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할 수 없는 목표와 어쩔 수 없는 개발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플레이 한 팰월드의 캐릭터 생성 부분은 이전에 여러 차례 경험한 고통스러운 개발 과정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제는 안 그럴 겁니다.

실패할 수 없는 목표와 어쩔 수 없는 개발

이제 백수 생활의 끝이 다가왔습니다. 해고된 다음 잠깐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력서를 열심히 쓴 다음 공격적으로 면접을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리퍼 체크를 받으며 어릴 때 했던 실수가 제 평생에 걸쳐 얼마나 큰 댓가로 다가오는지 세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구직을 진행하며 나를 얼마에 팔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도 있었는데 한 회사에서는 희망 연봉을 기입해 회신할 때 동시에 왜 그 금액을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함께 적으라고 했는데 이 때 지난 수 년 동안의 급여와 인상 이유, 업계 전체에 걸친 이벤트 따위를 함께 검토해 볼 계기가 되어 재미있었습니다. 어떤 면접은 순수하게 면접에서 상대와 이야기하는 경험 자체가 즐거웠고 또 이번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의 경력을 유년기의 끝으로 정의하고 이제부터 시작할 경력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지 생각해 보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이번 백수 생활을 하며 그동안 거의 회사에 의존해 규칙적인 생활을 해 온 입장에서 회사가 사라지면 생활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을지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늘 그랬던 것처럼 출근할 곳이 확정되면 최대한 빨리 출근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전 회사에서도 2주 후에 출근해도 되는데 1주가 지나니 심심해서 출근일을 1주 당겨 출근하기도 했습니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에는 하루라도 더 쉴 날을 눈에 불을 켜고 찾으며 연휴가 끼어 있으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지만 그런 회사가 없어지면 규칙적으로 행동할 동기를 찾지 못하고 흐트러져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또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의미 없이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아무 때나 자며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번에는 매주 금요일에 뉴스레터를 보내는 일정을 맞추기 위해 매주 토요일 오후에 한 번에 긴 시간을 들여 글을 쓰고 매주 수요일 즈음에는 다음 뉴스레터의 커버스토리를 쓰면서 기본적으로 주간 생활 패턴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또 그 동안 밀린 게임을 플레이 하며 4D 마인스위퍼 같은 어처구니 없는 게임을 플레이 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미뤄 온 어쎄신크리드 신화 3부작을 마무리하는데 시간을 많이 들였는데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평생에 기억할만한 경험으로 잘 마무리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자는 시간과 깨어나는 시간이 각각 약 3시간씩 뒤로 밀린 것을 제외하면 생활이 크게 망가지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이제 백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또 제가 정의한 경력의 세 번째 챕터를 시작하기 직전 집과 회사에서 물리적으로 멀면서도 익숙한 장소로 자리를 옮겨 이런 온갖 생각으로부터 멀어지기로 하고 주 중에 얼마 동안 집을 나가 있었습니다. 산은 그저 지형의 일부이고 인간의 이동을 가로막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자전거를 타고 포장된 높은 언덕을 올라가는 건 즐겁지만 그런 길은 높은 산 사이에 있는 그나마 낮은 지형을 따라 위치하고 있어 높은 산을 직접 올라가는 것 보다는 훨씬 쉽고 재미있습니다. 육지에서 가장 높은 포장도로인 만항재나 남한 전체에서 가장 높은 포장도로인 천백고지도 이들이 아무리 높아 봤자 가장 높은 산봉우리보다는 거의 킬로미터 단위로 더 낮아 적당히 운동하는 정도로 오르내리기에 적당합니다. 하지만 산은 그런 포장도로와 달리 본격적으로 높고 험하고 지루하게 걸어 올라가야 할 뿐 아니라 내려올 때도 똑같이 걸어 내려와야 해서 체력을 남겨 놔야 하는 등 암만 생각해도 취향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산에 올라가자고 아무리 권해도 온갖 핑계를 대며 피해 다녔는데 이번에는 산 꼭대기 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자는 권유는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려 사람도 자동차도 움직일 수 없다는 보도를 보고 우리도 눈에 갇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고작 하루 이틀 만에 도로의 눈이 몽땅 치워진 모습을 보고 역시 눈이 많이 내려 눈에 대한 준비가 잘 된 지방 답다 싶었습니다. 지난 31호 뉴스레터 커버스토리 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가요? 뒷 부분에 이 지역의 제설 능력을 신뢰해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지만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 저곳 돌아다녔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나서 고작 몇 분이 지나자 대형 트럭 전면을 개조한 제설차량이 도로를 훑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 신뢰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번에도 계속해서 신뢰할 만 했습니다. 한편 가까이서 본 도로들은 주변으로 눈을 치워 도로 양 옆에 눈이 키만큼 쌓여 있었지만 산 정상에 올라가 멀리서 본 동네는 온통 하얀 눈으로 장식 되어 있어 풍경을 내려다 보는 순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내려다 보니 케이블카에 탄 저는 추워서 옷을 두툼하게 입고 있는데 비해 급경사를 네 발로 오르는 분들은 더워 옷을 다 풀어 해치고 더위를 식히고 있었는데 마치 한겨울에도 꽤 얇아 보이는 자전거 옷만 걸치고도 별로 춥지 않은 경험과 비슷하겠다 싶어 산을 오르는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참고로 영하 10도 이하에서 자전거를 탈 때 입는 자전거 옷도 두꺼운 옷과는 거리가 있는데 멈추지 않는 이상 춥지 않습니다.

분명 글 제목을 실패할 수 없는 목표와 어쩔 수 없는 개발 이라고 해 놓고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는데 백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곧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잠깐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생각하다 왔다는 이야기로 끝낼 작정은 절대 아닙니다. 일정을 모두 마친 다음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집에 돌아오다가 차선 사이를 바쁘게 오가고 또 앞 차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일차로로 달리는 승용차 뒤에 바짝 붙어 경적을 울리는 커다란 화물 트럭을 봤습니다. 저렇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빨리 달리는 차량을 보면 항상 급똥일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아무리 급똥이라도 저렇게 까지 다른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 만큼 급한 건가 싶어 불만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트럭이 톨게이트를 지날 때 고작 한 백 미터 앞에 있는 모습을 보고 문득 순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차선을 바삐 옮겨 다니며 다른 차량을 앞지르기를 반복하면 아주 짧은 단위 시간 안에는 더 빨리 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The Simple Solution to Traffic’을 보면 알 수 있듯 결국 감수한 위험과 추가로 사용한 연료, 추가로 작동해 수명이 줄어든 기계장치에 들어갈 비용을 감안할 때 전혀 빨리 가지 못합니다. 그저 속도에 맞지 않는 차량을 안전하게 추월하며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에 따라 이동하면 결국 굳이 더 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거의 같은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제 경력의 두 번째 십 년 동안 급한 마음에 빠른 문제 해결을 목표로 온갖 실수를 저지르던 바로 저 자신처럼 보여 여전히 급하게 다른 차들을 추월해 멀어지는 트럭을 바라보며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편 집에 돌아와 메일을 확인해 보니 몇 주 전 팰월드에 관심을 보이던 가족에게 스팀을 통해 선물을 보냈는데 아직 선물을 수락하지 않아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환불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습니다. 집을 떠났다가 집에 돌아오면 양 손 가득 빨래 뭉치를 들고 있기 마련이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집안에 남아 있는 빨래와 가방을 가득 채운 빨래를 모두 끄집어 내 세탁기에 몰아 넣고 세탁기가 이들을 처리하는 동안 서로 등을 지고 앉아 팰월드 멀티플레이를 시작하기로 합니다. 이전에 미리 플레이 하던 월드가 있었지만 여느 MMO 게임에 임하듯 경험치 1 조차 허투루 낭비하지 않도록 신경 쓰던 것에 비해 이전에 시간을 좀 들여 플레이 했지만 새로운 멀티플레이 서버에서 다시 시작하는데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초식동물 게임 플레이어처럼 시장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경쟁을 핵심 요소로 하는 게임에 비해 좀 더 느슨한 플레이를 허용하는 게임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속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에 마인크래프트, 테라리아 같은 게임을 가까운 사람들과 오랜 세월에 걸쳐 플레이 하며 각각 수 백에서 수 천 시간을 들였지만 여전히 지루하지 않았고 여전히 할 일이 있었으며 느슨하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며 세계에 일으키는 상호작용은 게임을 쉽게 내려놓기 어렵도록 만들곤 했는데 아직 본격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이지는 않았지만 이 게임 역시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다만 아직 얼리 액세스 단계여서 아무리 판교에서 게임을 만들어도 이 정도 상태로 게임을 공개하는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임의 여러 그래픽 에셋이 평균 이하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또 어처구니 없는 인터페이스 설계에 당황하며 너무 뻔한 문제가 여러 주에 걸쳐 전혀 수정되지 않는 상황을 경험하면서도 얼리 액세스 단계에 뭐 많은 것을 바라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한 번에 들 수 있는 최대 무게보다 더 많은 아이템을 가질 때 이동 속도가 느려지며 걷는 애니메이션이 느리게 재생되는 모습을 대하자 ‘내가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어기적인가?'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터페이스의 어처구니없음이나 그래픽 에셋의 수준 낮음 같은 문제는 아주 사소한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발전 가능성을 풀풀 풍기는 게임 플레이는 ‘그래픽이 좀 후지면 어때’ 란 생각으로 바뀌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도록 만듭니다. 게다가 주변에 널려 있는 덜 경쟁적인 이런 장르 게임에 관심을 가져 왔지만 이런 게임이 거의 나타나지 않아 오랫동안 함께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다시 슬금슬금 기어나와 이 게임을 언급하며 혹시 이거 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해 올 때 게임이 후져 보이든 말든 어쨌든 이 게임은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수준으로 잘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팰월드를 처음 시작할 때 월드와 캐릭터를 생성해야 합니다. 이전에 플레이 했던 샌드박스에 가까운 게임인 마인크래프트나 테라리아는 월드 자체도 무작위로 생성되어 지형을 예측하기 쉽지 않지만 팰월드는 지형은 마치 여느 MMO 게임처럼 고정 되어 있고 그 지형 위를 돌아다니는 상호작용 대상이나 환경의 변화, 적들의 강한 정도 같은 다른 값들이 바뀌어 지형에는 익숙해지되 다른 요소들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 게임을 시작하면 똑같이 바다로부터 밀려와 해안가에 누워 있다가 눈을 뜨면 도망치는 팰들을 보고 좁은 길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하는 경험은 매번 똑같습니다. 그런데 월드는 그렇다 치고 캐릭터를 생성할 때 강조된 글씨로 여기서 캐릭터를 생성하면 게임을 시작한 다음에는 수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습니다. 초기 MMO 게임들이 한 번 만든 외형을 인게임에서 바꿀 수 없었는데 여기에는 딱히 대단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한 번 만든 외형을 인게임에서 바꾼다는 개념 자체를 개발자들이 깊이 고려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캐릭터 이름이나 외형을 만드는데 좀 더 신중하게 많은 시간을 들이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외형이나 이름이 마음에 안 들 경우 캐릭터를 다시 만들고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강력한 패널티가 있어 종종 고객을 이탈 시키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르며 이제 MMO 게임이라도 인게임에서 캐릭터 이름을 바꾸고 서버를 바꾸고 또 외형을 바꾸는 일이 별 것 아닌 일로 인식이 바뀝니다. 게임에 따라서는 이름을 변경하는데 비용을 부과하기도 하고 마치 이동전화 회사들이 특정 전화번호를 판매하는 것처럼 특정 이름을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디센트럴랜드 네임 사례에서 게임 상의 여러 요소에 붙일 이름을 구입하는 사례를 살펴봤는데 이제는 서비스를 시작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게임 상에서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커진 게임들이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외형 역시 인게임에서 아이템 탈착을 통해 외형이 크게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이전처럼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한 번 만든 외형을 인게임에서 바꿀 수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데 별 의미가 없어집니다. 아이템 탈착에 의한 외형 변경 뿐 아니라 캐릭터를 만들 때만 가능하던 신체에 대한 변경 역시 인게임 기능으로 가능해졌고 역시 여기에 요금을 부과하기도 하며 게임의 내러티브에 잘 녹여 낸 적절한 규칙을 통해 자연스럽게 외형의 변화를 처리한 게임도 여럿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한때 캐릭터 이름과 외형은 한 번 정하면 바꿀 수 없었지만 여기에 딱히 무슨 이유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으며 시간이 지나며 인게임에서 이름, 외형을 바꿀 수 있게 됐고 게임에 따라 이 과정이 요금을 부과하기도 하고 또 특수한 외형이나 이름을 판매하는 사례도 있어 현대에는 더 이상 인게임에서 캐릭터 이름, 외형을 바꾸지 못하도록 할 적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팰월드에서 한 번 생성한 캐릭터 이름과 외형을 바꿀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개발 우선순위 때문일 거라고 예상합니다. 이미 로드맵 상에 온갖 기능을 추가해야 하고 이들이 각 마일스톤마다 긴 목록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겁니다. 고객들이 한바탕 얼리 액세스 단계의 게임에 열광하며 한동안 높은 동시 접속자 수를 기록했지만 개걸스러운 고객들은 개발팀의 사정 따위에는 아랑곳 않은 채 현재 공개된 게임 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 해보고 게임이 제시한 온갖 컨텐츠를 몽땅 소모해 버린 다음 더 이상 할 것이 없어 게임을 접고 있는 상황입니다. 근본적으로 개발팀은 고객들의 컨텐츠 소비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에 갈수록 게임을 더 열린 모양, 더 경쟁적인 모양으로 만들어 고객들이 스스로 컨텐츠를 만들어내도록 한 다음 개발할 시간을 벌곤 하지만 이 게임은 아직 그럴 단계에 오르지도 못했고 고객들을 함부로 경쟁적인 플레이로 내몰았다가는 위에서 언급한 한동안 이런 게임이 없어 게임을 플레이 하지 않던 고객들의 관심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장르를 표방한 게임이 잠깐 등장했었지만 자기 파괴적인 밸런스와 상위 컨텐츠로 갈수록 좀 더 경쟁적인 플레이를 요구한 덕분에 한번 게임을 시작하면 최소한 수 백에서 수 천 시간 동안 습관처럼 게임을 플레이 할 고객들을 날려 버리고 얼마 못 가 서비스를 종료한 사례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발팀은 일단 현재 게임의 틀을 유지하면서 게임에 온갖 기능을 추가해야 하고 이 사이에 인게임에서 캐릭터 외형을 바꾸는 기능은 우선순위가 아주 낮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을 시작할 때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을 한 번 개발해 일단 게임이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 기능과 이를 구성한 인터페이스, 코드를 재사용해 인게임에 같은 기능을 구현하는 것은 다른 새로운 기능을 개발하는 것과 비교해 비용 대비 효용 역시 낮습니다. 이 기능을 개발하려 한다면 낮지 않은 확률로 기획팀의 주니어님께 기존 개발된 게임 시작 전 또는 로비에서 캐릭터를 생성하는 과정을 참고해 같은 기능을 낮은 비용으로 인게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기획서를 작성해 달라고 요구할 겁니다. 이런 요구의 기반에는 어차피 캐릭터 외형 좀 바꾸고 이름 좀 바꾸는 정도는 그냥 지금 쓰는 인터페이스 좀 그대로 가져오고 코드도 좀 가져오면 금방 만들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받은 주니어님 입장에서 이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은데 일단 이미 플레이 가능하도록 구축된 인게임 인터페이스에 외형 변경을 적당히 끼워 넣는 것 자체가 만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게임 인터페이스는 캐릭터 외형 변경 기능의 존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개발되었고 이 태스크를 생성할 때의 예상처럼 대강 로비에서 쓰던 인터페이스를 재사용하는 수준과 달리 인게임 인터페이스를 전면적으로 재설계 해야 하는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 상황을 모니터링 하지 않으면 예상과 달리 기획서 작성에는 갑자기 한 2주 이상의 예상보다 훨씬 긴 기간이 걸리고 그 결과는 인게임에 캐릭터 외형 변경을 추가하는 요구사항이 아니라 인게임 인터페이스의 전면적인 개편에 대한 요구사항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아직 상황파악을 잘 못 했다면 이를 그냥 진행 시킬 수도 있는데 이제부터는 더 신기하고 지저분한 일이 시작됩니다. 일단 이미 로비에서 캐릭터 외형을 생성하던 인터페이스를 재사용해 비용을 낮추려던 목표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또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한 번 지나가는 절차에 맞춰 고안한 인터페이스는 인게임 상에서 항상 이 인터페이스를 호출하는 상황에 대응하지 않으며 로비에서는 주로 로비 전용 인터페이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인게임 인터페이스와 함께 나타날 때 서로 어울리지 않거나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오작동할 수 있습니다. 또 언리얼 기반에서 개발할 때 항상 일어나는 인터페이스 위에 캐릭터를 표시하기 어려운 제한 때문에 로비에서는 별 문제 없이 사용했던 인터페이스를 인게임에서는 사용할 수 없거나 무시하기 어려운 성능 문제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또 캐릭터의 실제 상태에 완전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로비와 달리 인게임에서는 캐릭터의 현재 상태에 따라 할 수 있는 행동과 할 수 없는 행동에 제약이 생겨 그냥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캐릭터 외형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상황에 대응해야 합니다. 가령 필드에서 외형 변경 인터페이스를 열고 있다가 몬스터로부터 공격 받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아니면 던전 보스를 공략하기 직전의 누군가가 리더의 통제를 무시하고 외형을 바꾸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 지 같은 상황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이미 이 기능은 기존 에셋을 재사용하는 싼 기능에서 본격적으로 비싼 기능으로 바뀝니다. 애초에 이 기능은 싼 기능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처음 기획서를 요구할 때 포함되었던 ‘낮은 비용’을 재설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나은 창의적인 제안을 할 가능성을 낮춘 채 이 말에 매몰되어 이미 인게임에서 재사용이 불가능할 것이 분명한 로비 인터페이스를 어떻게든 인게임에 욱여 넣느라 이상하게 변한 요구사항이 별 검토 없이 팀 밖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이미 사용한 비용을 매몰 시키는 결정을 모두가 회피하려 하기 때문에 분명 모두가 이 요구사항이 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개발을 멈추기 어렵게 될 수도 있는데 이 때 서열에 무심한 결과에 소개한 협업 부서들 사이의 관계에 어둡거나 이 관계를 잘 통제하지 못할 경우 이 태스크의 담당자를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 겁니다. 모두가 이 기능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미 사용한 비용을 매몰 시키는 결정을 내리고 상급자나 경영진에게 이 사실을 솔직하게 밝히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이상한 상태로 만들기는 할 테지만 가장 만만한 담당자 본인에게 자신들의 불만을 안전장치 없이 토로해 담당자 개인을 완전히 코너에 몰아 넣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다면 이제 나이 먹어서 미친개처럼 하지 않아도 됩니다에 소개한 대로 관리자 또는 부서장 관점에서 비용을 매몰 처리 하는 결정을 하거나 어쩔 수 없이 이 상태로 일단 개발을 진행해 좀 이상하지만 성과를 내는 방향으로 미리 손을 써 둬야 합니다.

그렇게 미리 손을 써 놔도 분위기 파악 못하는 누군가는 회의 때 나쁜 질문은 바퀴벌레와 같다에 설명한 나쁜 질문을 반복하거나 지금 빌드 공개 안 하면 우리 망하나요?에 소개한 것 같은 ‘내가 어제 플레이 해본 게임'에 근거한 요구사항을 반복해서 말하며 모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진실은 이 사람이 이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상황을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더더욱 모르는 척 모든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기를 반복해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상황의 근본에는 모든 마일스톤의 목표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실패할 경우 이 사실을 경영진에게 사실대로 보고할 수 없으며 기능의 재미와 창의성에 치중하기 보다는 기존에 개발한 에셋을 재활용한 낮은 비용을 통한 구현 같은 게임디자인 관점에서 전문성이 부족하거나 실상 달성이 불가능한 요구사항을 별 검토 없이 수행하는데 있습니다. 만약 인게임에서 캐릭터 외형과 이름을 바꾸는 기능이 필요하다면 ‘기존 기능을 활용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개발’ 같은 모호한 목표는 애초에 기획 단계에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기획 단계에서는 순수하게 인게임에서 이 기능이 필요하며 이를 게임에 자연스럽게 포함할 자연스럽고 창의적인 방법을 고민하는데 집중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 제작된 인터페이스 에셋을 재사용하거나 기 구현된 코드를 재사용하는 등의 비용 절약은 인터페이스 에셋을 개발하는 단계에서, 또 인게임에서 캐릭터 외형 변경을 구현하는 단계에서 각 단계를 담당한 협업 부서들이 고민할 주제입니다.

팰월드로 돌아가 아주 쿨하게 ‘인게임에서는 외형을 바꿀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경험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 제 스스로 비슷한 요구사항을 수행하려 할 때에도, 또 부서장으로써 요구사항을 수행하도록 지시할 때에도 이런 문제를 쉽게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항상 시야가 좁아져 도대체 왜 이 요구사항은 여러 협업 부서로부터 쉽게 공격 받을 수밖에 없는지, 또 회의 때 답변하기 어렵거나 대답할 권한이 없거나 좁은 시야 안에서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은 왜 그리 많이 나오는지, 그리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다른 게임의 사례가 갑자기 나타나 부족한 지식에 기반해 불완전한 답변을 해야 하는 상황은 왜 이리 자주 나타나는지 이해하고 이를 완화할 방법을 고민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국 모든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환경, 기획을 포함한 여러 협업 부서 사이에서 특정 담당자가 직접 고민할 필요가 적은 요구사항이 고민해야 할 부서나 사람을 특정하지 않은 채 포함되어 엉뚱한 사람이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제 계획의 실패를 경영진에게 보고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미친개처럼 굴어 요구사항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지만 어쨌든 진행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또 의미 없는 요구사항이 태스크 목표에 포함되어 이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엉뚱한 사람이 이를 반영하느라 엉뚱한 요구사항을 만드느라 시간을 사용하지 않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개발을 진행할 때 모두가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이를 악용해 문제를 일으키고 권한을 확대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 이들을 처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들이 소위 이상적인 개발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지만 실제로는 흔하게 일어나며 이런 환경에서도 어쨌든 개발을 해 내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만 하면 마음이 조금 아플 수 있지만 어쨌든 결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전보다 시야가 아주 조금은 더 넓어져 이 상황을 알고 당하기 때문에 이전 보다 훨씬 대미지를 덜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의 발생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팰월드는 아주 쿨하게 인게임에 캐릭터 외형 변경 기능을 넣지 않았습니다. 분명 내부에서 기능의 필요성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저 로비 인터페이스를 재사용 해 인게임에서 기능을 사용하도록 하는 방법 외에도 인게임에서 독립된 상호작용 기능을 통해 게임의 내러티브에 어울리는 외형 변경 방법을 계획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게임에 기능을 어떻게든 욱여 넣기 위해 자원을 낭비하고 관련 스탭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대신 그냥 기능을 빼고 공개해도 어쨌든 게임은 돌아가고 이 모든 과정에서 낭비를 최소화했습니다. 쿨한 길찾기 궤적처럼 핵심적인 기능과 나머지를 구분하고 이들 사이에 자원을 적당히 분배해 동작하는 게임을 공개하는데 집중하면 지금까지 소개한 솔직히 진짜 어이없고 무능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내부에서 어떻게 개발하고 있을지 거기서 일하고 있지 않은 이상은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핵심 기능이 아닌 이상 최소한만 구현하고 넘어갔다든지 어처구니 없는 인터페이스 설계와 인게임 에셋 수준 따위를 고려할 때 지금까지 우울하게 소개한 무능한 사건을 겪으며 개발하는 대신 결정권을 가진 소수의 아웃퍼포머가 의사결정과 지시를 수행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팰월드에서 처음 캐릭터를 생성할 때 나오는 메시지를 보고 온갖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 더 잘할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이번 45호에도 다섯 가지 다른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사이보그
오전에 치과에 가고 또 오후에 안경 렌즈를 바꾸러 갔다가 문득 저 자신이 사이보그의 정의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말을 조금 더 예쁘게 하면 어땠을까?
여러 게임디자이너들이 주니어 시절에 들은 무서운 말들은 결국 우리가 성장하게 해 주었지만 한편 그렇게까지 무섭게 말하지 않을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게임디자인의 분업이 만들어낸 비 존중
때때로 너무 강한 분업 환경이 개개인의 업무에 대한 존중을 만들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계에 대항해 승리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만드는 게임 서비스는 봇과의 전쟁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을까요? 아니, 승리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자원이 필요합니다.
글을 왜 그렇게 길게 써?
블로그에 글을 즐겨 쓰지만 그렇게 쓰는 글과 실제 일하며 쓰는 글 사이에는 목적과 방법, 결과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백수 생활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집과 다음 회사로부터 멀리 떨어진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겨울 나라에 다녀왔습니다. 분명 집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을텐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거나 일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려면 물리적으로 집과 회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가야 합니다. 상당히 낭비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집에서 일 생각을 안 하는 일이 왜 잘 안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강원도까지 가는 길에 고속도로 위에서 앞을 바라보며 가족과 학교 다닐 때 외운 주기율표를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검색하지 않고 하나 씩 말해보며 시간을 보냈는데 수소, 그리고 18족 원소, 반응성 원소를 그럭저럭 기억해냈지만 모두가 20번 칼슘까지는 외웠다고 주장했던데 비해 결국 칼슘을 말하는데 모두가 실패해 참담한 심정으로 강원도 경계를 넘었습니다. 물론 그 다음에는 모두 잊고 눈을 가지고 노는데 집중했지만 최근에 보기 시작한 관련 유튜브 채널을 좀 더 열심히 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간만에 출근이라 긴장되는 주말로 접어듭니다. 연휴 잘 보내시고 또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