 여전히 저를 얼마에 팔지 결정하고 이를 회사에 제가 먼저 제안하는 것은 돈 이야기를 꺼내는 일을 꺼리도록 사회적으로 교육 받아 온 동북아시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 입장에서 여전히 편안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이 회사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제가 받아야 할 것 같은 금액을 정하고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는 일은 이력서를 쓰며 자기반성을 위시한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경로로 자신을 위축시키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저는 제 가격을 책정해 각각의 회사에 제안하고 인사 부서나 저를 고용할 가능성이 있는 잠재 상사님과 여전한 압도적 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협상 아닌 협상을 진행할 작정입니다. 어느 조직에 채용 되어 일하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노력하며 성과를 낼 작정이지만 앞에서 잠깐 이야기한 대로 그런 행동을 얼마나 더 즐거운 마음으로, 혹은 그렇지 않은 마음으로 시작하는지에 차이가 있을 겁니다. 또 장기적으로는 조직에 더 오래 남아 회사의 시행착오를 보관한 스토리지로써의 역할을 오래 수행할 수 있을지에 영향을 줄 겁니다.

과연 저를 얼마에 팔아야 할까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일단 가격을 요청한 곳들에는 가격을 제안했습니다. 부디 이 압도적인 권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이 적당한 존중을 통해 결과에 다다를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이번 40호에는 네 가지 다른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지난 15호첫 홀더 테스트를 마쳤습니다처럼 이야기 하나가 너무 길어져 둘로 나누느라 주제가 네 가지로 줄어들었습니다.


크립토 게임은 언제 어떻게 돈을 벌까 (1)
크립토 게임들은 고객으로부터 직접 돈을 받지 않고서도 돈을 벌 수 있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이들의 표준 시나리오를 살펴봅시다.
크립토 게임은 언제 어떻게 돈을 벌까 (2)
크립토 게임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돈을 벌까요? 고객들에게 명시적으로 돈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돈을 벌려면 어디선가 돈을 받기는 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알아봅시다.
마지막은 조니와 함께
사이버펑크 2077을 처음 접하고 나서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나이트씨티에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윈도우와 맥의 저시력 지원 기능
사지도 않을 새 랩탑을 알아보다가 문득 윈도우와 맥 사이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원하는 저시력 지원 기능에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잠에서 깨는 습관, 폰을 집어드는 습관
아이폰의 자동화 기능인 단축어 앱을 사용해 몇몇 이벤트가 일어날 때 이를 기록했다가 제가 얼마나 게으른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를 숫자를 통해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주에는 올해(2024년) 3월 말 까지만 운영하고 문을 닫는다고 알려진 유성호텔에 이벤트 한정판 굿즈를 얻기 위해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리뉴얼을 위해 문을 닫는 줄 알았는데 기사를 찾아보니 폐업하고 다른 건물을 짓는다고 합니다. 올해로 문을 연 지 109년이 지났다는데 조금 낡은 구석이 없지 않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리뉴얼을 거듭해 그리 뒤쳐지지는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시대에 맞지 않게 낙후된 이미지를 주어 이용객이 충분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로비에 전시된 처음 문을 열 때의 사진과 문서, 그리고 지난 10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계속해서 변해 온 호텔의 역사를 살펴보니 저 역시 이곳에 처음 와 봤지만 이렇게 사라지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장소 하나가 완전히 잊혀질 모양입니다. 의미 있는 굿즈를 얻어 기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좀 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 싶습니다.

또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