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사의 의도와 우리의 의도
이전에 진행하던 일이 실패한 큰 이유 중 하나는 투자자의 의도와 우리의 의도를 서로 다른 언어로 의사소통 해 서로 다른 목표를 진행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지난 권고사직 때 함께 잘린 사람들끼리 만나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도대체 우리는 뭘 잘못해서 지금 이런 꼴을 당했는지, 또 그 이후에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들 12월 까지 일한 다음 잘리고 1월은 좀 쉰 다음 천천히 구직을 진행할 작정이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다들 집에서 좀 쉬거나 겨울 스포츠에 집중하거나 해외로 떠나 한국의 이 모든 잡음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선택한 분도 계십니다. 적극적으로 구직을 진행 중인 사람은 저 한 명 뿐이었는데 이는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 중 가장 가난한 입장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좀 있다면 일을 쉬며 조금 더 느긋하게 일을 알아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수도권에서 태어나고 자라 도움을 받을 사람들이 수도권에 살고 있거나 이미 도움을 받고 있다면 훨씬 이 모든 상황을 관조하며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금전적으로 여유가 훨씬 적고 가까이에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입장에서는 느긋하게 쉴 시간을 확보할 여유를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실 권고사직 즈음에는 마음이 급해 당장 효과가 있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위축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며 상황을 파악하고 또 시장을 둘러보고 자리를 찾아 지원해 인터뷰를 보러 다니며 처음 만나는 분들과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인맥을 통해 소개 받은 자리에 간 다음 거기서도 처음 보는 분들과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사실 제가 마음을 급하게 먹는다고 해서 적절한 자리가 뚝딱 생기는 것도 아니고 또 업계 전체적으로 보면 다들 구조조정으로 시장에 사람들을 쏟아내는 반면 사람을 구하는 쪽은 상대적으로 적어 지금은 구직하는 입장에서 협상력이 크게 떨어지는 시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급하게 먹어서 좋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협상력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생각해 보면 지난 권고사직은 회사의 사정을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넘어갈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실제로 해고된 사람들이 겪게 된 협상력의 급격한 감소를 생각하면 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도 돕지 않고 돌아서다, 소코로프의 생애와 같이 회사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또 갑자기 잘리면서도 위로금 한 푼 없이, 게다가 연말에 맞춰 정확히 해고되어 해고 날짜가 하루만 뒤로 밀렸어도 부여되어야만 하는 2024년도 연차와 이에 따른 보상을 회피하기 위해 2023년도 마지막 날에 딱 맞춰 해고를 실행한 것 역시 감정을 좋지 않게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만약 해고할 사람들에 지급할 위로금이나 다음 해 연차 보상을 할 돈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들을 해고하려 했다면 적어도 해고될 사람들이 다음 직장을 탐색하는 동안 협상력을 제공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협상력은 새 직장과 처우를 협의할 때 필요합니다. 가령 이전 직장에 아직 고용된 상태로 새 직장을 구하면 처우 협의 때 좀 더 나은 협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회사와 개인 사이의 계약은 항상 회사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회사는 저와 비슷한 연차, 저와 비슷한 퍼포먼스를 내는 사람들의 처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연말정산을 대행해 직원들 각각의 금전 사정마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반면 개인은 자기 자신의 처우밖에 모르며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의 처우 정보를 얻는다 하더라도 이는 부정확할 가능성이 높아 함부로 신뢰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처우 협의 때 나쁜 처우를 제안 받으면 협상이 필요한데 이 때 필요한 것이 계속해서 언급하는 협상력입니다. 나쁜 제안을 받을 때 만약 자신이 아직 이전 회사에 고용 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이를 언급하며 제안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 단계까지 또 다른 사람을 선택해 인터뷰를 진행할 수고를 다시 해야 할 지 아니면 이 협상에 응해야 할 지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회사에 고용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쁜 제안을 받으면 이를 거절하기 쉽지 않습니다. 특히 급히 자리를 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면 개인 입장에서 제안을 거절하기도 어렵고 제안을 거절할 때 이를 회사가 받아들일 이유도 적습니다. 그래서 해고할 사람들이 다음 직장을 온전히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하려고 한다면 회사에 고용된 상태를 유지하며 구직 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회사는 2023년 마지막 날에 맞춰 사람들을 해고해 버렸고 이들은 2024년이 되는 순간 마땅히 부여 되었어야 할 연차도 없이, 또 다음 회사와 처우 협의 할 때 필요한 협상력의 거의 대부분을 날려 버린 백수 신세로 새해를 맞이합니다. 잘리기 직전까지 마주하던 프로젝트에는 미련이 남지만 회사에는 오직 짜증만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회사는 돈을 아끼기 위한 의사결정을 하면서 해고할 사람들의 미래에 협상력을 제거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협상력을 보강할 방법이 없지는 않은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기회를 통해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고 오늘은 다시 간만의 술자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난 프로젝트에서 왜 우리는 해고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결국 우리들이 회사가, 그리고 투자사가 원한 행동을 예상한 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전에 2023년 직업생활 회고, 여섯 번째 마일스톤은 왜 실패했을까, 실패한 마지막 마일스톤으로 서비스 하는 방법, 왜 새 PvE게임모드 개발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 PvP는 정말 저렴한가? 의사결정 따라잡기를 통해 개발하던 빌드를 계획대로 개발하는 범위 안에서 실패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을지 생각해 봤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근에 겪은 마감 실패는 계획을 약간 수정하는 수준에서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완화하고 또 실패를 통제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람들을 야근 시키는 방법이나 마감 일정을 통한 학대 전략을 통해 보상 없이 노동시간을 극대화 하는 전략이 필요하기는 했겠지만 어쨌든 지난번처럼 마감에 완전히 실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런웨이를 확보하는 범위 안에서 빌드 개발에 실패한 것은 사실이고 이제 남은 런웨이를 고려해 인원을 축소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제 해고된 지 몇 주가 지난 사람들이 테이블에 맥주와 피자를 올려놓고 이야기하는 마당에 지난 마일스톤 계획을 유지한 상태에서 잘할 수 있을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정말 피똥 싸며 개발하는 눈물 겨운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의 빈 자리를 대신해 엉뚱한 사람이 엉뚱한 자리를 맡고 또 엉뚱한 사람이 엉뚱한 리더십을 맡아 엉뚱한 행동을 하며 엉뚱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난 해고만으로 문제를 완화하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예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일스톤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돌이켜 보는 데서 관점을 좀 바꿔 애초에 우리가 메타버스로 시작한 빌드에 앞서 게임으로 만들기 시작한 이 결정 자체에 의미가 있었는지 이야기 해 보기 시작했는데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어쩌면 고객들에게 가상 세계에 돌아올 이유를 만들기 위해 먼저 가상 세계에 게임 요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선택은 근본적으로 회사, 나아가 투자사의 요구사항을 거스르는 결정이었을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약 2년 전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시장은 한창 너무나 반짝여 주변을 하얗게 타워 버릴 지경인 메타버스라는 키워드에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메타버스가 정확히 뭔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여튼 이 이름의 가상 세계에서 앞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될 것이며 미리 널리 사용되는 가상 세계를 구축하고 이를 사실상 표준으로 자리 잡게 만들 수 있다면 거의 과거에 월드 와이드 웹을 발명한 것과 비슷한 위상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 예상이 오갑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메타버스란 서로 다른 가상 세계 사이에 경험이 호환되는 시스템을 갖춘 가상 세계로 하나의 가상 세계가 모든 요구사항을 충족할 수는 없겠지만 서로 다른 가상 세계가 일부 경험을 호환 시킬 수 있는 상태로 동작하고 있으면 이들 고객이 이들 사이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개념은 이전에 여러 세계 사이에 물건 호환, 메타버스는 스스로 자신이 메타버스임을 입증할 수가 없다를 통해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돈을 대기 시작한 투자사는 우리가 메타버스를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당시에도 여러 사람들이 비디오 게임 업계가 메타버스를 잘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비디오 게임 업계 관점에서 메타버스는 개발 가능한 기능 목록으로 만들 수 없는 이상한 말일 뿐이었고 이를 개발한다 하더라도 직접적인 수익을 예상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통의 비디오 게임 업계는 이 키워드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게임 만들던 사람들이 나와 메타버스를 개발한다면 잘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도 당시에는 지금처럼 여러 가지 생각과 고민을 통해 메타버스의 정의, 사람들의 욕망, 실상 따위에 대한 사고의 결과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메타버스인지 뭔지는 몰라도 여튼 이 변화가 일어날 때 여기에 참여해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시에 우리들 역시 우리가 개발해야 하는 것이 메타버스라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투자사는 이전 시대에 올바른 의사결정을 통해 블록체인으로부터 거대한 부를 이전 받았기에 메타버스에 블록체인을 연동한 어떤 확실하지는 않은 모양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일단 이해하기 어려운 메타버스 어쩌구 하는 말을 제거하고 이 자리에 우리들에게 더 익숙한 가상 세계라는 말을 사용한 다음 이를 개발하려고 할 때 당장 근미래에 이 결과물이 큰 문제를 겪게 될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정부가 발주하는 여러 메타버스 프로젝트를 수주한 작은 회사들이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까지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잡한 가상 세계를 개발해 메타버스라며 우긴 다음 몇 억 정도 되는 돈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이들이 개발한 가상 세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뉴스에서는 종종 세금을 들여 개발한 메타버스에 접속자가 한 자릿수라는 기사를 내보냈는데 우리는 오히려 그런 세계에 접속자가 존재한다는데 더 놀라곤 했습니다. 가상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는 사람들이 이를 이용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가상 세계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일단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나타나면 어떤 기회라도 생길 거라고 예상했겠지만 그 예상을 실현할 어떠한 기술적 준비도 없이 오직 가상 세계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우리는 그냥 가상 세계를 바로 만들면 그때까지 망해 사라진 다른 가상 세계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러니까 고객들이 이 세계에 돌아올 이유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의견은 투자사에 기쁘게 받아들여졌는데 여러 가상 세계가 정부 돈을 쏙 빼먹곤 이내 사라지는 모습을 봐 오던 터라 고객들이 돌아올 이유를 제시하는 가상 세계라는 말로부터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 업계 출신인 사람들이 생각한 가상 세계에 다시 돌아올 이유는 바로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미리 정해진 행동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말을 좀 어렵게 했는데 다시 말하면 일단 이 세계에서 플레이 할 게임이 있고 이 게임을 위해 돌아온 고객들이 있는 상황에서 세계를 확장해 가상 세계의 다양한 역할을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여전히 말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한번 더 풀어 쓰면 가상 세계를 만들기는 할 건데 일단 게임부터 만든 다음 가상 세계는 나중에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충분히 이야기했으면 투자사는 우리들이 뭔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풀어서 설명하지 않았고 투자사는 이상함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정부에서 발주한 메타버스 프로젝트는 멀티플레이 환경에서 대강 동작하는 허접한 가상 세계를 만드는 댓가로 5억원 정도를 제공한 것 같습니다. 처음 투자사가 우리들에게 제시한 금액은 이보다는 조금 더 컸지만 전통의 비디오 게임 업계 관점에서는 터무니 없이 적은 돈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상 세계에 기반해 동작하는 제대로 된 게임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리텐션을 확보하고 나면 이 제품을 근거로 투자를 받아 소위 메타버스로 확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초반에 투자사가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적은 비용만을 제공했지만 미래에도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터무니없이 적은 돈으로 일단 개발을 시작하고 뭔가 동작하는 빌드를 만들어 추가 투자를 받아 런웨이를 확장하면 비디오 게임을 만들어 가상 세계에 대한 리텐션을 확보하고 이에 기반해 메타버스로 발전 시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다음 일단 게임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초반에 우리는 투자사로부터 지지를 받았습니다. 정부로부터 5억을 받고 만든 다음 순식간에 버려진 어처구니 없는 가상 세계와 이들이 기반한 허접한 바이너리 덩어리에 비해 우리가 제시한 가상 세계는 뭔가 뽀대 나는 그래픽, 뽀대 나는 설정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언리얼 엔진 기본 인간 애니메이션에 기반해 5억원짜리 메타버스와 별로 다르지 않은 수준으로 사람들이 멋진 배경 레벨을 걸어다니는 수준에 도달했을 뿐이었지만 이 상태만 놓고 봐도 우리들의 결과물이 압도적으로 나았습니다. 여느 NFT에 기반한 가상 세계들이 기껏해야 걷고 뛰고 점프하는 수준의 세계와 상호작용을 보여줄 뿐이었지만 애초에 우리는 훨씬 뛰어난 그래픽으로 세계와 상호작용 할 방법으로 게임 플레이를 제안했으니 우리들의 결과물이 압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게임을 잘 모르는 경영진이 프로토타입을 보고 감탄하며 이제 언제 출시하면 되느냐는 오싹한 질문을 하는 전설처럼 우리들의 결과물 역시 비슷한 시선을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는 이제 간신히 프로토타입 단계를 통해 가능성을 확인한 수준이었고 서비스 가능한 게임을 개발하려면 지금까지의 기간이나 비용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많은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온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줄어드는 런웨이를 보며 슬슬 걱정하고 있었지만 투자사는 현재 버전을 통해 추가 투자를 유치해 이후 계획을 진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투자사들이 바보는 아니기에 이미 한물 간 메타버스에는 거의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게임을 기반으로 한 메타버스라는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는데 이 두 가지 단어를 동시에 제시할 때 투자자들은 이 제품이 근본적으로 메타버스가 아니라 게임이라는 점을 쉽게 눈치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들의 첫 번째 투자자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부에서 5억원 주고 만들었다는 메타버스를 그보다 훨씬 많은 돈과 기간을 소모하고서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과 왜 다음 투자자들이 나타나지 않는지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후 약 1년에 걸쳐 게임을 만들었고 사이사이 투자 유치를 위한 온갖 작업에 대응했으며 NFT 홀더들을 위한 프라이빗 서비스를 위해 개발기간을 낭비하며 개발합니다. 여느 본격적인 개발팀에서 같은 결과를 내는데 훨씬 적은 기간만 있으면 되었겠지만 우리들은 닭 먹다 달려온 어떤 시연처럼 세계 각지 사람들에 맞춰 말 그대로 밤낮 없는 똥꼬쇼에 동원되었고 이 과정은 개발 속도를 훨씬 느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게임을 만들기 위한 개발속도를 낼 수 없었으며 왜 새 PvE게임모드 개발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 같은 잘못된 개발 방법은 표면적인 개발에 실패하게 만들었지만 만약 개발 속도를 내고 또 잘못된 개발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근본적으로 우리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유는 투자사와 우리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 이 이야기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서로 완전히 다른 언어로 이야기해 서로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서로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투자사가 원한 것은 바로 정부가 5억원과 3개월을 투입하면 얻을 수 있었던 메타버스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메타버스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메타버스와 블록체인, 그리고 NFT를 조합한 제품을 가지고 있으면 적당한 의사결정을 통해 큰 자산 이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마치 극초반에 액시인피니티의 재화를 대량으로 구매해 가격이 오를 때 엄청난 자산 이전을 경험한 것과 비슷합니다. 투자사는 우리가 제품을 공개하기 직전 블록체인을 통해 토큰을 발행하면 이 토큰의 상당량을 보유하기로 약속된 상태였습니다. 이전에 여러 스캠 프로젝트들이 그랬듯 일단 토큰을 먼저 발행하고 또 NFT를 판매한 다음에는 제품 개발에 대한 동력이 떨어져 열받은 사람들을 진정 시킬 최소한의 사람만 남고 개발팀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사실 투자사가 예상한 시나리오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도의적으로 문제시 될 수 있겠지만 투자사 역시 개발팀이 그렇게 사라져 버릴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테고 또 잘못은 개발팀이 했으니 투자사가 욕을 먹을 이유는 별로 없습니다.
투자사가 처음 제시한 투자 금액 역시 정부에서 발주하는 메타버스 제작비에 비해서는 조금 더 컸지만 전통의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는 관점에서는 터무니 없이 적었는데 우리들 입장에선 터무니없었지만 투자사 입장에서는 그냥 좀 더 있어 보이는, 그래픽 더 좋고 좀 더 여러 가지 상호작용을 할 수 있으며 그럴듯한 설정에 기반해 만들어진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메타버스를 만드는 수준에는 적당한 금액입니다. 개발팀은 여기에 고객들을 가상 세계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장치를 추가하겠다고 했고 이 계획은 그냥 말로 듣기에는 멋진 계획이라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지금부터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겠으며 여기에는 정부가 쓰레기 같은 메타버스 하나를 만드는데 투입한 돈의 50배에서 100배가 들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일을 시작하겠다는 의미였지만 이런 속뜻을 모두 주고 받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투자사는 우리가 그런 엄청난 돈을 쓰는 일을 시작할 작정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획에 동의했고 우리는 투자사가 우리가 시작할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모른 채 본격적으로 사람을 고용하고 팀을 늘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후 투자자들이 우리가 제대로 된 제품을 개발하고 있고 또 그럴 능력이 있음을 알면서도 모호한 입장을 유지하며 투자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본격적으로 비디오 게임에 투자하고 싶었다면 굳이 모호한 권리 관계로 얽힌 팀에 기웃 거릴 필요 없이 판교에 가서 이미 검증된 회사들을 살펴보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또 비디오 게임에 투자한다면 굳이 직접 손을 지저분하게 만들며 팀에 투자하고 이들을 직접 살펴볼 필요 없이 공개 회사의 주식을 매수하면 훨씬 더 간단한 방법으로 검증된 회사에 투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던 이들은 비디오 게임에 투자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들은 메타버스, 블록체인 같은 키워드에 매력을 느껴 투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들 관점에서 우리가 개발 중인 제품은 미래에 메타버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당장 이 제품에 개발되고 있는 기능은 메타버스와는 별 관계 없는 그냥 비디오 게임에 가까운 기능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을 테고 비디오 게임의 개발 기간과 비용을 고려할 때 이 제품이 메타버스로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기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대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모호한 상태의 제품에 비디오 게임에 투자할 생각이 없는 투자자들이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직 잘리지 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파국이라고 볼 수 없지만 이미 잘린 사람들 입장에서는 파국에 도달한 입장에서 우리들이 겪은 파국의 원인을 이전까지는 어쨌든 마일스톤 목표를 유지한 채 이를 달성하지 못한 이유를 찾는데 집중했다면 이번에 만나 이야기하면서 애초에 그 계획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을지 의심해 봤고 그 결과 어쩌면 투자사가 생각한 계획과 우리가 생각한 계획이 서로 완전히 달랐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의사소통 했기에 파국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데 의견이 모였습니다. 잘린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제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투자사와 개발팀은 서로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봤고 이 시나리오가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